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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윤회(輪迴)에 대한 확정적 가르침】

0 582 2018.02.24 14:50

윤회(輪迴)에 대한 확정적 가르침

 

● 윤회(輪迴)에 대한 확정적 가르침의 요약 


「육계(六界)[단견(斷見)의 극복] → 중(中)[상견(常見)의 극복] 

                                         → 중도(中道)[윤회에서 벗어남]」


윤회는 삶입니다. 중생인 나의 삶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은 윤회로부터의 벗어남입니다. 윤회하는 중생의 삶[고(苦)]를 청산하고 더 이상 불만족이 없는 해탈된 삶을 실현하는 것[고멸(苦滅)]이 깨달음이라고 부처님은 설명합니다. 우리가 윤회를 알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부처님은 마음[식(識)]이 몸에 종속되지 않은 것이라고 정의합니다. 사람을 구성하는 1차적 요소가 물질[지수화풍(地水火風)과 공(空)]인 몸과 물질 아닌 것인 마음[식(識)]이라는 정의인데, 물질과 대등하게 1차적 요소인 식(識)은 몸이 죽어도 따라 죽지 않기 때문에 윤회한다고 알려줍니다[몸과 마음의 생존기간의 불균형].


    → 육계(六界)의 가르침 → 단견(斷見)[윤회 없음]의 극복


이런 정의 위에서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를 부처님은 깨달음의 눈으로 보아서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데,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중생으로의 불만족한 삶[고(苦)]가 어떻게 생겨나는 지의 조건관계에 대한 통찰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관계가 해소되면 중생의 삶에서 벗어난 해탈된 삶[고멸(苦滅)]이 실현된다는 삶의 현실에 대한 통찰입니다. 이 조건관계는 나 즉 존재[유(有)]의 삶에 대한 명확한 답을 줍니다. 이 몸이 유지 되는 동안에는 변화의 과정을 누적하다가[무아(無我)], 몸이 죽으면 새로운 몸과 함께 다시 태어나 무아(無我)적 삶을 반복합니다[윤회(輪迴)]. 십이연기(十二緣起)는 이렇게 무아(無我)와 윤회(輪迴)를 연결합니다. 경은 이런 삶의 현실에 대한 통찰 즉 「삶의 중심(中心)을 꿰는 가르침」을 중(中)이라고 합니다. 


   → 양 끝에 접근하지 않고 중(中)으로 여래는 법을 설함

   → 상견(常見)[자아(自我)의 윤회]의 극복


참 다행입니다! 깨달은 자인 부처님에 의해 삶은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십이연기(十二緣起)적으로 생겨난 괴로움은 그 조건관계만 해소하면 소멸하는 것입니다. 고멸(苦滅)의 실현이라는 희망의 삶이 부처님에 의해 선언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그 조건관계의 해소 방법도 알려주는데, 팔정도(八正道)입니다. 고(苦)와 고멸(苦滅)의 현실을 꿰는 중(中)에 의해 제시된 고멸(苦滅)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직접 고멸(苦滅)을 실현하기 위한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을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인 중도(中道) → 윤회에서 벗어남


이렇게 부처님은 육계(六界)의 가르침에 의해 단견(斷見)을 극복하고, 중(中)에 의해 상견(常見)을 극복하고, 중도(中道)에 의해 윤회에서 벗어난 해탈(解脫)-열반(涅槃)의 실현을 이끕니다. 이것이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우리 스승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 윤회(輪迴)에 대한 확정적 가르침


1. 사람의 정의 → 단견(斷見)의 극복


육사외도 중 한 사람인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로 사람을 정의하고 부처님은 지수화풍공식(地水火風空識)의 육계(六界)로 사람이 구성된다고 정의합니다.


사람이 물질인 몸으로 구성된다는 주장과 물질인 몸과 물질 아닌 것인 마음[식(識)]이 함께하여 구성된다는 두 가지 주장입니다. 그러면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사람에게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마음 없이 몸만 가지고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요소적인 측면에서 마음은 몸 특히 뇌(腦)의 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2차적 존재라는 견해입니다. 그래서 몸의 작용에 의해 생겨나기 때문에 몸에 종속된 것인 마음이 몸과 함께 한 평생을 살아가다가 몸이 죽으면 토대의 상실로 인해 소멸되고 만다는 주장인데,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이고 유물론(唯物論)입니다. 반면에 부처님은 마음 즉 식(識)이 2차적인 존재가 아니고 몸과 대등한 1차적 존재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몸에 종속되지 않는 그래서 몸과 대등한 마음이 몸과 함께 사람 즉 나를 이루어 살아 가다가 몸이 죽으면 몸 따라 죽지 않고 새로운 몸과 만나 다음 생을 이어 간다는 주장입니다.


그런데 두 가지 주장 중에 누구의 주장이 참이고, 누구의 주장은 거짓일까요?


부처님은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스승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완전한 가르침입니다[‘보면서 보지 못함’ 참조(219쪽)]. 그러나 아지따 께사깜발리는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지 못한 외도(外道)의 스승입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완전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에 의한 완전한 가르침이 말하는 육계(六界)가 사람에 대한 참의 정의입니다. 그리고 완전하지 못한 깨달음에 의한 완전하지 못한 가르침이 말하는 사대(四大)는 사람에 대한 거짓의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불교신자라면 당연히 「사람은 육계(六界)로 구성되었고, 그래서 마음[식(識)]은 몸이 죽어도 따라 죽지 않고 새로운 몸과 함께 다음 생을 이어 살아간다.」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가르침에 의거한 바른 삶의 실천으로 삶을 향상해야 할 것입니다. 


육계(六界)의 가르침은 이렇게 단견(斷見)을 극복합니다.


2. 중(中) → 상견(常見)의 극복 & 윤회(輪迴)에서 벗어남의 가능성 제시


그런데 많은 가르침들은 원래 있는 것으로의 존재[아(我)-attan, atman]를 선언합니다. 그래서 조건의 변화에 관계없이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것인 그가 주인공이 되어 몸 데리고 살다가 죽으면 몸을 바꿔 다음 생을 또다시 살아간다고 말합니다. 윤회(輪迴)하기는 하지만 항상 하는 아(我)가 윤회한다는 것인데, 상견(常見)[상주론(常住論)]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에 의하면 단견(斷見)도 상견(常見)도 삶에 대한 정확한 해석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것으로의 존재[유(有)-bhava]를 말합니다. 삶의 과정에서 변화하며 늘 새롭게 생겨나는 것으로의 ‘나’에 대한 선언입니다. 지금 실존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가 원래 있어서 불변하는 것 즉 아(我)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무아(無我)].


이렇게 정의되는 유(有)를 중심으로 부처님에 의해 제시된 삶의 해석은 십이연기(十二緣起)입니다. 유(有)에게서 괴로움이 발생하는 조건 관계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가르침인데, 그 조건 관계를 해소하면 괴로움은 소멸합니다. 이러한 삶에 대한 정확한 해석 즉 「삶의 중심(中心)을 꿰는 가르침」을 부처님은 중(中)[majjha]이라고 부릅니다.


※ 육계(六界)로 구성되어 윤회하는 사람[유(有)]에게 중생의 삶 즉 고(苦)가 생겨나는 삶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 즉 사성제(四聖諦)의 고집성제(苦集聖諦) [dukkhasamudayaṃ ariyasacca]가 십이연기(十二緣起)인데, 이것이 중생들의 삶의 현실입니다. 또한, 그 조건 관계가 해소되면 해탈된 삶 즉 고멸(苦滅)이 실현된다는 것도 부처님이 확인해 알려주는 삶의 또 다른 현실입니다. 「고집(苦集)과 고집(苦集)의 해소에 의한 고멸(苦滅)」이라는 현실에 대한 이런 해석이야말로 삶의 중심(中心)을 꿰는 것이어서 중(中)[majjha]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십이연기(十二緣起)가 설명하는 삶은 상견(常見)과는 다릅니다. 삶의 주체가 아(我)가 아닌 유(有)이기 때문입니다. 유(有)는 식(識)과 명색(名色)으로 구성됩니다[오취온(五取蘊)].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식(識)과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생겨난 것입니다. 이 두 개의 조건 가운데 매 순간 삶의 과정에서 생겨나고 부풀리고 머물고 쌓이는 과정을 통해 변화하는 식(識)[→무아(無我)]를 중심으로 윤회(輪迴)를 설명하는데,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輪迴)」입니다. 


중(中)은 이렇게 십이연기(十二緣起)를 통해 상견(常見)을 극복합니다.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고멸(苦滅)의 실현 즉 윤회(輪迴)에서 벗어남의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3. 중도(中道) → 윤회에서 벗어남


이렇게 중(中)에 의해 상견(常見)이 극복되고 고멸(苦滅)의 가능성이 제시되면, 그 위에서 실제적인(*) 고멸(苦滅)의 방법이 제시되는데, 팔정도(八正道)[ariyo aṭṭhaṅgiko magga]입니다. 그러나 방법은 실천되어야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팔정도는 실천되어야 하는데, 그 실천을 중도(中道)[majjhimā paṭipadā]라고 합니다.


; 중도(中道) = 팔정도(八正道)]의 실천 → 사성제(四聖諦)의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 ariyasacca]


(*)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이라는 삶에 대한 잘못된 해석 위에서 제시되는 방법으로는 고멸(苦滅)이 실제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실제적으로 고멸(苦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해석[중(中)]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때 그 위에서 제시되는 방법만이 실제적으로 고멸(苦滅)로 이끈다는 의미입니다.


팔정도(八正道)는 이렇게 중(中)의 전제 위에서 제시된 실제적인 고멸(苦滅)의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실천인 중도(中道)는 고멸(苦滅)의 실현 즉 윤회에서의 벗어남으로 이끕니다. 


; 고(苦)와 고멸(苦滅)

    ⇒ 중(中)[고집(苦集) & 고멸(苦滅)의 가능성]과 중도(中道)[고멸도(苦滅道)]


4. atakka와 ponobbhavika


부처님의 깨달음을 대표하는 개념은 atakka[takka를 넘어섬]이고 중생을 대표하는 개념은 ālaya[집착의 경향]입니다. 이때, takka는 갈애의 형성과정인데 다시 존재[유(有)]로 이끄는 중생의 삶의 근거입니다. 


   ⇒ 「삶의 메커니즘-②takka[애(愛)의 형성과정」 참조(175쪽)


중생의 삶 즉 윤회는 존재[유(有)]의 삶입니다. 오취온(五取蘊)이고 유신(有身)[sakkāya]으로 불리는 '나'이고, 이런 존재인 내가 이 몸이 유지되는 동안은 무아(無我)적인 삶을 살다가 이 몸이 무너지면 윤회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때, '다시 존재로 이끎'이란 용어가 있는데 ponobbhavika입니다. 몇 가지 불선법(不善法)이 다시 존재로 이끄는 그것으로 제시되는데, 그 중 근본이 되는 것은 번뇌[루(漏)]입니다. 그래서 번뇌의 영향 아래 있으면[유루(有漏)] 다시 존재로 이끌려 윤회하고[유위(有爲)의 삶], 번뇌를 부수어 그 영향에서 벗어나면[무루(無漏)] 다시 존재로 이끌리지 않아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무위(無爲)의 삶]입니다.


그래서 불교 수행은 번뇌의 부숨으로 완성됩니다. 누진(漏盡)[āsavakkhaya]이라는 용어인데, 누진명(漏盡明), 누진통(漏盡通), 누진지(漏盡知) 등의 형태로써 깨달음의 완성을 설명합니다. 

 

즉 ponobbhavika인 번뇌를 완전히 부수면 다시 존재로 이끌리지 않아서 takka[갈애의 형성-중생의 삶]을 넘어선 atakka[갈애의 소멸-해탈된 삶]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교수행의 근본 의미입니다.

 

윤회[육계-중-중도].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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