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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세미나

[교재] Ⅰ. 개요

0 576 2018.02.24 15:00

 

. 개요

  

 

1. 연기(緣起)적인 윤회(輪迴)

 

2. ()의 윤회

 

3. 과학-기계의 영역 수행-지혜의 영역

 

 1. 연기(緣起)적인 윤회(輪迴)


몸과 마음이 함께하면 ‘나’라고 불립니다. 몸 없이도 마음 없이도 나는 구성되지 않고, 몸만으로도 마음만으로도 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몸과 마음이 서로를 조건으로 함께할 때 비로소 ‘나’는 구성되고, 존재하게 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삶은 몸과 마음 그리고 둘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사문과경(沙門果經)(D2)>은 「그가 이와 같이 심(心)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자기 활동성을 회복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지(知)와 견(見)으로 마음을 향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압니다. ㅡ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사대(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집적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이 식(識)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 있다.’라고.」라고 하여 몸 그리고 몸과는 다른 것인 식(識)의 관계로써 ‘나’를 설명합니다. 이때, 식(識)은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경은 몸이 무엇이지 정의하고, 몸과 마음의 관계를 설명하지만 마음에 대해서는 정의하지 않습니다. 마음은 한 마디 문장으로 정의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의되는 물질로 된 몸과 대응하여 나를 구성하는 어떤 것인 마음의 관계를 통해 삶을 해석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 마음은 몸에 종속된 것이어서 몸이 죽으면 따라서 소멸한다는 것인데, 물질만을 제1차적 존재로 이해하는 유물론(唯物論)적 사고에 바탕한 방법입니다. → 「윤회 없음」


둘째, [상견(常見) 또는 상주론(常住論)] 마음은 본질적-실체적 존재여서 생겨나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므로, 종속됨 없이 몸과 함께 나를 이루어 살다가 몸이 죽으면 새로운 몸과 만나 본질적-실체적 존재 상태를 유지한 채 새로운 몸과 만나 다음 생을 살아간다는 것인데, 창조주 하나님 브라흐마와 그 분신인 아뜨만의 설정[상락아정(常樂我淨)]에 의한 브라만교의 교리가 대표적입니다. → 「윤회의 주체 = 아뜨만[아(我)]」


셋째, [연기(緣起)] 마음도 삶의 과정에서 조건적으로 생겨나고 변화하는 것이지만 몸에 종속되지 않은 것이어서 몸이 죽어도 따라죽지 못하고 새로운 몸을 만나 변화의 가운데에 다음 생을 살아간다는 것인데,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인 사실에 부합한 삶을 제시하는 불교의 교리입니다. → 「윤회의 주체 = 연기(緣起)하는 식(識)」


이때, 마음이 몸이 죽은 뒤에 새로운 몸과 만나 다음 생을 살아가는 것을 윤회(輪迴)라고 합니다. 그래서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은 윤회 없음의 견해이고, 상견(常見) 또는 상주론(常住論)과 연기(緣起)는 윤회 있음의 견해입니다. 부처님은 윤회 있음을 선언합니다. 그래서 윤회 없음을 선언하는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은 외도(外道)의 견해입니다. 또한, 윤회 있음의 선언 가운데에서도 상견(常見) 또는 상주론(常住論)은 브라만교[힌두교] 등 외도(外道)의 견해이고, 연기(緣起)는 부처님이 설명하는 불교(佛敎)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또는 단멸론(斷滅論)과 상주론(常住論)을 모두 극복한 연기(緣起)적인 삶이 부처님에 의해 선언된 불교(佛敎)적 윤회(輪迴)이고, 이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 중(中)으로 설해진 법 - 십이연기(十二緣起)


2. 윤회의 주체 = 연기(緣起)하는 식(識)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 대신 DNA 윤회를 주장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중(中)으로 설하신 십이연기(十二緣起)를 대체하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부모에서 생겨나는 몸은 DNA의 혼합 과정을 통해 자손에게로 연결되어 갑니다. 그래서 DNA 윤회라는 말로 몸에 의한 윤회를 주장하는 것입니다. 물론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에 의해 마음은 윤회하지 않는다는 견해 위에서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몸은 부모에 의한 혼합 과정으로 새끼 치면 내 유전자의 절반만을 담은 채 혼합된 독립된 개체가 되어 떨어져 나갑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자기를 나라고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는 다릅니다. 내입처가 외입처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새끼 쳐진 식(識)은 이어지는 삶의 과정을 거쳐 머물고 다시 나에게 쌓여 나를 변화시킵니다[자기 증식에 의한 변화]. 이런 증식과 변화의 과정이 이 몸으로의 삶 동안 쌓이면서 이 몸과 함께하다가 몸이 죽으면 다음 몸으로의 삶 동안 다음 몸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증식과 변화를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때에도 자기를 나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므로 삶의 연속성을 말하는 윤회(輪迴)는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입니다. 이것을 부정하고 다른 형태의 윤회를 주장하는 것은 말뿐이고, 사실이 아닙니다.


3. 과학-기계의 영역 ↔ 수행-지혜의 영역


부처님은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輪迴)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식(識)은 무엇입니까?


부처님은 사람을 구성하는 제1차적 존재로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식(識)의 육계(六界)를 선언합니다.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 즉 윤회 없음의 바탕이 되는 유물론(唯物論)적 사고에 의하면 식(識)은 제1차적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서 색(色) 즉 몸에 종속된 것이어서 몸의 죽음에 의해 토대를 상실하면 따라서 소멸하고 마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런데 육계(六界)는 물질 즉 몸을 구성하는 요소인 지(地)-수(水)-화(火)-풍(風)-공(空) 외에 또 하나의 요소로 식(識)을 말하는 것인데, 여섯 가지 모두 제1차적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유물론(唯物論)적 사고와 달리 부처님은 식(識) 즉 마음을 몸에 종속되지 않는, 몸과 대등한 제1차적 요소라고 정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 따라 죽지 않고 윤회하는 식(識)이 선언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識)은 보이지 않습니다. 몸에 의해 감각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학 또는 의학에서는 감각작용을 통해 직접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식(識)을 물질에 종속된 것, 특히 뇌의 작용에 의해 생겨나는 제2차적 존재라고 판단하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감각되지 않는 것을 감각하기 위해서는 감각능력의 향상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과학과 불교에는 감각능력의 향상에 대한 접근 방법의 차이가 있습니다. 과학은 물질을 대상으로 하고, 불교는 물질과 물질 아닌 모든 것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단순한 감각능력[감각작용]의 향상은 과학과 기계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물질에서의 고멸(苦滅)로 이끄는 감각능력의 향상과 물질 아닌 것에 대한 포괄적 감각능력의 향상은 수행과 지혜의 영역입니다. 여기서 포괄적 감각능력의 향상이란 감각기능의 향상과 감각된 것들에서 행복을 만드는 삶[고멸(苦滅)]을 함께 이르는 의미입니다.


  ☞ indriyabhāvanāsuttaṃ(M152)[기능수행 경] 참조.


가시광선(可視光線) 밖의 빛은 과학적 접근을 통해 기계를 발명하면 볼 수 있습니다. 감각되는 것입니다. 물질에 속하는 모든 것은 이렇게 과학과 기계의 발전에 의해 감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지 못하던 것을 본다고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많이 보는 것이 많은 괴로움[고(苦)]를 만드는 원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 것에게서 행복을 만드는 삶[고멸(苦滅)]은 수행과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또한, 식(識) 등 물질 아닌 것은 과학과 기계에 의해 감각능력이 향상된다 해도 감각할 수 없습니다. 과학과 기계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물질 아닌 것들에 대한 감각능력의 향상은 수행(修行)과 지혜[혜(慧)]의 영역입니다. 부처님은 수행을 통해 지혜를 완성함으로써 물질 아닌 것들을 감각하고 또한 물질이든 물질 아닌 것이든 조건적인 모든 것들에 의해 생겨나는 고(苦)의 문제를 해결하였는데[고멸(苦滅)], 이것이 감각능력의 향상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윤회(輪迴)하는가?’의 문제 즉 식(識)이 제1차적 존재인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물질 아닌 것의 영역에 속합니다. 수행과 지혜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지 과학과 기계에 의해서 확인되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조건 되는 관계에 의해 뇌 등 물질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표면적 현상을 가지고 식(識)의 본질을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식(識)[심(心)-의(意)-식(識)]은 몸과 함께하지 않는 내면 특히 takka의 영역과 누적된 상태인 존재[유(有)]에 대한 깊고 정확한 이해 위에서야 비로소 정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처님의 수행과 지혜에 의한 확인으로는, 식(識)은 제1차적 존재여서 윤회(輪廻)합니다. 또한, 연기(緣起)하는 것이어서 몸과의 관계에 의한 무아(無我)와 윤회(輪廻)의 연결 관계가 잘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심지어 지금의 과학 수준으로 식(識)을 정의하는 것은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의 해석이라고 해야 합니다. 부처님이 수행과 지혜의 완성을 통해 직접 보아 알려주신 그대로가 식(識)에 대한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삶에 대한 바른 시각인 것입니다.


한편, 부처님의 과학능력은 뛰어납니다. 부처님 가르침 즉 법은 시간을 넘어선 것입니다. 현재의 과학 수준은 빅뱅 등과 관련해 10⁻⁴³초까지를 안다고 하는데 비해 부처님은 아예 그 시간을 넘어서서 동시적인 발생 상황까지를 직접 봅니다. 부처님의 과학능력은 현재의 과학능력보다 그 원리에 있어 뒤지지 않는다고 말해야 합니다.


※ 「세 가지 질문 - 질문2. 과학이 세상을 주도하는 지금, 왜 우리는 윤회를 말해야 하는 걸까요?」 참조


[참조] indriyabhāvanāsuttaṃ(M152)[기능수행 경] 요약


• 아난다여, 어떻게 성자의 율에서 위없는 기능수행이 있는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안(眼)으로 색(色)을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이 일어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일어나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일어난다. 그는 이와 같이 꿰뚫어 안다. ㅡ ‘나에게 마음에 드는 것이 일어났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일어났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일어났다. 이것은 유위(有爲)이고 거칠고 연기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나니 그것은 바로 평정이다.[‘uppannaṃ kho me idaṃ manāpaṃ, uppannaṃ amanāpaṃ, uppannaṃ manāpāmanāpaṃ. tañca kho saṅkhataṃ oḷārikaṃ paṭiccasamuppannaṃ. etaṃ santaṃ etaṃ paṇītaṃ yadidaṃ — upekkhā’ti]’라고. 그에게 일어난 마음에 드는 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은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아난다여, 마치 눈 있는 사람이 눈을 떴다가는 감고 감았다가는 뜨는 것과 같이 그렇게 빠르고 그렇게 신속하고 그렇게 쉽게, 그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건, 그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건, 마음에 들기도 하고 마음에 들지 않기도 한 것이건, 그것은 그에게서 소멸하고 평정이 확립된다. 아난다여, 이것이 성자의 율에서 안(眼)으로 인식되는 색(色)들에 대한 위없는 기능수행이다.

  →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반복.


• 아난다여, 어떻게 유학(有學)은 실천하는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안(眼)으로 색(色)을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이 일어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일어나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일어난다. 그는 그에게 일어난 마음에 드는 것과 마음에 들지 않는 것과 마음에 들기도 하고 들지 않기도 한 것에 대해서 걱정하고 부끄러워하고 피한다. 아난다여, 이렇게 유학(有學)은 실천한다.

  →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반복.


• 아난다여, 어떻게 기능을 닦은 성자인가? 아난다여, 여기 비구가 안(眼)으로 색(色)을 보고 마음에 드는 것이 일어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일어나고, 마음에 들기도 하고 들지 않기도 한 것이 일어난다. 만일 그가 ‘싫은 것에 대해 싫지 않음의 상(想)으로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거기서 싫지 않음의 상(想)으로 머문다. 만일 ‘싫지 않은 것에 대해 싫음의 상(想)으로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거기서 싫음의 상(想)으로 머문다.  만일 ‘싫기도 하고 싫지 않기도 한 것에 대해 싫지 않음의 상(想)으로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거기서 싫지 않음의 상(想)으로 머문다. 만일 ‘싫지 않기도 하고 싫기도 한 것에 대해 싫음의 상(想)으로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거기서 싫음의 상(想)으로 머문다. 만일 ‘싫은 것과 싫지 않은 것 둘 모두를 피하고 념(念)-정지(正知)하면서 평정으로 머물리라.’라고 원하면 거기서 념(念)-정지(正知)하면서 평정으로 머문다. 아난다여, 이렇게 그는 기능을 닦은 성자이다.

  → 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에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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