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中道)[majjhimā paṭipadā]인 팔정도(八正道)】
- 길[magga]과 실천[paṭipadā]의 차이 -
<전법륜경>에의하면 중도(中道)는 majjhimā paṭipadā이고 팔정도는 ariyo aṭṭhaṅgiko magga입니다. 중도(中道)의 도(道)는 paṭipadā이고, 팔정도(八正道)의 도(道)는 magga인 것입니다.
이때, magga는 길[도(道)]이고, paṭipadā는 실천(實踐)입니다. 길[magga]과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으로의 실천[paṭipadā]입니다. 그리고 중도(中道)[majjhimā paṭipadā]는 가운데 길이라기보다는 ‘중심(中心) 되는 길, 바로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것의 의미입니다.
팔정도(八正道)라는 바른 깨달음-열반으로 직접 이끄는 길과 바로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직접 걸어가는 것으로의 실천입니다.
한역(漢譯)의 과정에서 paṭipadā는 다른 경전들에서는 magga와 구분하여 번역되었는데 유독 majjhimā paṭipadā에서는 중도(中道)라고 번역함으로써 magga와의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전혀 다른 두 단어를 같은 단어로 번역한 탓에 불교 안에서 수행이 수행법과 수행의 실천이라는 양면의 필요성을 부각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부처님은 소유의 삶과 고행의 어느 쪽으로도 접근하지 않고 바른 깨달음-열반으로 인도하는 바로 그 길을 한 걸음 한 걸음 직접 걸어감으로써 바른 깨달음-열반에 도착하였는데, 그 길이 바로 팔정도입니다.
길과 실천은 다릅니다. 그러나 달라서는 안됩니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이 있어도 직접 그 길을 걷지 않으면 부산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길과 실천은 분명히 다른 것으로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길을 걸어도 그 길이 부산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면 그는 부산에 도착하지 못합니다. 부산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부산으로 가는 바로 그 길을 걸어야지 다른 곳으로 가는 길을 걸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길과 실천이 달라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열반으로 가는 다르지 않은 바로 그 길을 직접 걸어가는, 길과 구분되는 실천이 majjhimā paṭipadā[중도(中道)] 즉 「열반으로 가는 실천」인 것입니다.
그러면 길을 걷기 이전의 이 편 즉 중생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불만족의 삶입니다. 중(中)인 십이연기(十二緣起)적으로 고(苦)를 만드는 삶입니다. 갈애가 원인이고, 갈애를 전후한 괴로움의 발생과정[십이연기(十二緣起)]에 의해 고(苦)가 생겨나는 불만족의 삶입니다. 반면에 길을 걸어 도착한 저 편 즉 열반은 불만족의 완전한 소멸 즉 고멸(苦滅)입니다. 갈애의 소멸이고, 갈애를 전후한 괴로움의 발생과정이 끊어져서 더 이상 불만족이 생겨나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의 실현을 위해 갈애를 소멸하고 괴로움의 발생과정을 끊어내는 방법이 팔정도(八正道)[magga]이고, 바로 그 길을 직접 걸어감으로써 열반을 실현하는 실천이 중도(中道)[majjhimā paṭipadā]입니다.
<전법륜경>은 이어서 사성제(四聖諦)를 설하는데, 고(苦)-고집(苦集)-고멸(苦滅)-고멸도(苦滅道)입니다. 여기서 고집(苦集)은 고(苦)의 일어남인데 갈애 또는 십이연기이고, 고멸도는 중도(中道)[majjhimā paṭipadā] 즉 ‘팔정도(八正道)[magga] 바로 그 길을 직접 걸어감으로써 열반을 실현하는 실천’입니다.
• 중(中)인 십이연기(十二緣起)로 만드는 고(苦)를 중도(中道)인 팔정도(八正道)로 해소하여 고멸(苦滅)을 실현함
⇒ 중(中) = 고집(苦集), 중도 = 고멸도(苦滅道) ⇒ 사성제(四聖諦)
※ 고멸도(苦滅道)[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가 팔정도가 아니라 팔정도를 직접 걸어감으로써 열반을 실현하는 실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