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경전어는 빠알리어[pāḷi]입니다. 빠알리로 설해지고 전승된 부처님 가르침을 우리가 배워 알기 위해서는 번역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설하신 바 부처님의 의도를 정확히 우리말로 바꾸어 전달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바른 번역을 위해서는 두 가지 도구가 필요합니다.
한 가지는 빠알리어에 대한 문법적 이해입니다. 단어와 문장이 어떻게 조화되어 하나의 문장을 만드는지 문법적으로 잘 알고 있어야 설하신 그대로를 우리말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 가지는 삶에 대한 공통된 이해입니다. 삶에서의 고(苦)와 고멸(苦滅)을 설하신 가르침이 불교(佛敎)이기 때문에 삶의 모습에 대한 공통된 시각 없이는 설하신 의도를 설하신 그대로 이해하여 우리말로 전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치 외국소설을 번역할 때 외국어에 대한 문법적 이해와 그 무대의 문화 등 삶의 조건에 익숙해야 훌륭하게 번역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근본경전연구회는 두 가지 도구를 모두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먼저 online으로 제공되는 digital pali reader의 도움 위에서 공부를 통해 빠알리어에 대한 문법적 이해의 수준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그 위에 1차 결집된 경(經)과 율(律)의 공부 기준 위에서 구명(究明)한 삶의 메커니즘으로 부처님이 보시고 설명하신 삶의 모습에 접근하고 있습니다. 삶의 메커니즘은 오직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으로의 1차 결집된 경(經)과 율(律)의 기준 위에서 꿰어낸 삶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 「4부 니까야를 꿰는 하나의 정신이 있다면 삶의 현실에 대한 통찰입니다!」
아무리 외국어에 문법적으로 능숙하다해도 그 무대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은 훌륭한 번역, 작가의 의도를 정확히 읽어내는 번역을 하지 못합니다. 빠알리 경전의 번역에서도 그렇습니다. 빠알리어에 대한 문법적 능숙에 더해 부처님이 보시고 설명하신 삶의 이해에 공감하지 못하면 고멸(苦滅)의 실현을 위한 가르침을 바르게 번역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불교가 오랫동안 형이상학의 영역으로 간주되어온 이유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삶의 메커니즘에 의하면 불교에는 형이상학이 없습니다. 심오하여 알고 보기 어려운 그 영역에 대해 부처님의 깨달음에 의해 구체적으로 제시된 심오한 가르침이 있을 뿐입니다. 더욱 열심히 공부[교학+수행]함으로써 설하신 바 그 심오함을 알고 보는 것이 부처님을 스승으로 하는 제자들인 불교신자들의 의무이지 내가 알고 보지 못하는 영역을 형이상학으로 간주하여 삶에서 배제하는 것은 옳지 않은 접근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근본경전연구회는 두 가지 도구를 모두 갖추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아직은 작은 시작일지 몰라도 앞으로 찾아올 미래는 커다란 성과(*)와 함께하게 될 것입니다. 해피[解彼 & happy] 하시기 바랍니다!
(*) 1. 이 자리에서 빠알리 경전의 재번역 작업을 시도합니다. 10년쯤 제법 긴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런 두 가지 도구를 사용한 번역은 부처님 가르침을 정확하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하게 될 것입니다.
[180526] 이 자리에서 시도하기에는 경전의 양이 너무 방대합니다. 그래서 2018년 1월 두 번째 홈페이지를 만들어 번역불사의 터로 삼았습니다. ☞ http://sutta.kr
두 개의 홈페이지의 연결 위에서 ①번역불사(飜譯佛事)와 ②경전을 꿰어 가르침의 진정에 접근하는 두 가지 사업이 동시에 진행됩니다. 이것이 바로 「불교(佛敎)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불사(佛事)」입니다.
2. 빠알리어에 대한 문법적 이해에 능숙한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빠알리어에 능숙한 분이시라면 이 새로운 번역불사에 함께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