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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무얼까 2[知見의 개념1) & 我山-無我山](공개강의 170831)

0 1,296 2017.09.01 11:37

▣ 종교는 무얼까 2[知見의 개념1) & 我山-無我山](공개강의 170831)

   [동영상] ☞ https://youtu.be/WDVsMtVXMwo


종교는 교주 즉 스승의 ‘존재와 삶과 세상’에 대한 해석을 전제로 합니다. 이때, 해석이라 함은 앎[지(知)]입니다. ‘존재와 삶과 세상’에 대해 스승이 안 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종교는 무얼까?’의 주제는 종교에 대한 정의에서 앎[지(知)]로 전환됩니다.


그런데 종교(宗敎)는 단순히 앎에 대한 공감이 아닙니다. 종교에 의지해 나의 삶을 향상해야 하는 삶의 이정(里程)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제시하는 앎은 사실 여부의 판단을 필요로 합니다. 여러 종교 여러 스승의 앎 즉 가르침 가운데 누구의 앎이 옳고 누구의 앎이 그른지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앎 즉 가르침에 대한 옳고 그름의 판단! 


그 스승은 ‘존재와 삶과 세상’을 바로 본 것일까, 아닐까? 그 스승을 뒤따라 살 때 내 삶의 향상 즉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일까, 아닐까? 참으로 누구의 앎이 바르고 완전한 앎이어서 나를 완전한 고멸(苦滅), 완전한 행복까지 이끄는 것일까?


이런 문제의 제기에 의해 종교는 ‘알고 봄[지견(知見)]’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할 것입니다.


이때, 왜 옳고 그름의 분별이 필요한가에 대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어떤 길로 가던 도착해서 함께하는 것은 같은데 굳이 옳고 그름을 따질 필요가 있을까?’의 지적입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해 하나를 선택하는 것보다는 모두의 가치를 인정하여 공생(共生)하는 것이 더욱 나은 방법이 아니냐는 문제 제기입니다.


아산(我山)-무아산(無我山)의 측면에서 답하였습니다. 어떤 길로 오르던 꼭대기에서 모두 만나게 되는 아(我)의 산(山)과 그 꼭대기에서도 해소되지 않은 남아있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다시 올라야 하는 무아(無我)의 산(山)입니다.


나로서의 삶의 과정에 수반되는 불만족을 해소하는 과정으로의 아산(我山)과 나 즉 존재에 내재한 문제를 해소하는 과정으로의 무아산(無我山)입니다. 삶의 중심인 심(心)이 생겨나는 과정의 문제 해소입니다.


부처님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줍니다. 심행(心行)=상(想)-수(受) 즉 상(想)과 수(受)의 과정이 심(心)을 생겨나게 하는 작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想)과 수(受)의 과정의 제어를 통해 청정한 심(心)이 생겨나게 하는 것이 심(心) 때문에 생겨나는 모든 문제에 대한 근원적 대처 방안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런데 오랜 세월 이 가르침에 대한 오해가 일반화 되었습니다. 심(心)의 작용이 상(想)과 수(受)라는 오류입니다. 이 때문에 불교 안에서 삶의 중심인 심(心)이 생겨나는 조건 관계가 상실되어 개념화-관념화-형이상화됨으로써 불교의 근본인 삶의 현실에 대한 통찰을 잃어버린 문제를 지적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오류를 해소함으로써 불교를 1,600년만큼 부처님에게로 되돌린 것이야말로 우리 법회의 자부심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종교는 ‘알고 봄[지견(知見)]’의 측면에서 옳고 그름의 분별을 필요로 합니다.

 

아산-무아산.png


※ 이 주제[아산(我山)-무아산(無我山)]에 대한 이전의 공부는 https://youtu.be/YXfkNJE0bfE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종교의 선택은 신중해야 합니다. 공감-동의-신뢰의 측면에서 어떤 종교가 나의 삶을 향상으로 이끄는지 진지하게 고민함으로써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알고 봄의 측면에서 종교를 바라보고 선택해야 합니다.


알고 봄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하나는 직접 확인된 알고 봄인가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완전한 알고 봄인가의 측면입니다. 직접 확인된 알고 봄은 사실이어서 확인된 그 자리로 이끌지만 직접 확인되지 않은 알고 봄은 설정된 것에 불과해서 그 자리로 이끌지 못합니다. 완전한 알고 봄은 삶의 완성 즉 일체의 괴로움의 소멸로 이끌기 때문에 뒤따르면 되지만 완전하지 못한 알고 봄은 그 단계에 이르면 더 높은 경지를 제시하는 알고 봄을 찾아 움직여야 합니다.


교재 「지(知)와 견(見)의 개념」을 통해 이 주제를 설명하였습니다[답글 참조]. 또한, 「지(知)와 견(見)의 개념(Ⅱ)」를 배부하였는데 다음 수업에서 이어서 설명할 것입니다.


수업의 말미에 두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은 ‘해피스님은 열반을 알고 보았느냐?’는 질문입니다. 해피스님은 직접 확인된 알고 봄에 의해 그 자리로 이끄는 설법을 하느냐의 질문인 듯 싶습니다. 저는 질문하지 않은 것으로 하자고 하였는데, 설법자가 스스로 확인된 만큼만 설법해야 하는가의 문제에 스스로 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경전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자의 역할 측면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열반을 알고 본 자로서의 부처님은 돌아가셨지만 설하신 법(法)과 율(律)이 경(經)에 의해 부처님의 자격으로 우리 곁에 함께하고 있습니다[대반열반경(D16)]. 경(經)을 바르게 해석하여 전달하는 것은 열반을 알고 본 자의 선언을 설하신 그대로 전달함으로써 알고 본 자에 의한 이끎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해피스님의 알고 봄을 설법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 본 자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역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말하는 것입니다. ㅡ ‘가르침은 설하신 그대로 공부해야 한다!’


두 번째 질문은 ‘메커니즘이 무엇입니까?’입니다.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의 도식(圖式)이라고 답하였습니다.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를 부처님은 심오한 영역까지를 포함해 설명하였는데, 그 이야기의 어느 자리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괴로움이 생겨나는지를 설명하는 것이 십이연기(十二緣起)이고, 그 자리에 어떻게 대응하면 괴로움이 생겨나지 않는지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 팔정도(八正道)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 홈페이지를 참고하면 삶의 메커니즘에 대한 많은 공부를 접할 수 있다고 안내하였습니다. → nikay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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