[참고] dhammacakkhu[법안(法眼)]의 두 가지 용례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아는 예류자를 설명하는 용어로는 법안(法眼)[dhammacakkhu]도 있습니다. 그런데 법안(法眼)은 두 가지 동사와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1. dhammacakkhuṃ uppajjati
이때 uppajjati는 to be born; arises인데, '법안이 생기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경전은 격변화에 의해 대부분 udapādi로 나타나는데 arose; originated. (aor. of udapajjati)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특별한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 유형의 dhammacakkhu[법안]은
'일어남의 법은 무엇이든 모두 소멸의 법이다.'라는 법안(法眼)이 생겼다.
의 형태로 16번 나타납니다. 가르침이 설해지면 가르침에 의해 법의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2. dhammacakkhupaṭilābho
이때 paṭilābho는 attainment; acquisition; obtaining.인데, '법안을 얻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은 율장과 4부 니까야에 모두 열 번 나타나는데, 관통 상윳따(S13)의 열 개 경전입니다.[S13:1~S13:10]
비구들이여, 법의 관통은 이처럼 큰 이익이 있고, 법안을 얻음은 이처럼 큰 이익이 있다.
3. 두 표현의 차이에 대한 이해
dhammacakkhuṃ udapādi는 꼰단냐 존자의 깨달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일어남의 법은 무엇이든 모두 소멸의 법이다.'라는 법안이 생겼다.」라는 말은 고멸(苦滅)의 가능성에 대한 공감 즉 믿음이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반면에 dhammacakkhupaṭilābho[법안을 얻음]은 관통 상윳따의 경들에서 '이제 최대 일곱 생만이 남아있다.'고 언급함으로써 예류자인 것을 말해줍니다.
그렇다면 법안이 생김[dhammacakkhuṃ udapādi]과 법안을 얻음[dhammacakkhupaṭilābho]은 다릅니다. 가르침을 통해 고멸(苦滅)의 가능성에 대한 공감 즉 믿음이 생긴 것으로의 법안(法眼)이 생기면 이어지는 공부를 통해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를 꿰뚫음으로써 법(法)을 관통하고 여실지견(如實知見)한 예류자가 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법안이 열림[dhammacakkhuṃ udapādi]을 예류도(預流道)를 얻은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비교 검토가 필요할 것입니다.
4. 예외적으로 dhammacakkhuṃ uppajjati가 나타나는 경은 <여읨 경(A3:92)>입니다. 법안이 생긴 이후의 수행의 진척을 설명해 주는데, 믿음의 확고함에 이어지는 수행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