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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5) 식(識) - 조건에 의해 생겨남 →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輪廻)

0 643 2018.02.24 15:45

(5) 식(識) - 조건에 의해 생겨남 → 연기(緣起)하는 식(識)의 윤회(輪廻)


내입처(內入處)와 외입처(外入處)를 조건으로 생겨나고 루(漏)-무명(無明)-애(愛)의 연장선상에 있는 집착[취(取)]에 의해 머물고 쌓여서 변화함[자기 증식에 의한 변화].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ṇhāpaccayā upādānaṃ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samudayo hoti.


안(眼)과 색(色)을 조건으로 안식(眼識)이 생긴다. 세 개 한 조의 만남이 촉(觸)이다. 촉(觸)을 조건으로 수(受)가 있고 수(受)를 조건으로 애(愛)가 있다. 애(愛)를 조건으로 취(取)가 … 이렇게 모든 괴로움 덩어리[고온(苦蘊)]의 일어남이 있다.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cakkhuviññāṇaṃ. tiṇṇaṃ saṅgati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anāpaccayā taṇhā. tassāyeva taṇhāya asesavirāganirodhā upādānanirodho; upādānanirodhā bhavanirodho ... pe ... evametassa kevalassa dukkhakkhandhassa nirodho hoti.


안(眼)과 색(色)을 조건으로 안식(眼識)이 생긴다. 세 개 한 조의 만남이 촉(觸)이다. 촉(觸)을 조건으로 수(受)가 있고 수(受)를 조건으로 애(愛)가 있다. 이런 애(愛)의 완전히 빛바랜 소멸로부터 취(取)의 소멸이 있고, 취(取)의 소멸로부터 유(有)의 소멸이 … 이렇게 모든 괴로움 덩어리[고온(苦蘊)]의 소멸이 있다. 

                                     <냐띠까 경(S12:45)>


이렇게 식(識)은 내입처(內入處)와 외입처(外入處)를 조건으로 생겨나 지금여기를 살고 누적된 마음에 더해져 마음의 누적상태를 바꿉니다.


한편, 윤회의 주제에서는 한 가지 오해를 지적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연기(緣起)하는 식(識)이 윤회한다고 가르쳐줍니다. 십이연기(十二緣起)에 관련된 모든 경전들이 이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삶의 메커니즘]. 그런데 여기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윤회하기는 하지만 식(識)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해석입니다. 식(識)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다보니 윤회하는 당사자를 찾아서 다양한 주장을 또한 하게 됩니다.


<갈애 멸진의 큰 경(M38)>입니다. 사람들은 이 경에서 부처님이 사띠라는 이름의 비구가 식(識)이 윤회한다고 말할 때 그렇지 않다고 꾸짖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식(識)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말씀이 맞다면, 당연히 식(識)이 윤회의 당사자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경전의 해당 부분은 이렇습니다.


ekamantaṃ nisinnaṃ kho sātiṃ bhikkhuṃ kevaṭṭaputtaṃ bhagavā etadavoca —


한 곁에 앉은 어부의 아들 사띠 비구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ㅡ


“saccaṃ kira, te, sāti, evarūpaṃ pāpakaṃ diṭṭhigataṃ uppannaṃ — ‘tathāhaṃ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tadevidaṃ viññāṇaṃ sandhāvati saṃsarati, anaññan’”ti?


“사띠여, 그대에게 이와 같이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알고 있기로는 ’바로 이 식(識)‘이 치달리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악한 견해가 생겨난 것이 사실인가?”

 

※ sandhāvati: runs through; transmigrates. (saṃ + dhāv + a) → 식(識)을 상(常)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표현.

 

“evaṃ byā kho ahaṃ, bhante, bhagavatā dhammaṃ desitaṃ ājānāmi yathā tadevidaṃ viññāṇaṃ sandhāvati saṃsarati, anaññan”ti.


“대덕이시여, 제게 이와 같이 ‘내가 세존께서 설하신 가르침을 알고 있기로는 ’바로 이 식(識)‘이 치달리고 윤회하는 것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라는 견해가 생겨났습니다.”


“katamaṃ taṃ, sāti, viññāṇan”ti?


“사띠여, 어떠한 것이 그 식인가?”


“yvāyaṃ, bhante, vado vedeyyo tatra tatra kalyāṇapāpakānaṃ kammānaṃ vipākaṃ paṭisaṃvedetī”ti.


“대덕이시여, 그것은 말하고 경험하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보(報)를 체험하는 것입니다.”


“kassa nu kho nāma tvaṃ, moghapurisa, mayā evaṃ dhammaṃ desitaṃ ājānāsi? nanu mayā, moghapurisa, anekapariyāyena paṭiccasamuppannaṃ viññāṇaṃ vuttaṃ, aññatra paccayā natthi viññāṇassa sambhavoti? atha ca pana tvaṃ, moghapurisa, attanā duggahitena amhe ceva abbhācikkhasi, attānañca khaṇasi, bahuñca apuññaṃ pasavasi. tañhi te, moghapurisa, bhavissati dīgharattaṃ ahitāya dukkhāyā”ti.


“이 어리석은 자여, 누구에게 내가 그런 가르침을 설했다는 것인가? 어리석은 자여,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식(識), 다른 방법으로의 식(識)의 생김은 없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어리석은 자여, 그대는 스스로 잘못 이해하여 오히려 우리를 왜곡하고 자신을 파괴하고 많은 해악을 낳는다. 그것은 실로 그대를 오랜 세월 불익과 고통으로 이끌 것이다.”


이 경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식(識)[tadevidaṃ viññāṇaṃ]’에 대한 서술입니다. ‘말하고 경험하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보(報)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서술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번뇌의 경(M2)>에서 이 견해는 배우지 못한 범부가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할 때 생겨나는 여섯 가지 견해 중의 하나로 나타나는데, 상견(常見)임을 알 수 있습니다. ㅡ 「‘이러한 나의 자아는 말하고 경험하고 여기저기서 선행과 악행의 보(報)를 체험한다. 그런 나의 자아는 상(常)하고 견고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법이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yo me ayaṃ attā vado vedeyyo tatra tatra kalyāṇapāpakānaṃ kammānaṃ vipākaṃ paṭisaṃvedeti so kho pana me ayaṃ attā nicco dhuvo sassato avipariṇāmadhammo sassatisamaṃ tatheva ṭhassatī’ti]」


그렇다면 부처님은 식(識)이 윤회한다는 답변 때문에 사띠 비구를 꾸짖은 게 아닙니다. 오히려 추가적 확인을 거쳐 식(識)을 ‘바로 이 식(識)’이라는 아(我)[atman]으로 답했을 때 비로소 식(識)도 조건적으로 생겨난다는 가르침을 들어 꾸짖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띠 비구는 식(識)이 윤회한다는 견해 때문에 꾸짖음을 들은 것이 아니라 식(識)을 아뜨만으로 생각하는 견해 즉 상견(常見)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부처님으로부터 꾸짖음을 들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꾸짖음 또한 ‘내가 언제 식(識)이 윤회한다고 했느냐?’가 아니라 ‘조건에 의해 생겨나는 식(識), 다른 방법으로의 식(識)의 생김은 없다는 것을 여러 차례 법문으로 설하지 않았던가?’라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부처님은 식(識)이 윤회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또한, 부처님은 비구들에 대한 이어지는 법문에서


“seyyathāpi, bhikkhave, yaṃ yadeva paccayaṃ paṭicca aggi jalati tena teneva saṅkhyaṃ gacchati. kaṭṭhañca paṭicca aggi jalati, kaṭṭhaggitveva saṅkhyaṃ gacchati; sakalikañca paṭicca aggi jalati, sakalikaggitveva saṅkhyaṃ gacchati; tiṇañca paṭicca aggi jalati, tiṇaggitveva saṅkhyaṃ gacchati; gomayañca paṭicca aggi jalati, gomayaggitveva saṅkhyaṃ gacchati; thusañca paṭicca aggi jalati, thusaggitveva saṅkhyaṃ gacchati; saṅkārañca paṭicca aggi jalati, saṅkāraggitveva saṅkhyaṃ gacchati. evameva kho, bhikkhave, yaṃ yadeva paccayaṃ paṭicca uppajjati viññāṇaṃ, tena teneva saṅkhyaṃ gacchati. cakkhuñca paṭicca rūpe ca uppajjati viññāṇaṃ, cakkhuviññāṇaṃtveva saṅkhyaṃ gacchati; sotañca paṭicca sadde ca uppajjati viññāṇaṃ, sotaviññāṇaṃtveva saṅkhyaṃ gacchati, ghānañca paṭicca gandhe ca uppajjati viññāṇaṃ, ghāṇaviññāṇaṃtveva saṅkhyaṃ gacchati, jivhañca paṭicca rase ca uppajjati viññāṇaṃ, jivhāviññāṇaṃtveva saṅkhyaṃ gacchati. kāyañca paṭicca phoṭṭhabbe ca uppajjati viññāṇaṃ, kāyaviññāṇaṃtveva saṅkhyaṃ gacchati. manañca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viññāṇaṃ, manoviññāṇaṃtveva saṅkhyaṃ gacchati.


비구들이여, 마치 어떤 조건을 조건으로 불이 타면 그 불은 그 조건에 따라 이름을 얻나니, 장작으로 인해 불이 타면 장작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지저깨비로 인해 불이 타면 모닥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짚으로 인해 불이 타면 짚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소똥으로 불이 타면 소똥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왕겨로 불이 타면 왕겨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쓰레기로 불이 타면 쓰레기불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식(識)은 어떤 조건을 조건하여 생기는데, 그 각각의 조건에 따라 식(識)은 이름을 얻는다. 안(眼)과 색(色)을 조건으로 식(識)이 생기면 안식(眼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이(耳)와 성(聲)을 조건으로 식(識)이 생기면 이식(耳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비(鼻)와 향(香)을 조건으로 식(識)이 생기면 비식(鼻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설(舌)과 미(味)를 조건으로 식(識)이 생기면 설식(舌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신(身)과 촉(觸)을 조건으로 식(識)이 생기면 신식(身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의(意)와 법(法)을 조건으로 식(識)이 생기면 의식(意識)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라고 하여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을 설명합니다. 이렇게 식(識)은 조건에 의해 생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기(緣起)하는 식(識)이 윤회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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