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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Ⅲ. 윤회와 깨달음

0 729 2018.02.24 15:34

. 윤회와 깨달음

  

 

1. 왓차곳따 삼명(三明) (M71)

2. 윤회의 측면에서 부처님의 한 평생을 서술하는 게송들

 

1) 부처님의 탄생게(誕生偈)

2) 부처님의 출가게송

3) 부처님의 오도송(悟道頌)

4) 부처님의 유훈(遺訓)

 

3. 존재[bhava]라는 용어

4. 깨달음을 선언하는 표현들

 

[참고] 불사(不死)[amata - the deathless state]

 

 

“태어남[생(生)]과 늙음[노(老)]와 죽음[사(死)]의 이러한 세 가지 법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여래-아라한-정등각은 세상에 출현하지 않을 것이고 여래가 설한 법과 율도 세상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세 가지 법 경(A10:76)(19쪽 참조)>”라고 하듯이 깨달음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닫기 이전에는 윤회합니다. 윤회는 깨닫지 못한 삶 즉 중생의 삶의 양태입니다. 반면에 부처님은 윤회를 끝낸 자이고, 아라한에게 윤회는 선언되지 않습니다. 바른 깨달음을 통해 윤회에서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과정은 윤회에서 벗어나는 과정입니다.


1. <왓차곳따 삼명(三明) 경(M71)>에서 부처님은


「“‘tevijjo samaṇo gotamo’ti kho, vaccha, byākaramāno vuttavādī ceva me assa, na ca maṃ abhūtena abbhācikkheyya, dhammassa cānudhammaṃ byākareyya, na ca koci sahadhammiko vādānuvādo gārayhaṃ ṭhānaṃ āgaccheyya. 


왓차여, '사문 고따마는 삼명(三明)을 가진 자이다.'라고 설명하면 내가 말한 대로 말하는 것이고, 거짓으로 나를 헐뜯는 것이 아니고, 법에 따라서 법을 설명한 것이다. 누구든 함께 법을 닦는 동료가 이것을 따라 말하더라도 비난받아야 할 경우를 만나지 않는다.」


라고 하는데, 삼명(三明)은 숙주명(宿住明)-천안명(天眼明)-누진명(漏盡明)입니다. 경은 이어서 


「ahañhi, vaccha, yāvadeva ākaṅkhāmi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āmi, seyyathidaṃ — ekampi jātiṃ dvepi jātiyo . pe . iti sākāraṃ sauddesaṃ anekavihitaṃ pubbenivāsaṃ anussarāmi. ahañhi, vaccha, yāvadeva ākaṅkhāmi dibbena cakkhunā visuddhena atikkantamānusakena satte passāmi cavamāne upapajjamāne hīne paṇīte suvaṇṇe dubbaṇṇe sugate duggate . pe . yathākammūpage satte pajānāmi. ahañhi, vaccha, āsavānaṃ khayā anāsavaṃ cetovimuttiṃ paññāvimuttiṃ diṭṭheva dhamme sayaṃ abhiññā sacchikatvā upasampajja viharāmi. 


"[숙주명(宿住明)] 왓차여, 나는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삶들을 기억할 수 있다. 즉 한 생, 두 생, … 이처럼 한량없는 전생의 갖가지 모습들을 그 특색과 더불어 상세하게 기억해낼 수 있다. 


[천안명(天眼明)] 왓차여, 나는 청정하고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눈으로 중생들이 죽고 태어나고, 천박하고 고상하고, 잘생기고 못생기고, 좋은 곳에 가고 나쁜 곳에 가는 것을 본다. … 나는 중생들이 지은 바 그 업에 따라 가는 것을 분명히 안다. 


[누진명(漏盡明)] 왓차여, 나는 번뇌가 다하여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다운 지혜로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라고 하여 삼명(三明)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번뇌는 


「āsavā saṃkilesikā ponobbhavikā sadarā dukkhavipākā āyatiṃ jātijarāmaraṇiyā; - 마하삿짜까 경(M36), 범천의 초대 경(M49), 날라까빠나 경(M68)


오염원이고 다시 존재로 이끌고 두렵고 괴로운 보(報)를 가져오고 미래의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을 초래하는 번뇌」


라고 정의됩니다. 그렇다면 ‘삼명(三明)을 가진 자’란 말씀은


• 숙주명(宿住明) - 전생의 기억 즉 윤회해온 지난 삶의 존재 확인

• 천안명(天眼明) - 죽고 업에 의한 태어남의 과정을 봄 즉 윤회의 과정 확인

• 누진명(漏盡明) - 번뇌의 부숨에 의한 깨달음의 실현 즉 윤회에서 벗어남


을 의미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깨달음이란 윤회를 직접 확인하고 그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거기에서 벗어나는 과정인 것입니다.


2. 몇 개의 게송은 부처님의 한 평생을 윤회의 측면에서 서술합니다.


1) 부처님의 탄생게(誕生偈)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m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  <아주 놀랍고 경이로움의 경(M123)>


나는 세상에서 선두에 선 자[선구자]이고, 연장자[어른]이고, 으뜸인 자이다. 이것이 마지막 태어남[생(生)]이고, 이제 다시 존재[유(有)]가 되지 않는다.


※ 비교 :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當安之)


2) 부처님의 출가게송


‘otiṇṇomhi jātiyā jarāya maraṇena sokehi paridevehi dukkhehi domanassehi upāyāsehi dukkhotiṇṇo dukkhapareto; appeva nāma im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antakiriyā paññāyethā’ti.      <짜뚜마 경(M67)>


나는 태어남과 늙음과 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에 짓눌렸다. 괴로움에 압도되었다. 이제 참으로 이 전체 괴로움의 무더기의 끝을 꿰뚫어 알아야겠다.


3) 부처님의 오도송(悟道頌)


Anekajātisaṃsāraṃ, sandhāvissaṃ anibbisaṃ;  

Gahakāraṃ gavesanto,  dukkhā jāti punappunaṃ.          (법구경 153) 


Gahakāraka diṭṭhosi,  puna gehaṃ na kāhasi;   

Sabbā te phāsukā bhaggā,  gahakūṭaṃ visaṅkhataṃ;     

Visaṅkhāragataṃ cittaṃ,  taṇhānaṃ khayamajjhagā.         (법구경 154)


수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얻은 것 없이 이리저리 헤매었다.

집을 짓는 자를 찾으면서, 거듭되는 생은 괴로움이었다.

 

집을 짓는 자여! 나는 그대를 보았노라.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리라.

그대의 모든 갈비뼈는 부서졌고, 집의 대들보는 유위(有爲)에서 떠나버렸다.

나의 마음은 행(行)에서 벗어나 버렸고, 갈애의 종말에 이르렀다.    


⇒ 오도송의 의미 - 십이연기(十二緣起)의 발생측면의 관찰을 통해 집 짓는 자를 보고, 소멸측면의 관찰을 통해 다시는 집을 짓지 못하게 하였다.


팔정도(八正道)[사념처(四念處) → 바른 삼매 → 여실지견(如實知見) → 실다운 지혜 → 사마타-위빳사나]를 닦아 번뇌를 부수니, ‘무명(無明)이 버려지고 명(明)이 일어남’으로써 유위(有爲)를 멸(滅)하고 무위(無爲)를 실현하였다. 심행(心行)[상(想)-수(受)]의 멸(滅)로 심(心)이 유위(有爲)적으로 형성되지 않아서 갈애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행위[행(行)(*)]은 더 이상 유위(有爲)적 형성작용을 하지 않게 되었다[해탈된 삶].


(*) 행(行)의 정의 - 삼켜버림 경(S22:79)


“kiñca, bhikkhave, saṅkhāre vadetha? saṅkhatamabhisaṅkharontīti kho, bhikkhave, tasmā ‘saṅkhārā’ti vuccati.


비구들이여, 무엇을 행(行)이라고 부르는가? 비구들이여, 유위(有爲)에서 형성한다고 해서 행(行)이라고 한다. ⇒ 유위(有爲)적 형성작용


  → 윤회하지 않게 됨 = 윤회에서 벗어남의 실현.


     • 집 ⇒ 오취온(五取蘊) ㅡ 고성제(苦聖諦)

     • 집 짓는 자 ⇒ 갈애 ㅡ 집성제(集聖諦)


4) 부처님의 유훈(遺訓)


handa dāni, bhikkhave, āmantayāmi vo, vayadhammā saṅkhārā appamādena sampādethā  <대반열반경(D16)>


비구들이여, 참으로 이제 그대들에게 당부하노니 조건적인 것들[행(行)]은 사라짐의 법이다. 불방일(不放逸)로써 성취하라.


⇒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 것일까?


조건적인 것들[행(行)]의 문제 즉 유위(有爲)에서의 형성작용을 해소할 것을 말하는데, 번뇌를 부숨으로써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일어난 무위(無爲)의 삶을 성취할 것을 당부하신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목적한 바를 성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실 때[탄생게]와 깨달았을 때[오도송] 밝히신 바의 목적[윤회에서의 벗어남 - 존재의 소멸 = 해탈 = 열반의 실현]을 제자들도 불방일(不放逸) 즉 사띠를 확립하여 심(心)을 보호하고 그러한 머묾으로 법을 드러냄을 통해 성취하라는 당부인 것으로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3. 그런데 번뇌의 정의와 부처님의 탄생게에서는 존재[bhava]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ponobbhavikā[다시 존재로 이끎]’과  ‘natthi dāni punabbhavo[이제 다시 존재가 되지 않는다]’입니다. 번뇌 때문에 다시 존재가 되고, 다시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다시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존재는 무엇입니까?


십이연기(十二緣起)는 취(取)를 조건으로 유(有)가, 유(有)를 조건으로 생(生)이 있다고 합니다. 이때의 유(有)가 바로 여기서 말하는 존재[bhava]입니다. 집착된 행위[취(取)]를 조건으로 머문 식(識)이 식온(識蘊)에 더해져 증장하면 명색(名色)의 참여에 의해 서로 조건 되는 식(識)과 명색(名色)으로 구성된 ‘나[오취온(五取蘊)-유신(有身)]’이 생겨나는데 존재[유(有)-bhava]입니다. 존재에서 물질인 몸[색(色)]에 의존하는 명색(名色)의 수명이 다하면 식(識)은 새로운 몸과 만나 새로운 ‘나’의 삶을 이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태어남[생(生)]이라고 합니다. [취(取)→유(有)→생(生)]의 조건 관계입니다.


이렇게 [번뇌→무명→갈애]의 연장선상에 있는 취(取)를 조건으로 생겨나는 유(有)[존재]를 중생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중생은 욕계(慾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의 중생으로 분류됩니다[욕유(慾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 이때, 색(色)과 무색(無色)을 하나로 묶어서 유(有)라고 나타내기도 하는데, 유루(有漏)[존재의 번뇌]-유탐(有貪)[존재의 탐(貪)]-유애(有愛)[존재의 갈애] 등입니다. 이 경우에 욕(慾)은 존재 위에 소유[욕(慾)-kāma]가 덧씌워진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욕유(慾有)-색유(色有)-무색유(無色有)인 중생의 삶은 소유의 삶[욕(慾)]과 존재의 삶[유(有)]로 다시 구분됩니다. 물론 욕(慾)도 유(有)에 포함됩니다. 다만, 유(有)를 표면에서 감싸고 있는 욕(慾)으로 그 존재 상태를 대표하는 것일 뿐입니다. ⇒ 「존재[bhava-유(有)]와 관련된 내용들」 참조(18쪽)


그래서 ‘ponobbhavikā[다시 존재로 이끎]’은 중생의 삶을 반복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윤회(輪迴)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natthi dāni punabbhavo[이제 다시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중생의 삶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윤회의 삶에서 벗어나 해탈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불(佛)-아라한(阿羅漢)]의 실현입니다.


4. 이렇게 윤회는 단지 하나의 교리 용어가 아닙니다. 중생으로 존재하는 우리의 삶의 구체적 설명인 것입니다. 윤회의 과정에 있으면 중생이어서 불만족의 삶을 사는 것이고[고(苦)], 윤회에서 벗어나면 깨달음이어서 만족의 삶을 살다가 죽으면 다시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일체의 불만족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고멸(苦滅)].


그래서 깨달음의 선언도 존재[유(有)] 또는 존재인 현재 상태가 되지 않는다는 말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ti pajānāti.


  ; 태어남은 다했다. 범행은 완성되었다. 해야 할 일을 했다. 다음에는 현재 상태[유(有)]가 되지 않는다.


• akuppā me (ceto)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 dāni punabbhavo


  ; 나의 (마음의) 해탈은 흔들리지 않는다[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 이것이 태어남의 끝이다. 이제 다시 존재가 되지 않는다.


• ariyā vimutti anubuddhā paṭividdhā, ucchinnā bhavataṇhā, khīṇā bhavanetti, natthi dāni punabbhavo


  ; 성스러운 해탈을 깨닫고 관통했다. 유애(有愛)는 끊어졌고, 존재로 이끎은 다했다. 이제 다시 존재가 되지 않는다.


5. 그래서 윤회는 부정되어서는 안되고, 잘못 알려져서도 안됩니다. 윤회를 부정하는 것은 깨달음을 부정하는 것이고[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 윤회를 잘못 아는 것은 깨달음을 잘못 아는 것입니다[상견(常見) 또는 상주론(常住論)]. 


윤회를 인정하고 바르게 알아야 삶의 향상을 거쳐 바르게 깨달음을 실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 가르침은 윤회를 전제로 설해진다고 말할 수 있는데, 윤회하는 삶은 고(苦)이고, 윤회에서 벗어남은 고멸(苦滅)이기 때문입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예나 지금이나 고(苦)와 고멸(苦滅)을 말한다[pubbe cāhaṃ bhikkhave, etarahi ca dukkhañceva paññāpemi, dukkhassa ca nirodhaṃ]<뱀의 비유 경(M22) & 아누라다 경(S22:86 = S44:2)>.」고 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근본 명제는 이렇게 불만족한 중생으로의 삶의 현실인 윤회와 거기에서의 벗어남에 대해서 설해진 것입니다.



[참고] 불사(不死)[amata - the deathless state]


윤회에서 벗어난 깨달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다른 용어로는 불사(不死)[amata]가 있습니다. 죽음이 없는 상태입니다. 


십이연기(十二緣起)적으로 죽음[사(死)-maraṇa]은 태어남[생(生)-jāti]를 조건으로 하기 때문에 죽지 않음은 태어나지 않음을 통해 실현됩니다. 나고 죽음 없음 즉 윤회에서 벗어남입니다.


<불사(不死) 경(A9:54)>와 <불사(不死)를 얻음 경(A9:55)>은 초선(初禪)~상수멸(想受滅)의 구차제정(九次第定)에서의 번뇌의 소멸[상수멸에 들어 머물면서 지혜로써 보아 번뇌를 부숨]을 말하는데, 불사(不死)가 여러 형태로 언급되는 깨달음 즉 윤회에서 벗어남이란 것을 알려줍니다.


특히, <kiṃdadasuttaṃ(SN 1.42)[무엇을 베풂 경]>은 법을 설함[법시(法施)]의 의미를 불사(不死)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이 윤회에서 벗어남 즉 태어나지 않음으로써 죽지 않음을 실현하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kiṃdado balado hoti, kiṃdado hoti vaṇṇado.

kiṃdado sukhado hoti, kiṃdado hoti cakkhudo.

ko ca sabbadado hoti, taṃ me akkhāhi pucchito”ti.


무엇을 베풀면 힘을 주는 것이고, 무엇을 베풀면 아름다음을 주는 것입니까?

무엇을 베풀면 안락함 주고, 무엇을 베풀면 눈을 줍니까?

누가 모든 것을 베푸는 자인지 저의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


“annado balado hoti, vatthado hoti vaṇṇado.

yānado sukhado hoti, dīpado hoti cakkhudo.

“so ca sabbadado hoti, yo dadāti upassayaṃ.

amataṃ dado ca so hoti, yo dhammamanusāsatī”ti. 


음식을 주는 것이 힘을 주는 것이고, 옷을 주는 것이 아름다움 주는 것이다.

탈 것을 주는 것이 안락함 주는 것이고, 등불을 주면 눈을 주는 것이다.

거처를 주는 자 모든 것을 주는 자이고, 법을 가르치면 불사(不死)를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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