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사회참여/외부특강 > 공개-외부 강의

공개-외부 강의

범어사 포교사단 일요 법회(241013) - 가르침의 토대와 원초적 바른 견해

범어사(梵魚寺) 일요 법회

24년 10월 13일 해피 스님(nikaya.kr & sutta.kr)


● 주제Ⅰ. 가르침의 토대 ‒ ①업(業)-②결실-③노력


1. 부처님을 대표하는 두 가지 개념 → 업을 잇는 자


부처님은 「업(業)을 말하는 자(kammavādī)이고, 결실을 말하는 자(kiriyavādī)」입니다. 


「사문 고따마는 업(業-kamma-깜마)을 말하고, 결실(kiriya-끼리야)을 말합니다. (DN 4-소나단다 경)/(DN 5-꾸따단따 경)/(MN 95-짱끼 경)」 


부처님은 태생에 의해 결정된 수동적 삶을 말하는 스승이 아니라 행위 즉 업(業)으로써 만들어 가는 능동적 삶을 말하는 스승입니다. 또한, 농사를 지으면 풍작이든 흉작이든 결실이 있는 것처럼, 업(業)에는 결실(kiriya-끼리야)이 따른다고 가르치는 스승입니다. 그래서 삶의 중심을 창조주 하나님 등 어떤 신(神)적 존재에 두지 않고 자신의 행위 즉 업(業)에 두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때, 결실(kiriya-끼리야)은 과(果-phala-팔라)와 보(報-vipāka-위빠-까)의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과(果)는 업(業)에 의해 생겨나는 직접적인 결과치이고, 보(報)는 과가 어느 시점에 다른 조건들과 함께 엮여서 익은 뒤에 직접 경험되는 변화된 값입니다. 그리고 보(報)가 경험되는 시점은 ①살아서거나, ②죽은 뒤 바로 다음 생에서이거나, ③그 이후 어느 미래의 삶에서입니다. (AN 6.63-꿰뚫음 경)


특히, 과(果)와 보(報)에 대한 이런 이해는 불교적인 업장소멸(業障消滅)의 근거가 됩니다. (AN 3.101-소금 종지 경) 참조


그리고 이런 업(業-kamma)과 결실(kiriya)의 관점에서 중생은 ‘업을 잇는 자’라고 불리는데, 내가 업의 결과를 누적해가면서 변화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kammassakā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ṭisaraṇā 중생들은 자신의 업(業)이고, 업을 잇고, 업이 근원이고, 업을 다루고, 업의 도움을 받는다. (MN 135-업 분석의 짧은 경)/(AN 5.57-반복 숙고해야 하는 경우 경)/(AN 10.216-기어감의 경)


2) 가르침의 토대 ‒ ①업(業)-②결실-③노력 ― (AN 3.138-머리카락으로 만든 담요 경)

 

(AN 3.138-머리카락으로 만든 담요 경)에 의하면,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은 공통되게 ①업을 말하고, ②결실을 말하고, ③노력을 말합니다. 업에는 결실이 있으니 좋은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농사를 짓는 행위에는 풍작이든 흉작이든 결실이 있고, 풍작을 거두기 위해서는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부처님을 대표하는 두 가지 개념 위에서 노력을 통해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교(佛敎)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업과 결실과 노력의 세 가지는 가르침의 토대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런데 육사외도(六師外道)의 한 사람인 막칼리라는 이 세 가지를 부정하는 교설을 세워서 많은 사람을 괴로움으로 이끕니다. 이런 교설을 결실 없음(akiriya)이라고 하는데, ①전생의 행위가 원인, ②신(神)의 창조가 원인, ③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음[무인무연(無因無緣)]이라는 삶에 대한 잘못된 해석 세 가지 즉 삼종외도(三種外道)는 막칼리의 결실 없음(akiriya)의 아류입니다. (AN 3.62-근본 교리 등 경) 참조


● 주제Ⅱ. 원초적인 바른 견해 ― 스승의 영역에 속하는 것 ― (DN 23-빠야시 경)


불교 신자에게는 이런 토대 위에서의 삶이 바른 신행(信行)입니다. 토대를 벗어나 잘못 설해진 법 위에서 살아가면 그것은 바르지 못한 신행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괴로울 것인지 행복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근본 사유가 됩니다[고(苦)와 고멸(苦滅)].


※ 불교의 최상위 개념 = 「괴로울 것인가, 행복할 것인가?」


; 고(苦)와 락(樂)의 당사자인 ‘나는 누구인가?’의 답은 부처님에게서 배워 알고, 나는 괴로움의 소멸 즉 행복의 실현을 위한 실천에 나서는 것이 불교 신자의 바른 신행(信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승 잘 둔 제자의 특권입니다.



불교의 최상위 개념 = 괴로울 것인가, 행복할 것인가?

 

; ()와 락()의 당사자인 나는 누구인가?’의 답은 부처님에게서 배워 알고, 나는 괴로움의 소멸 즉 행복의 실현을 위한 실천에 나서는 것이 불교 신자의 바른 신행(信行)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스승 잘 둔 제자의 특권입니다.



그러면 이런 토대 위에서의 삶 즉 바른 신행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나와 세상을 보는 시각 즉 견해의 구축입니다. 나라는 존재 그리고 내 삶의 터전인 세상에 대한 바른 앎을 정견(正見-바른 견해)이라고 하는데, 삶을 향상으로 이끌기 위한 첫 번째 조건입니다.


경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바른 견해를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중 원초적 형태의 바른 견해를 설명하는 경으로는 (DN 23-빠야시 경)을 말할 수 있는데, 「①저세상은 있다, ②화생(化生) 하는 중생은 있다, ③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라는 세 가지로 구성된 바른 견해입니다. 


― 「itipi atthi paro loko, atthi sattā opapātikā, atthi sukat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 이렇게도 저세상은 있다. 화생(化生) 하는 중생은 있다. 선악(善惡)으로 지어진 업(業)들의 과(果)와 보(報)는 있다.」


1. 저세상은 있다(atthi paro loko) → 윤회(輪廻)


나는 몸과 마음이 함께하여 구성됩니다. 그런데 몸은 100년 안팎을 삽니다. 그러면 몸의 무너짐 즉 죽으면 마음은 어떻게 됩니까?(*) 몸과 함께 버려지고 마는 것입니까, 아니면 새로운 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까?


(*) 『죽으면 어떻게 될까?』 ― 2025년 1월(예정)의 「윤회 토론회」 참조


몸으로의 삶은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사건들의 전개 즉 ‘이 세상 있음’은 의심할 바 없이 직접 압니다. 그러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어쨌든 생겨나는 것[무상(無常)-무아(無我)]이고 몸과 함께 유지되는 것일 텐데,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 직접 보아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삶에서 마음은 몸보다 훨씬 더 중심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삶에 대해 바르게 알고 적절히 대응[고(苦) → 고멸(苦滅)=락(樂)]하기 위해서는 죽음 이후에 마음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답을 찾아야 합니까? 직접 보아서 알지 못하지만, 꼭 알아야만 하는 이런 문제에 답을 주는 사람을 스승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제각각 종교의 교주입니다. 우리가 불교 신자인 것은 바로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다른 종교의 교주인 스승들에게서 구하지 않고 불교 교주인 부처님에게서 구하고자 하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아마도 이런 문제들에 대한 온전한 답을 줄 수 있는 스승이 부처님이라는 공감과 동의 그리고 신뢰 때문이라고 이해하면 바른 이유가 될 것입니다.


이때,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했기 때문에 삶에 대해 바르게 아는 스승[정등각(正等覺)]인 부처님은 이 질문에 대해 온전한 답을 줍니다. ― ‘저세상은 있다.’라고.


마음은 몸이 무너진 뒤, 몸 따라 버려지지 않고 새로운 몸을 만나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새로운 몸과 함께 새로운 나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세상 즉 저세상은 있다고 단언적인 답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는 세 가지 경우의 답이 있습니다. 


첫째, 마음은 몸에 종속된 것이어서, 몸이 무너지면 마음도 몸과 함께 버려진다는 답인데, 단견(斷見) 또는 단멸론(斷滅論)입니다. 


둘째, 마음은 독립된 것이어서, 몸이 무너져도 함께 버려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기 상태를 유지하는 참된 것 즉 아(我-attan/atman)라는 답인데, 상견(常見) 또는 상주론(常住論)입니다.


셋째, 마음은 몸에 종속된 것이 아니라서 몸이 무너져도 버려지지 않으며(단견의 극복), 자기 상태를 유지하는 참된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매 순간 변화하는 것인데(상견의 극복), 몸과 서로 조건 되는 것(중생인 한, 몸 없이 마음 혼자 존재할 수 없음)이어서 새로운 몸을 만나야 한다는 답인데, 연기(緣起)입니다. → 「연기(緣起)된 식(識)의 윤회(輪廻)」


이 질문에 대한 ‘저세상은 있다.’라는 부처님의 단언적인 답변은 세 번째 경우 즉 연기(緣起)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마음이 몸과 함께 내가 되어 삶의 과정을 누적하고, 매 순간 변화하며 전생과 금생과 내생에 걸쳐 괴로운 삶을 살게 되는지의 설명이 십이연기(十二緣起)인데, 부처님 깨달음의 중심입니다. 


2. 화생(化生) 하는 중생은 있다(atthi sattāopapātikā) ― 태어나는 자리 → 오도윤회(五道輪廻)


저세상이 있다는 것은 몸의 죽음 이후에 마음은, 삶의 과정을 누적하는 변화의 연장선 위에서, 새로운 몸을 만나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 「연기(緣起)된 식(識)의 윤회(輪廻)」


그런데 다시 태어나는 곳은 어디입니까? 사람 몸을 만나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곳도 있습니까?


(MN 12-사자후 큰 경)에서 부처님은 중생들이 윤회하는 세상을 다섯 갈래로 설명하는데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천상입니다. 이렇게 세상은 다섯 갈래로 구분되기 때문에 죽은 뒤 다시 태어나는 자리도 이 다섯 갈래 가운데 한 곳입니다.


또한, 같은 경은 네 가지 태어남[사생(四生)] 즉 존재의 영역을 설명하는데 난생(卵生), 태생(胎生), 습생(濕生), 화생(化生)입니다. 이때, 생명체가 그 껍질을 깨고 태어나면 난생이고, 생명체가 태의 막을 벗고 태어나면 태생, 생명체가 썩은 물고기, 부패한 시체, 부패한 굳은 우유에서나 물웅덩이나 연못에서 태어나면 습생, 천인(天人)들이나 지옥에 태어난 자들이나 어떤 인간들이나 죽은 뒤에 벌을 받아야 하는 어떤 존재들이 화생이라고 정의됩니다.


그런데 난생, 태생, 습생은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는 존재의 영역이어서 세상의 다섯 갈래 중 인간과 축생에 해당합니다. 반면에 화생은 일반적으로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영역입니다. 세상의 다섯 갈래 가운데 지옥과 아귀와 천상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만 믿으라고 권장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특히, 태어남 즉 존재의 영역은 지금 내 삶의 터전이고 죽음 이후에 다시 태어나 살아가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①정말 없어서 보지 못하는지 아니면 ②보는 능력의 부족 때문에 보지 못하지만, 사실은 있는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스승이고 교주이신 부처님은 이 질문에도 답을 줍니다. ― ‘화생 하는 중생은 있다.’라고.


인간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깨달음 즉 완성된 지혜의 눈에는 보이는 존재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주제는 중요합니다. 비록 인간으로 태어나 살고 있지만 죽음 이후를 담보할 수 없는 현실 위에서 지금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없다고 결정하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승이고 교주이신 부처님에게 완성된 지혜의 눈을 빌려서 분명히 알아야 하는데, 부처님은 화생 하는 중생의 존재를 이렇게 단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 ‘내가 죽은 뒤 다시 태어나는 자리는 눈에 보이는 존재 영역인 난생-태생-습생의 인간과 축생 그리고 보이지 않는 존재 영역인 화생의 지옥-아귀-천상의 다섯 갈래가 있다. 나는 이 몸으로의 삶이 끝나면 다섯 갈래 중 어느 한 자리에 다시 태어나게될 것이다.’라고.


3. 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atthi sukat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 → 태어남의 선택


이렇게 저세상이 있어서 윤회하고, 다시 태어나는 자리는 지옥-축생-아귀-인간-천상의 다섯 갈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나는 죽은 뒤 어디에 태어나야 하겠습니까?


당연히 지옥-축생-아귀의 세상 즉 삼악처(三惡處)에는 태어나면 안 됩니다. 되도록 하늘에 태어나야 하고, 부족하더라도 인간으로는 태어나야 합니다. 스스로 괴로운 삶을 선택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그래서 이 주제는 어떻게 하면 윤회의 과정에서라도 하늘에 태어나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 것인지로 귀결되는데, 부처님은 이 질문에도 답을 줍니다. ― ‘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른다.’라고.


업(행위)은 과(결과)와 보(실제적 경험)를 초래한다는 사실의 선언입니다. 이런 행위에는 이런 과와 보가 따라오고, 저런 행위에는 저런 과와 보가 따라온다는 법칙의 제시입니다. → 「행위가 가지는 과와 보의 법칙성」 → 「업인과보 삼세윤회(業因果報三世輪廻)」


경은 많은 곳에서 고(苦)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과 락(樂)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을 설명하는데, 살아서의 행복과 죽은 뒤에 더 좋은 삶을 이어지게 하는 방법의 제시입니다.


다시 말하면, 살아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락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을 지으면 되고, 죽어서 더 좋은 삶을 이어지게 하기 위해서도 락의 과-보를 초래하는 업을 지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업이 고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인지 락의 과-보를 초래하는 것인지는, 부처님에 의하면,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법칙성이기 때문인데, 그 기준은 십악업(十惡業)과 십선업(十善業)으로 대표됩니다. 


⇒ 「과도 보도 괴로움이어서 지옥으로 이끄는 힘을 가지는 십악업은 피하고, 과도 보도 행복이어서 하늘로 이끄는 힘을 가지는 십선업은 적극 실천해야 함.」


• 십선업 = 복/공덕(puñña)의 행위

• 공덕 = ①행복을 가져오는 것, ②죽을 때 가져가는 것, ③저세상의 버팀목


십선업 = /공덕(puñña)의 행위

공덕 = 행복을 가져오는 것, 죽을 때 가져가는 것, 저세상의 버팀목


4. 이렇게 「①저세상은 있다, ②화생 하는 중생은 있다, ③업에는 과와 보가 따른다.」라는 세 가지는 우리 삶의 현실 위에서 ①윤회와 ②윤회하는 세상의 구성과 ③금생과 내생에 걸친 행복의 방법에 대한 시각을 제시해 줍니다. 즉 바른 견해입니다.

Comments

대원행 10.14 20:11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6_02&wr_id=105 참조 (금정총림 범어사 포교사단 일요법회(241013) - 공덕 & 가르침의 토대와 원초적 바른 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