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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takka[갈애의 형성과정]과 ponobbhavika[다시 존재로 이끎]】

0 552 2018.02.24 13:44

【takka[갈애의 형성과정]과 ponobbhavika[다시 존재로 이끎]】


「gambhīro duddaso duranubodho santo paṇīto atakkāvacaro nipuṇo paṇḍitavedanīyo[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힘들고, 평화롭고, 숭고하며, takka의 영역을 넘어섰고, 미묘하여, 현자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을 설하는 경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문은 ‘takka의 영역을 넘어섰다’는 한 가지 외에는 모두 거기에 대한 수식입니다. 그래서 이 구문의 중심 의미는 atakka[takka를 넘어섬]입니다. ⇒ 용례 참조.


이 구문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지칭하는 표현인데, 대표적인 용례는 이렇습니다.


‘adhigato kho myāyaṃ dhammo gambhīro duddaso duranubodho santo paṇīto atakkāvacaro nipuṇo paṇḍitavedanīyo. ālayarāmā kho panāyaṃ pajā ālayaratā ālayasammuditā. ālayarāmāya kho pana pajāya ālayaratāya ālayasammuditāya duddasaṃ idaṃ ṭhānaṃ yadidaṃ idappaccayatāpaṭiccasamuppādo. idampi kho ṭhānaṃ duddasaṃ yadidaṃ sabbasaṅkhārasamatho sabbūpadhipaṭinissaggo taṇhākkhayo virāgo nirodho nibbānaṃ. ahañceva kho pana dhammaṃ deseyyaṃ, pare ca me na ājāneyyuṃ; so mamassa kilamatho, sā mamassa vihesā’ti. 


‘내가 성취한 이 법은 심오하고 보기 어렵고 깨닫기 힘들고 평화롭고 숭고하며 takka의 영역을 넘어섰고 미묘하여 현자들만이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착의 경향을 즐기고 집착의 경향을 좋아하고 집착의 경향을 기뻐한다. 집착의 경향을 즐기고 집착의 경향을 좋아하고 집착의 경향을 기뻐하는 사람들은 이런 토대 즉 이것의 조건성인 연기(緣起)를 보기 어렵다. 또한 이러한 토대 즉 모든 형성작용의 그침-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의 놓아버림-갈애의 부숨-이탐(離貪)-소멸(消滅)-열반(涅槃)을 보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이 법을 설한다 해도 저들이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나만 피로하고 나만 불편해질 것이다.’라고.


; mahāpadānasuttaṃ(DN14)[대전기경], pāsarāsisuttaṃ (MN 26)[성구경], bodhirājakumārasuttaṃ (MN 85)[왕자 보디의 경], brahmāyācanasuttaṃ (SN 6.1)[범천의 권청 경]


이 경들에 의하면, 부처님의 깨달음을 대표하는 개념은 atakka[takka를 넘어섬]이고, 중생을 대표하는 개념은 ālaya[집착의 경향]입니다. 그런데 takka는 무엇입니까?


takka의 의미를 정의하는 가르침은 경전에서 찾아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그 의미를 유추해야 하는데, vitakka와의 조어(造語)적 연결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vitakka는 심(心) 또는 애(愛)의 활동인 행위의 출발자리를 지칭하는 용어입니다[삶의 메커니즘 참조]. 이때, 심(心) 또는 애(愛)는 식(識)이 몸집을 부풀린 상태입니다. 첫 번째 인식작용을 통해 생긴 식(識)이 수(受)를 대상으로 두 번째 인식작용을 주관해 수(受)의 앎[탐(貪)]을 만들어 1단계로 몸집을 부풀리면 심(心)이 되고, 다시 nandi[즐김]을 만들어 2단계로 몸집을 부풀리면 애(愛)가 됩니다. 그런데 첫 번째 인식과정에서 식(識)이 생길 때의 대상은 외입처(外入處)입니다. 반면에 1~2단계의 부풀림의 과정에서는 수(受)가 대상입니다. 그래서 업(業)의 원인인 심(心) 또는 애(愛)가 행위 즉 업(業)을 짓기 위해서는 원래의 대상인 외입처로 되돌려져야 합니다. 이렇게 외입처로 되돌아감으로써 행위를 출발시키는 것이 vitakka입니다. 그리고 vitakka는 nandi에 의해 경영됩니다. 즉 애(愛)의 형성과정이 vitakka에 실려와 행위의 질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vitakka는 vi-takka입니다. takka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takka라는 어떤 영역을 벗어나 외입처를 대상으로 행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vitakka는 수(受)를 대상으로 하는 영역을 마감하고 외입처에게로 대상을 되돌림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 의미가 조어(造語) 상으로는 takka를 떠남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takka는 수(受)를 대상으로 하는 영역입니다. 외입처를 대상으로 생긴 식(識)을 수(受)를 대상으로 하는 영역에서 두 번 몸집을 부풀려 애(愛)를 만드는 영역입니다. 즉 애(愛)의 형성과정입니다.


그러면 atakka는 무엇입니까? a-takka의 조성을 가지는 단어인데, ‘a’는 부정접두사입니다. 이때, ‘a’가 가지는 부정의 의미는 animitta[무상(無相)]의 경우와 같은 용례입니다. 무상삼매(無相三昧)로 쓰이는 이 단어는 단순히 상(相)이 없다거나 아니라는 의미가 아니라 탐진치(貪嗔癡)에 의해 만들어지는 nimitta[상(相)]의 상태를 넘어섰다는 의미입니다. 즉 탐진치(貪嗔癡)의 영향에서 벗어난 무탐(無貪)-무진(無嗔)-무치(無癡)의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atakka의 경우도 이와 같아서 takka라는 애(愛)의 형성과정을 넘어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takka 즉 애(愛)의 형성과정은 중생이라는 조건[ālaya]에 의해 번뇌의 영향 하에 진행되는 부풀림의 과정입니다. 번뇌의 영향으로 무명(無明)이 생겨나고 그 위에서 애(愛)의 형성과정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atakka는 번뇌의 영향에서 벗어난 과정입니다. 번뇌의 영향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1단계의 부풀림을 통해 청정하고 빛나는 심(心)을 형성하지만 2단계의 부풀림은 차단되어 애(愛)를 형성하지 않게 된 상태입니다.


한편, 멸(滅)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소멸(消滅)입니다. 부서져 없어진다는 의미보다는, 「번뇌의 부숨[누진(漏盡)]을 통해 무명(無明)이 버려지고 명(明)이 일어남」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takka는 번뇌의 영향 때문에 무명(無明)이 일어나고 그 연장선상에서 애(愛)가 형성되는 과정입니다[중생의 삶]. 반면에 atakka는 번뇌의 부숨을 통해 무명(無明)이 버려지고 명(明)이 일어남으로써 그 연장선상에서 청정하고 빛나는 심(心)은 생기되 애(愛)는 형성되지 않는 멸(滅)의 과정입니다[해탈된 삶].


• “pabhassaram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upakkiliṭṭhan”ti. (A1:5:9), 


; 비구들이여, 이 심(心)은 빛난다. 그 심(心)은 객으로 온 오염원들에 의해 오염되었다.


• “pabhassaramidaṃ, bhikkhave, cittaṃ. tañca kho āgantukehi upakkilesehi vippamuttan”ti. (A1:5:10)


; 비구들이여, 이 심(心)은 빛난다. 그 심(心)은 객으로 온 오염원들로부터 벗어났다.


한편, 중생을 대표하는 개념인 ālaya[집착의 경향]도 이해해야 합니다. 같은 구문에서는 ālaya를 넘어선 상태를 ‘모든 형성작용의 그침-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의 놓아버림-갈애의 부숨-이탐(離貪)-소멸(消滅)-열반(涅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ālaya의 영역은 ‘형성작용-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갈애-탐(貪)’으로 이해할 수 있고, 소멸(消滅)을 통해 이 영역에서 벗어난 열반을 실현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해는 ālaya의 영역을 ‘소멸되지 않아서 열반을 실현하지 못한 중생의 영역’이라고 다시 설명해 줍니다. 즉 번뇌를 부수지 못해 무명(無明)이 버려지지 않고 명(明)이 일어나지 않은 중생의 삶인 것입니다.


ponobbhavika란 용어가 있습니다. ponobhavika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다시 존재로 이끎’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존재[유(有)]는 욕유(慾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의 중생입니다. 그래서 다시 존재로 이끈다는 것은 해탈하여 열반을 실현하지 못하고 중생의 삶을 되풀이 하게 하는 것 즉 윤회(輪廻)를 지속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 「[번뇌의 정의] ponobbhavika 또는 ponobhavika의 용례」 참조.


• saṃkilesikā ponob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오염원이고 다시 존재로 이끌고 두렵고 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 taṇhā ponobbhavikā nandīrāgasahagatā tatratatrābhinandinī, seyyathidaṃ —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다시 존재로 이끌고, nandī와 rāga가 함께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자인 갈애 즉 욕애(慾愛)-유애(有愛)-무유애(無有愛)」


그런데 다시 존재로 이끄는 것은 불선법(不善法)입니다. 구체적으로는 ①번뇌[루(漏)], ②네 가지 속박[소유의 속박-존재의 속박-견해의 속박-무명의 속박, ③악업(惡業), ④갈애[애(愛)]가 제시되는데, 번뇌를 근원으로 하는 삶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다시 존재로 이끄는 것들은 번뇌를 근원으로 하여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불선법(不善法)들입니다. 


이제 윤회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알려집니다. 다시 존재로 이끌어 윤회를 지속하게 하는 것들의 근원이 되는 번뇌를 부수는 것입니다. 누진(漏盡)[āsavakkhaya]이라는 용어인데, 누진명(漏盡明) 또는 누진통(漏盡通)으로 나타나고, 누진지(漏盡知)로도 쓰입니다. 대표적으로는 혜해탈자(慧解脫者)라고 불리는 누진아라한(漏盡阿羅漢)입니다.


누진명(漏盡明)은 삼명(三明)의 완성으로 숙주명(宿住明)-천안명(天眼明)-누진명(漏盡明)이고, 누진통(漏盡通)은 육신통(六神通)의 완성으로 신족통(神足通)-천이통(天耳通)-타심통(他心通)-숙명통(宿命通)-천안통(天眼通)-누진통(漏盡通)입니다. 반면에 누진아라한(漏盡阿羅漢)은 다른 과정 없이 한 가지 길로만 매진하여 번뇌를 부순 아라한입니다.


이렇게 누진(漏盡) 즉 번뇌를 부수는 것이 해탈(解脫)-열반(涅槃)의 실현이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완성입니다. 그리고 번뇌를 부수는 방법은 사마타-위빳사나입니다. 사념처(四念處)의 토대 위에서 진행되는 수행의 완성입니다.


  ● 불교(佛敎)


「다시 존재(*)로 이끄는 것인 번뇌 때문에 윤회하는 takka의 삶을 사념처(四念處)-사마타-위빳사나의 수행으로 극복하고 번뇌를 부숨[누진(漏盡)]으로써 atakka의 삶을 실현하는 가르침」


(*) 존재[bhava-유(有)]와 관련된 내용들


• 3쪽 – 존재의 삶의 과정

• 22쪽 – 그림 교재[소유의 삶 → 존재의 삶 → 해탈된 삶]

• 27쪽 – 그림 교재[아산(我山)과 무아산(無我山)으로 이해하는 세상]

• 36-ⅲ쪽 - 윤회(輪迴)에 대한 확정적 가르침

• 62쪽 – 존재는 무엇입니까?

• 163쪽 – 그림 교재[누적된 삶과 지금의 삶]

• 185쪽 – 그림 교재[삶의 메커니즘 - ④새로운 존재 ~ ⑤무아(無我) & 윤회(輪迴)]

• 194쪽 – 그림 교재[십이연기(十二緣起)의 단계적 구분]

• 195쪽 – 십이연기(十二緣起)[중(中) → 고(苦)] 약술

          ; 생(生) ← 유(有), 유(有) ← 취(取) ← 애(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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