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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출판 및 저자 강의

눈은 무엇입니까? - [내입처(內入處)에 대한 이해] : 「전개되며 정의되는 심-의-식」의 이해를 위한 전제 작업

 2011년 6월 26일에 작성되었습니다.

 

전개되며 정의되는 심-의-식」으로 마음을 이해하였습니다. 이때, 눈-귀-코-혀-몸-mano의 육내입처에 대한 정의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정의가 경전에서 직접 찾아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경전들의 조합을 통해, 그야말로 '니까야로 니까야를 푸는 작업'을 통해 내입처를 정의해 보았습니다. 많이 어려우시면 「입(入), 처(處) 또는 입처(入處)로 번역되는 āyatana인 의(意)는 이렇게 식(識)과 의근(意根)을 합하여 부르는 개념인 것입니다.」라는 결론만 기억해 주셔도 됩니다. 혹시 필요하신 분이 계실까 싶어 한글문서를 첨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글은 내입처와 식온에 대해 서술하는 http://cafe.naver.com/happybupdang/3161의 필요에 의해 작성된 글입니다.

 

[131130 보완] 수정될 내용도 많이 있지만, 일단 이 글은 내입처가 식과 근의 결합이라는 것을 찾아낸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글입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눈은 무엇입니까? - [내입처(內入處)에 대한 이해]

 

 <운나바 바라문 경(S48:42)>에서 안근(眼根)~신근(身根)은 의(意)를 의지합니다.

 

이때 의(意)는 무엇입니까? 

 

Katamañca, bhikkhave, purāṇakammaṃ? Cakkhu, bhikkhave, purāṇakammaṃ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vedaniyaṃ daṭṭhabbaṃ…pe…  jivhā purāṇakammā abhisaṅkhatā abhisañcetayitā vedaniyā daṭṭhabbā…pe…  mano purāṇakammo abhisaṅkhato abhisañcetayito vedaniyo daṭṭhabbo. Idaṃ vuccati, bhikkhave, purāṇakammaṃ. Katamañca, bhikkhave, navakammaṃ? Yaṃ kho, bhikkhave, etarahi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idaṃ vuccati, bhikkhave, navakammaṃ. <업 경(S35:146)> 

 

purāṇakamma 즉 ‘이전의 업’은 안-이-비-설-신-의인데, 대등한 문장을 최봉수 님은 「원시 불교의 연기사상연구」210쪽에서「이 몸(kāya)은 先業(purāṇakamma)의 (결과이니) 결합된 것(abhisaṅkhata)이고 思된 것(abhisañcetayita)이고 所受(vedaniya)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의(意) 또한 이전의 업으로서, 형성된 것이고 의도를 거친 것이고 느껴진 것입니다. [mano purāṇakammo abhisaṅkhato abhisañcetayito vedaniyo daṭṭhabbo.] 그리고 이 경에서는 지금 몸과 말과 의(意)로 짓는 업을 새로운 업이라고 말합니다. 

 

<꿰뚫음 경(A6:63)>에서는 사(思)가 곧 업이라고 합니다. 사(思)한 뒤에 몸과 말과 의(意)로 업을 지으며 촉(觸)이 업의 원인[Cetanāhaṃ, bhikkhave, kammaṃ vadāmi. Cetayitvā kammaṃ karoti—  kāyena vācāya manasā. Katamo ca, bhikkhave, kammānaṃ nidānasambhavo? Phasso, bhikkhave, kammānaṃ nidānasambhavo.]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업이 광의(廣義)로는 사(思)에 포함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업은 촉(觸)을 조건으로 생겨나는 수(受)-상(想)-사(思)의 일부인 것입니다. 

 

<취착의 양상 경(S22:56)>은 오온(五蘊)을 정의하는데, 행(行)은 색(色)~법(法)에 대한 의도[색사(色思)~법사(法思) : Katame ca, bhikkhave, saṅkhārā? Chayime, bhikkhave, cetanākāyā—  rūpasañcetanā, saddasañcetanā, gandhasañcetanā, rasasañcetanā, phoṭṭhabbasañcetanā, dhammasañcetanā. Ime vuccanti, bhikkhave, saṅkhārā.]입니다. 그렇다면 업은 오온 가운데 행(行)에 속하는 것입니다. 

 

오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입니다. 이때 식은 안~의로 구분되는 각각의 앎[안식(眼識)~의식(意識) : Katamañca, bhikkhave, viññāṇaṃ? Chayime, bhikkhave, viññāṇakāyā—  cakkhuviññāṇaṃ, sotaviññāṇaṃ, ghānaviññāṇaṃ, jivhāviññāṇaṃ, kāyaviññāṇaṃ, manoviññāṇaṃ.]입니다. 

 

식은 안~의에 의한 앎[안식(眼識)~의식(意識)]이지만 다르게는 색-수-상-행에 대한 앎['나는 물질과도 다르고 느낌과도 다르고 인식과도 다르고 심리현상들과도 다른 알음알이가 오거나 가거나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자라거나 증장하거나 충만하게 되는 것을 천명하리라.'라고 한다면 그런 경우는 존재하지 않는다.<속박 경(S22:53)>]입니다. 

 

다시 <취착의 양상 경(S22:56)>은 수-상-행은 촉(觸)이 일어날 때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촉은 내-외입처 간의 작의(作意)에 의해 식이 생겨날 때 삼사화합(三事和合)하는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수-상-행-촉-작의는 하나의 묶음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분석 경(S12:2)>에서는 수-상-행-촉-작의의 묶음을 명(名)이라고 하고 물질인 색(色)과 묶어 명색(名色)이라고 정의합니다.[Katamañca, bhikkhave, nāmarūpaṃ? Vedanā, saññā, cetanā, phasso, manasikāro—  idaṃ vuccati nāmaṃ. Cattāro ca mahābhūtā, catunnañca mahābhūtānaṃ upādāyarūpaṃ. Idaṃ vuccati rūpaṃ. Iti idañca nāmaṃ, idañca rūpaṃ. Idaṃ vuccati, bhikkhave, nāmarūpaṃ.] 

 

한편, <대인연경(D15)>에서는 식과 명색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식(識)을 조건으로 명색(名色)이 있다[식연명색(識緣名色)-‘Viññāṇapaccayā nāmarūpan’ti]」

「명색(名色)을 조건으로 식(識)이 있다[명색연식(名色緣識)-‘Nāmarūpapaccayā viññāṇan’ti]」

「이것이 바로 식의 원인이고, 근원이고, 기원이고, 조건이니, 그것은 다름 아닌 명색이다. 아난다여, 이와 같이 하여 태어나고 늙고 죽고 죽어서는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Ettāvatā kho, ānanda, jāyetha vā jīyetha vā mīyetha vā cavetha vā upapajjetha vā.].」

「이러한 [식과 명색의 상호 조건]에 의해 이름 짓는 토대가 생기고, 어원에 입각한 언어의 토대가 생기고, 개념을 얻는 토대가 생기고, 통찰지의 영역이 생기며, 이 식과 명색의 상호 조건에 의해 [윤회는] 전개되는 것이다. 명색은 식과 더불어 [오온의] 이러한 상태를 천명하기 위한 것이다.[Ettāvatā adhivacanapatho, ettāvatā niruttipatho, ettāvatā paññattipatho, ettāvatā paññāvacaraṃ, ettāvatā vaṭṭaṃ vattati itthattaṃ paññāpanāya yadidaṃ nāmarūpaṃ saha viññāṇena aññamaññapaccayatā pavattati.]」 

 

이렇게 식과 명색은 상호조건지어 있습니다. 혼자 떨어져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식이 있으면 조건이 되는 명색도 있는 것이고, 명색이 있으면 조건이 되는 식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라훌라 경(S35:121)>에서는 식도 촉에서 생겨난다고 말합니다[눈의 감각접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난 느낌에 포함된 것이나 인식에 포함된 것이나 심리현상들에 포함된 것이나 알음알이에 포함된 것은 항상한가, 무상한가?[“Yampidaṃ cakkhusamphassapaccayā uppajjati vedanāgataṃ, saññāgataṃ, saṅkhāragataṃ, viññāṇagataṃ, tampi niccaṃ vā aniccaṃ vā”ti?]]. 

 

상호 조건 지어진 식과 명색이 작의와 촉이라는 작용으로 활성화 되면 수상행이 생기고, 이것들에 대한 앎으로의 식이 뒤를 잇는다고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물론 이때의 식은 색-수-상-행 즉 명색에 대한 앎이므로 식은 명색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과 명색은 왜 활성화가 되는 것일까요? 

 

<자기 존재 경(S38:15)>은 오취온(五取蘊)을 자기 존재라고 정의합니다[“‘Sakkāyo, sakkāyo’ti, āvuso sāriputta, vuccati. Katamo nu kho, āvuso, sakkāyo”ti? “Pañcime, āvuso, upādānakkhandhā sakkāyo vutto bhagavatā, seyyathidaṃ—  rūpupādānakkhandho, vedanupādānakkhandho, saññupādānakkhandho, saṅkhārupādānakkhandho, viññāṇupādānakkhandho. Ime kho, āvuso, pañcupādānakkhandhā sakkāyo vutto bhagavatā”ti.]. 

 

그런데 명색은 온(蘊)으로의 색-수-상-행과 작용으로의 작의-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식과 명색은 오온과 작의-촉이 되는데, 이때 작의에 탐진치가 개입[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하면 오취온(五取蘊)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즉 자기 존재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는 <관찰 경(S22:47)>의 말씀이 적용됩니다.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라는 [사량분별이] 생기면 눈의 감각기능, 귀의 감각기능, 코의 감각기능, 혀의 감각기능, 몸의 감각기능이라는 다섯 가지 감각기능이 출현한다[‘Asmī’ti kho pana, bhikkhave, avigate pañcannaṃ indriyānaṃ avakkanti hoti—  cakkhundriyassa sotindriyassa ghānindriyassa jivhindriyassa kāyindriyassa. ]. 비구들이여, 거기에는 마노[意]가 있고 [마노의 대상인] 법들이 있고 무명의 요소가 있다[Atthi, bhikkhave, mano, atthi dhammā, atthi avijjādhātu.]. 무명과 함께하는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에 닿은 배우지 못한 범부는 '나는 있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이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있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있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물질을 가지게 될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물질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인식을 가질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인식을 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하고, '나는 인식을 가지지도 않고 인식을 가지지 않지도 않을 것이다.'라고도 생각한다.[Avijjāsamphassajena, bhikkhave, vedayitena phuṭṭhassa assutavato puthujjanassa ‘asmī’tipissa hoti; ‘ayamahamasmī’tipissa hoti; ‘bhavissan’tipissa hoti; ‘na bhavissan’tipissa hoti; ‘rūpī bhavissan’tipissa hoti; ‘arūpī bhavissan’tipissa hoti; ‘saññī bhavissan’tipissa hoti; ‘asaññī bhavissan’tipissa hoti; ‘nevasaññīnāsaññī bhavissan’tipissa hoti.]」 

 

식과 명색인 오온이 있는데, 여기에서 ‘나-asmī’라는 존재의식이 일어나면 안근(眼根)~신근(身根)이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윤회하는 존재로 붙잡아 두는 열 가지 족쇄 가운데 무명(無明)-들뜸-자만(自慢)의 개입으로 이해할 수 있는 현상일 것입니다. <아라한 경(S22:76)>의 "아라한들은 행복하나니 그들에게 갈애란 없네. ‘나’라는 자만을 잘랐고 어리석음의 그물을 찢어버렸다네[Sukhino vata arahanto, taṇhā tesaṃ na vijjati; Asmimāno samucchinno, mohajālaṃ padālitaṃ.]”를 감안하면 ‘나-asmī’가 생긴다는 것은 자만이라는 족쇄와 관련된다고 하겠습니다. 자만이 ‘나’와 ‘나 아닌 것’의 비교를 내포하는 족쇄이니, ‘나 아닌 것’의 감각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안근(眼根)~신근(身根)이 생겨난다[활성화 된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이 말씀은 이 글의 시작인 <운나바 바라문 경(S48:42)>의 「안근(眼根)~신근(身根)은 의(意)를 의지합니다.」로 돌아가게 됩니다. 

 

이 말씀에서 주목할 것은 안근(眼根)~신근(身根)이 의근(意根)이 아닌 의(意)에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까지의 과정에 의하면 의(意)는 이전의 업으로서의 행(行)이고, 행[행의 형성과정인 색-수-상 포함]에 대한 앎인 식(識)으로 존재합니다. 또한, 의(意)는 감각기능인 의근(意根)이어서 대상에 주목하는 기능[작의(作意)-manasikāra]을 수행합니다. 입(入), 처(處) 또는 입처(入處)로 번역되는 āyatana인 의(意)는 이렇게 식(識)과 의근(意根)을 합하여 부르는 개념인 것입니다. 

 

그런데 안근(眼根)~신근(身根)은 물질입니다. 정신적인 것인 안식(眼識)~신식(身識)과 직접 연결되지 못합니다. āyatana로서의 안(眼)~신(身)을 직접 형성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意)에 의지합니다. 의근(意根)으로 연결되고 의근의 배후에 있는 자기 몫의 식(識)으로 연결되어야 비로소 안(眼)~신(身)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안근(眼根)~신근(身根)은 의(意)를 의지합니다.」라고 설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논술은 「전개되며 정의되는 심-의-식」의 이해를 위해 전제되는 작업입니다. 내입처(內入處)[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와 외입처(外入處)[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대응에서 의지되는 의근(意根)이 작의(作意)하면 근(根)들은 외입처를 아는 상태인 식(識)으로 바뀝니다. 그리고 바뀌어 생긴 식(識)과 외입처 그리고 내입처에 남아있는 식(識)의 세 가지가 만나게 되는데[삼사화합(三事和合)], 이것을 촉(觸-phassa)라고 합니다. 

 

작의(作意)가 지금여기[현법(現法)]에서의 내입처와 외입처의 만남[‘나’와 ‘나 아닌 것’]을 주선하는 작용이라면, 촉(觸)은 외입처에 대한 지금여기에서의 앎으로서의 식(識)과 외입처에 대한 이전의 업으로의 식(識)의 만남이라고 할 것입니다. 외입처 즉 대상을 알기 위해 현재와 과거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촉(觸) 또한 āyatana가 됩니다. 촉처(觸處) 또는 촉입처(觸入處)입니다. 이때, 외입처에 대한 이전의 업으로의 식(識)은 식온(識蘊)이고 기억인 것입니다. 

 

「전개되며 정의되는 심-의-식」으로의 마음 이해와 이에 따른 십이연기의 해석을 위해 준비하였습니다. 앞으로 많은 내용들이 수정-보완되어야겠지만 마음과 삶을 이해하기 위한 큰 틀을 마련하였다고 하겠습니다.

 

해피[解彼 & happy] 하시기 바랍니다!

 

Comments

아빈뇨 2020.05.29 05:43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