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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세 가지 질문】

0 664 2018.02.24 13:21

【세 가지 질문】


질문1. 윤회(輪廻), 정말 있는 것일까요? 있다면 어떤 형태로 진행되는 것일까요? 왜 부처님은 그토록 윤회를 강조하시고, 자아(自我)가 아닌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를 설명하시는 걸까요?


불교(佛敎)는 종교(宗敎)입니다. 삶에 대한 부처님의 해석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함으로써 부처님에 의지하여 삶의 향상을 꾀하는 사람들의 종교이기에 불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신자에게 삶에 대한 부처님의 해석 즉 가르침은 삶의 기준입니다.


부처님은 윤회한다고 알려줍니다. 우리가 스스로 확인할 수 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부처님의 해석에 공감하고 동의하고 신뢰함으로써 받아들이고 그 해석을 기준으로 삶의 향상을 꾀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래서 신심(信心)을 갖춘 불교신자라면, 윤회는 정말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윤회를 부정합니다. 물론 윤회하지 않는다는 그들의 주장도 직접 경험 되지는 않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있다는 견해보다는 없다는 견해가 더 공감하기 쉬울 따름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내 보아내지 못하는 어리석은 중생의 고집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 고집을 놓아버리게 하기 위해서 그토록 윤회를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 「그래도 지구는 돈다!」


부처님 가르침은 이렇게 이해됩니다. ㅡ ‘사실에 괴리된 삶은 괴로움을 만들고[고(苦)], 사실에 부합한 삶은 행복을 만든다[고멸(苦滅)].’


사실은 존재 일반의 조건관계로는 삼법인(三法印)[제행무상(諸行無常)-제행개고(諸行皆苦)-제법무아(諸法無我)]이고, 고(苦)의 발생의 조건관계로는 연기(緣起) 곧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십이연기는 중생인 존재[유(有)]의 삶의 과정을 설명합니다. 명색(名色)과 함께하는 식(識)이 삶의 과정을 통해 몸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존재 상태를 바꾸고[무아(無我)], 몸이 무너지면 새로운 몸과 만나 다시 태어나 새로운 존재 상태로 삶의 과정을 지속합니다[윤회(輪廻)]. 이런 삶의 과정에는 변하지 않는 존재는 없습니다. 원래 있는 것이어서 삶의 과정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 그런 존재 즉 아(我)는 없습니다. 오직 삶의 과정에서 ‘자기 증식에 의한 변화’의 과정을 통해 하나의 상태를 유지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그런 존재가 바로 지금 삶의 주인공인 ‘나’인 것입니다. 나는 있되 아(我)라고 불리는 그런 존재가 아니어서 무아(無我)인 것입니다. 이렇게 설명되는 삶의 과정이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입니다.


부처님은 ‘나는 오직 고(苦)와 고멸(苦滅)을 말한다.’고 합니다. 삶의 과정에 수반되는 고(苦)의 자각과 고멸(苦滅)의 실현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사실에 괴리된 삶이 만드는 고(苦)와 사실에 부합한 삶이 만드는 고멸(苦滅)로 연결됩니다. 


윤회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생(生)-노사(老死)를 반복하며 중생으로의 삶을 반복해야 하는 고(苦)에 대해 자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각하지 못하면 고멸(苦滅)은 실현되지 않습니다.


삶의 주인공인 자아(自我)가 있어서 그가 윤회한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중생의 삶을 청산하고 해탈된 삶을 실현하는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언제까지나 자아(自我)의 착각 속에서 중생의 고달픈 삶을 반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존재[유(有)]의 삶이 몸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무아(無我)적으로 변화하다가 몸이 무너지면 윤회(輪廻)하여 새로운 몸으로 태어나 새로운 존재[유(有)]의 삶을 살아간다는 주장은 사실입니다. 부처님께서 바른 깨달음을 통해 보아내고, 거기에서의 벗어남을 실현한 후 알려주신 완성된 지혜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실에 부합한 앎이 고멸(苦滅)의 실현을 안내하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토록 윤회를 강조하시고, 자아(自我)가 아닌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질문2. 과학이 세상을 주도하는 지금, 왜 우리는 윤회를 말해야 하는 걸까요?

       ㅡ 과학과 공존(共存)-병행(竝行)하지만 더 넓은 영역에 답을 주는 불교


과학은 삶의 많은 문제들에 답을 줍니다. 때문에 과학문명의 이기(利器)를 잘 활용하는 것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 됩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윤회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과학의 영역이 제한적이기 때문이라고 해야 합니다. 과학은 물질의 영역에서 삶의 문제에 답을 주기 때문입니다. 더 잘 보게 하고, 더 잘 듣게 하고, 더 잘 냄새 맡게 하고, 더 잘 맛보게 하고, 더 잘 느끼게 하는 것들이 모두 과학이 제공할 수 있는 이점입니다. 그러나 삶은 물질만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취온(五取蘊)의 삶입니다!


물질인 색(色) 외에도 수(受)-상(想)-행(行)의 물질 아닌 것들과 식(識)이라는 물질 아닌 것으로의 마음이 함께하여 삶을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苦)의 자각과 고멸(苦滅)의 실현이라는 불교적 삶은 과학만으로 모든 해답을 제공받지 못합니다. 


이때, 물질 아닌 것들에 대해서는 어떤 방법으로 알고 이해해야 합니까? 


여기서도 역시 종교의 영역에 속한 문제에 대해서는 부처님의 해석을 기준 하는 불교신자의 삶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설하신 그대로 수(受)-상(想)-행(行) 그리고 식(識)에 대해 배워 앎으로써 고멸(苦滅)의 실현을 위해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기준 위에서 부처님은 연기하는 식(識)의 윤회라는 삶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몸이 죽어도 따라 죽지 않으면서 삶의 과정 마다 변화하는 식(識)입니다. 그래서 삶은 이 몸으로의 한시적 기간을 살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행으로 해탈할 때까지는 새로운 몸과 함께 끝없이 되풀이되는 것입니다. 


과학이 세상을 주도하는 지금 윤회를 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나의 삶이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이 몸으로의 시간에 국한되지 않고 해탈할 때까지는 끝없이 죽고 태어남을 반복하며 괴로운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은 진화론에 대한 불교적 입장을 질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물질의 영역 안에서 진화론은 몸의 변화-발전을 설명합니다. 부정해야 하는 이론이 아닙니다. 우리 눈앞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진행되어 가는 현상이니 그 현상에 대한 정당한 해석은 인정하면 됩니다. 그러나 진화론이 삶의 모든 점을 해석하지는 못합니다. 진화론이 마음[식(識)]의 연기하는 과정을 설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명색(名色)과 서로 조건 되는 것으로의 식(識)을 설명합니다. 몸이 아직 발전하지 못했을 때는 발전하지 못한 몸 즉 뇌의 수준에 조건 지어진 만큼의 식(識)이 몸과 함께 조금은 원시적인 삶을 살았고, 몸이 발전한 지금은 발전한 몸 즉 뇌의 수준에 조건 지어진 만큼의 식(識)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몸 즉 뇌가 더 발전할 미래에는 더 발전한 몸 즉 뇌의 수준에 조건 지어진 만큼의 식(識)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과학과 불교는 이렇게 연결되어야 합니다. 과학문명의 이기를 충분히 활용하는 가운데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고멸(苦滅)은 훨씬 더 효율적으로 우리 삶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과학과 불교에 대한 이런 접근은 중요합니다.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냄새 맡고, 더 잘 맛보고, 더 잘 느끼는 것은 이중적 의미를 가집니다. 인식작용이 단순히 대상에 대한 앎을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의 경험 즉 수(受)를 함께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냄새 맡고, 더 잘 맛보고, 더 잘 느끼는 것의 높은 의미는 그로 인해 고(苦)를 경험하지 않고 락(樂)을 경험해야 하는 데에 있습니다. 그러나 과학은 더 잘 보고, 더 잘 듣고, 더 잘 냄새 맡고, 더 잘 맛보고, 더 잘 느끼게 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인해 고멸(苦滅) 즉 행복을 경험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분명히 과학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 식(識)의 몫이고, 식(識)이 그 일을 잘 해내도록 하기 위해 믿음-정진-염(念)-정(定)-혜(慧)의 기능과 함께하는 수행의 영역이 제시되는 것입니다.


  ※ 「Ⅰ. 개요 - 3. 과학-기계의 영역 ↔ 수행-지혜의 영역」 참조.


질문3. 윤회가 우리 삶, 우리 사회에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윤회에 대한 분명한 앎은 죽음 이후를 대비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살아서도 행복하다가 죽어서는 더 좋은 삶을 이어지게 하는 방법을 배워서 그런 삶을 실천하게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세 가지 공덕행(功德行)을 그 방법으로 알려주는데, 오계(五戒)와 보시(布施)와 수행(修行)입니다. 윤회하는 줄 바르고 분명히 아는 사람은 당연히 세 가지 공덕행(功德行)을 중심으로 살게 됩니다. 혹 수행에 접근키 어려운 사람이라 해도 오계(五戒)를 지키고 보시(布施)하는 삶을 통해 살아서도 행복하고 죽어서는 욕계(慾界)의 하늘에 태어나게 됩니다. 


삶의 제어는 네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지는데, ①자책에 의한 제어, ②남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에 의한 제어, ③형벌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 ④악처(惡處)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입니다.


①자책에 의한 제어와 ②남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에 의한 제어는 내적인 것입니다. 내적으로 마음을 잘 단속해서 업(業)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③형벌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는 사회적인 것입니다. 징벌이 두려워 법(法)을 지키기 위해 업(業)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④악처(惡處)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는 죽은 뒤에 지옥-축생-아귀의 삼악처(三惡處)에 태어날 것이 두려워 업(業)을 제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악업(十惡業)의 삶을 최소화하고 십선업(十善業)의 삶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때, ①자책에 의한 제어와 ②남의 비난에 대한 두려움에 의한 제어는 고급스런 방법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업(業)의 제어를 위해 일반적으로 제시되는 방법은 ③형벌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와 ④악처(惡處)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입니다. 그런데 ④악처(惡處)의 두려움에 의한 제어는 윤회를 전제로 설해진 방법입니다. 윤회가 부정될 때는 그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업(業)의 제어를 위한 두 가지 동력 중 한 가지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들키지 않을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거리끼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만큼 사회는 불안하고 혼란스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는 우리 삶, 우리 사회에서 악업(惡業)을 최소화하고 선업(善業)을 극대화하는 동기를 부여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삶이 향상할 것이고, 사회적으로는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건설될 것입니다.


 ※ 「Ⅴ. 윤회의 선언 - [4]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의 극복」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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