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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해피스님 특강 - 무엇이 불교인가(1)(부산불교의사회 190819)

0 508 2019.08.21 09:31

불교의 끊임없는 혁신과 발전을 위해서는, 불교가 지향해야 하는 진정한 가치와 바람직한 실천상에 대해서 사부대중이 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현재 한국불교의 모습에서 잘못된 건 없는지 되돌아보고, 한국불교의 미래를 위해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다각적으로 모색하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오늘부터 한국불교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지려고 하는데요, 그 첫 번째 시간으로, ‘무엇이 불교인가’를 주제로 토론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1-1. 무엇이 불교인가? 이 질문은 무엇이 불교의 본래 모습이 아닌가, 하는 문제와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먼저, 오늘날의 한국불교는, 불교의 본질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예비) āṇisuttaṃ (SN 20.7-쐐기 경) → 각자마다 이해의 정도가 다를 것.


• 본질의 측면에서 말해 보겠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성취한 뒤 법을 설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장면에서 ‘내가 성취한 이 법의 두 가지 토대’를 설명하는데, ①여기(중생세상)에서의 조건성인 연기(緣起)[십이연기(十二緣起)]와 ②열반(涅槃)입니다. 연기(緣起)는 그 출발에서 심(心)의 형성 즉 ‘심(心)은 생겨나는 것[무아(無我)]’이라는 점과 심(心)을 생겨나게 하는 조건 관계를 설명합니다[경전의 정의 사항]. 그런데 공부하는 분들과의 대화에서 가장 공감하기 어려운 점이 바로 심(心)이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심(心)은 참된 것이라는 믿음을 가장 강조하는데, 생겨나지 않는 참된 것은 달리 말하면 아뜨만[아(我)]이지요. 무아(無我)라는 불교의 정체성에 어긋난다고 해야 합니다. 또한, 니까야에서 정의하는 열반은 무상(無常)의 가라앉음에 의한 락(樂)과 무아(無我)인데, 상(常)-락(樂)-아(我)-정(淨)으로 왜곡되어 있지요. 부처님이 성취한 법의 두 가지 토대 모두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 현재 한국불교가 불교의 본질에서 얼마나 멀어져 있는지에 대한 진단이라고 하겠습니다.



1-2. 오늘날 한국불교의 중요한 흐름 가운데 하나가 니까야를 중심으로 하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에 관심을 돌리는 경향이 아닐까 하는데요. 그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1) 책을 위한 회암 스님 인사 말씀 중 채근담(菜根譚)


사궁세축지(事窮勢蹙之) 궁지에 몰리게 되면

당원기초심(當原其初心) 마땅히 초심으로 돌아가라


2) 과학의 힘/덕분 → 관심[무명(無明)과 갈애가 세상을 만나는 수단] → 출판과 인터넷의 힘 → 삶의 영역에 들어와서 만나 짐 → 만나진 이것이 정등각(正等覺)의 가르침 → 삶의 심오 함의 끝에 닿은 가르침 → 누구나 만나기만 붙잡게 됨 → 오죽하면 부처님을 ‘개종시키는 요술쟁이’라고 부르기까지 함 → 가르침이 가지는 위력 → (놓치면 안 되는 것) 부처님이야말로 불교가 가지고 있는 비장의 무기/최선의 방법



2-1. 그러면, 무엇이 불교인가? 불교의 참모습에 대해서 말씀 나눠보도록 하죠. 경율론 삼장.. 혹은 팔만사천법문으로 이야기되는 부처님의 방대한 가르침 가운데 우리가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 (전제 : 공감의 문제) 당연히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 → 1차 결집의 모호성 → 그래서 저는 교리적 충돌이 없는 공부 영역을 1차 결집의 내용으로 간주 → 율장(律藏)[마하 위방가-비구니 위방가]/경장(經藏)[디가 니까야-맛지마 니까야-상윳따 니까야-앙굿따라 니까야-숫따니빠따-법구경] → 주제에 대한 확정적 결론의 제시 



2-2. 경전을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가르침을 기준으로 불설, 비불설로 나누기도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다 아는 이야기) 다만, 판단은 각자의 기준의 문제 → 기준 위에서 경(經)과 율(律)에 견주면 됨 - 유훈(遺訓) 



2-3. 결국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것과 변화를 가져와야 하는 것을 명확하게 나누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 “아난다여, 생활에 관계되거나 계목(戒目)에 관계된 갈등은 사소한 것이다. 아난다여, 그러나 상가에 길이나 실천에 관한 (일어나지는 것인) 갈등이 일어난다면, 그 갈등은 많은 사람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신과 인간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괴로움을 위한 것이다.(MN 104)-사마가마 경)”라고 말하는데, 오직 경(經)과 율(律)에 의지한 일관된 공부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그렇습니다! 정등각(正等覺)인 스승에 의해 설해진 가르침은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3-1. 그럼 이번에는, 불교의 지향 내지 목표에 대해서 말씀 나눠볼까요? 일반적으로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불교에 대한 바른 정의라고 할 수 있습니까?


• 불교(佛敎) - 한 마디로 말하면 행위입니다! → 「행위의 중심은 현재에 두어야 합니다. 그러나 눈은 미래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3-2. 깨달음, 혹은 마음에 집중하다 보면 자칫, 현실과 동떨어진 어떤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것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불교는 좀 더 삶의 문제, 인간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 제 주장입니다마는, 불교에는 형이상학이 없습니다. 삶의 심오함의 끝에 닿은 깨달음이고, 가르침이어서 학습 능력을 필요로 할 뿐이지 형이상학은 없습니다. 


• 불교는 사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의 어디 어디에 어떤 어떤 문제가 있어서 괴로움이 생기는지를 설명하면 연기(緣起) 즉 십이연기(十二緣起)이고, 그 자리 자리에 어떻게 어떻게 대응해서 문제를 해소함으로써 고멸(苦滅) 즉 행복을 실현하는지를 설명하면 중도(中道) 즉 팔정도(八正道)입니다. 고(苦)와 고멸(苦滅) 그리고 고집(苦集)과 고멸도(苦滅道)여서 바로 불교 안에 유일한 진리인 사성제(四聖諦)가 됩니다. 이렇게 부처님이 설한 불교/진리는 사는 이야기입니다. 



3-3. 석가모니 부처님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이상과 목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고멸(苦滅)의 끝이 이상이고 목적이라고 해야 합니다. 모든 괴로움의 바탕에는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반복 즉 윤회(輪迴)가 있습니다. 윤회하는 삶 위에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의 아픔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無明)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이라고 우리를 정의합니다. 반면에, 부처님을 ‘세상에서 윤회의 장막을 벗긴 자[loke vi-vaṭṭa-c-chado]’라고 부릅니다. 삶의 심오함의 끝에 대한 가르침을 만나면 윤회에서 벗어난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4-1.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자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요체를 명확히 알아야 할 텐데요.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의 본질은 무엇인가요?


• 「abhiññeyyaṃ abhiññātaṃ, bhāvetabbañca bhāvitaṃ. pahātabbaṃ pahīnaṃ me, tasmā buddhosmi brāhmaṇa. 실(實)답게 알아야 할 것을 실답게 알았고, 닦아야 할 것을 닦았으며, 버려야 할 것을 버렸습니다. 바라문이여, 그래서 나는 부처[불(佛)-깨달은 자]입니다. <브라흐마유 경(M91)>」



4-2. 부처님께서는 당시에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잘못된 태도에 대해서 육사외도라고 명확하게 지적해놓으셨습니다. 2,600여 년 전 육사외도로 지적된 인식체계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통용되고 있고 특히 불교계에도 알게 모르게 잠식되어 있다고 생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육사외도(六師外道)와 불교의 차이점 ㅡ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보이는 사문-수행자-불교 신자의 결실」<사문과경(沙門果經)(DN 2)>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보이는 사문의 결실을 질문받은 육사외도(六師外道)는 각각 자기의 주장을 말할 뿐 그 결실 즉 그 주장으로 인한 삶의 향상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길과 실천에 의한 결실 즉 삶의 향상을 설명합니다.


• 육사외도(六師外道) 이전에 브라만교의 극복이 있음 ㅡ 아(我)와 창조이야기


• 단멸론자(斷滅論者)의 잠식 ㅡ 과학 문명을 수단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목적으로 삼아 단견(斷見)에 떨어짐[아지따 께사깜발리의 단멸론(斷滅論)]. 그러나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홀로 작용하는 내면의 영역’에 대한 가르침을 만나면 윤회(輪迴)하는 삶을 알 수 있게 됨 ㅡ 「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 → 여기에 탐(貪)-진(嗔)-치(癡)가 있고 여기에서 심(心)이 생겨남.


4-3.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시각을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올바르고 확실하게 정립하는 것이 가장 중요할 겁니다. 끝으로, 불교의 진리란 한 마디로 무엇인지 정리하면서 오늘 논강은 마무리 짓겠습니다.


• 한 문장으로 압축한 부처님의 가르침


사실에 괴리(乖離)된 삶은 괴로움을 만들고[고(苦)],

사실에 부합(符合)한 삶은 행복을 만든다[고멸(苦滅)].


※ 사실 =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 ※ 

   

네, 오늘 논강에서는 ‘무엇이 불교인가?’를 주제로 말씀 나눴습니다. 부처님 진리의 핵심에 대해서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는 시간이 되었는데요. 앞으로도 다양한 불교 현안의 주제를 가지고 깊이 있는 토론과 제언의 시간 갖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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