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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스님의 변명 - [(心行)마음을 형성하는 작용과 무색계 포함](2018.4.11. 부산)

0 858 2018.04.13 13:28

 ▣ 해피스님의 변명 - [(心行)마음을 형성하는 작용과 무색계 포함](2018.4.11. 부산) 

   [동영상] https://youtu.be/9fez8aiwNF0


변   명


공부를 세우기 위해 (사)한국테라와다불교 교단을 떠나 홀로서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과정에 저에게 전달된 법우님들의 심정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어줍기는 하지만 변명의 말씀이라도 드리는 것이 법우님들에 대한 저의 도리라는 생각에 글을 적습니다.


1. 만류


교단에서는 저에게 교단을 떠나지 말라고 만류하였는데 제가 부득불 뿌리치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간 함께 공부한 법우님들의 아쉬움과 서운함이 담긴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류는 어떤 경우에 쓰는 용어입니까? 만류(挽留)는 붙들고 하지 못하게 말리는 것입니다. 이때, 말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사탕 들고 어르면서 가지 말라고 회유하는 방법과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기에 있으라고 말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면 저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청정도론(淸淨道論)을 지은 붓다고사 스님의 오류를 지적하고 「불교(佛敎)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불사(佛事)」를 진행하고 있다는 저의 선언에 대해 ‘오류를 인정할 수 없고 또 오류의 인정은 아비담마[논장(論藏)]에 대한 부정이 되니 말하지 말라’는 교단 내 지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비구들의 모임을 통해 경(經)-율(律)-론(論) 삼장(三藏)의 전통에 근거한 공부의 옆 자리에 경(經)과 율(律)의 범위에서 교리적 충돌이 배제되는 더 좁은 영역의 공부를 세우게 해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요청에 대한 답변은 ‘삼장(三藏)의 전통에 어긋나는 공부는 교단 안에 함께 설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삼장(三藏) 위에서 존재 의미를 가지는 테라와다 교단 안에 논장(論藏) 등의 배제를 구체적으로 선언하는 공부는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결정인 것입니다.


저는 공부에 있어 ‘전통(傳統)보다는 진정(眞正)이 기준이 되어야 함’에 확고합니다. 그래서 아쉬움과 두려움 속에 교단의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서기를 시도하게 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만류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냥 모든 것을 내려놓고 여기에 있으라고 말하는 방법이라면 모를까 사탕 들고 어르면서 가지 말라고 회유하는 방법으로의 만류는 저에게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탓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眞正)에 입각한 공부, 부처님 가르침의 진정을 찾아 부처님에게로 접근하는 이 시도에는 회유 당할만한 달콤함을 가지는 사탕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법우님!


교단에서 만류하였는데 제가 고집 피워 교단을 떠났다고 아쉬워하거나 서운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간 우리가 함께 일궈온 이 공부가 성숙해서 더 이상 전통이란 이름 위에 머물 수 없게 되었기에 진정(眞正)이란 이름의 새로운 자리를 만들어 홀로 서게 된 것뿐입니다.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우리가 「불교(佛敎)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불사(佛事)」를 진행한 바로 그 사람들이라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 자부심 위에 살아서는 행복하고 죽어서는 더 좋은 삶을 이어지게 하다가 끝내는 부처님이 지시하신 그 자리, 열반(涅槃)을 실현하게 될 것입니다.


2. 내침


법우님들은 저와 함께하고자 하는데 제가 법우님들을 내쳤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시다시피 일고여덟 명의 법우님들만 참석하셔도 법당이 꽉 찬 듯 흥겨워하던 것이 우리 법회의 형편입니다. 보통 다섯 명 정도의 작은 모임이고 때로는 한두 분의 법우님들과 함께 두 시간씩 가르침을 향하여 매진해온 것이 지난 수년간 진행된 우리 법회입니다. 그리고 이 법회의 과정을 통해 진정(眞正)이란 이름으로 「불교(佛敎)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불사(佛事)」가 익어왔습니다. 


저에게는 한 분 한 분 우리 법우님들이 모두 소중하고 고마운 분들입니다. 제가 법우님들을 내쳤다는 말씀은 저에게는 그야말로 커다란 충격입니다.


아마도 이런 경우일 것 같습니다. 


공부의 성숙 과정에서 우리 공부가 설 자리가 좀 더 분명해졌습니다. 그래서 경(經)과 율(律)의 범위에서 교리적 충돌이 배제되는 가장 좁은 영역의 공부를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을 만나는 가장 좋은 기준이 이렇게 찾아진 것입니다.


공부의 과정에 이 기준에 공감하지 못하는 분들이 생겨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를 법사(法師)로 하는 이 법회(法會)의 자리에서 공부가 분명 이런 기준을 가지고 진행되는 것은 맞습니다. 그리고 이 기준을 벗어난 주장이 우리 안에 있다면 다시 추슬러 기준 안으로 되돌려 공부를 진행하는 것은 저의 정당한 대응입니다.


물론 다양한 견해가 세상에 있습니다. 견해의 같고 다름에 따라 공부의 자리가 결정되고, 사람들은 공감하는 공부의 자리에서 함께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함께 공부하다가도 공부에 대한 공감이 사라지면 공감하는 공부 자리를 찾아 떠나게도 되는 것입니다. 만류하기도 하고, 만류가 닿지 않으면 떠나감을 사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법우님들을 내치지 않았습니다. 성숙도가 높아지는 이 공부에 공감도를 높여 함께하지 못하는 분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가운데 공감을 분명히 포기한 분들이 우리에게서 떠나가는 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더 이상 애써 붙잡지 않는다고 해서 그분들을 내쳤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단 한 분의 법우님이라도 더 제 곁에서 저와 함께 공부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이만한 공부 자리에서 오직 법회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큰 환영과 예우를 받기로는 아마도 우리 법회를 제외하고는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니 법우님!


제가 법우님들을 내쳤다고 서운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공부에 대한 공감의 차이로 우리가 함께 공부하지 못하게 된 것 뿐입니다. 가능하다면, 공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런 전제도 없이 부처님을 직접 만나는 것이 이 공부입니다. 공부의 공감 위에서 우리가 다시 함께할 수 있기를 저는 바라고 있습니다.


3. 해피스님은 위자나띠[vijānāti-인식하다]와 딱까[takka-갈애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 얘기 밖에는 말하는 게 없다!


물론 새출발법회도 있고, 기본기 법회도 있고, 기타 여러 가지 법회가 그동안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분이신지 vijānāti와 takka로써 우리 법회를 대신하신 것은 놀라운 통찰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불교(佛敎)를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라고 설명합니다.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과정 즉 삶의 메커니즘 가운데 어느 자리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괴로움이 생겨나는지를 설명하는 십이연기(十二緣起)와 다섯 가지 기능들의 도움으로 그 문제의 자리에 적절히 대응함으로써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과 실천으로의 팔정도(八正道)입니다. 이것이 곧 고(苦)-고집(苦集)-고멸(苦滅)-고멸도(苦滅道)의 사성제(四聖諦)이고 그 근간에 삼법인(三法印)이 함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삶의 메커니즘 위에서 삼법인(三法印)도, 사성제(四聖諦)도, 십이연기(十二緣起)도, 팔정도(八正道)도 그 의미를 왜곡 없이 드러냅니다. 그리고 이런 근본이 되는 교리적 토대 위에서 새출발법회도, 기본기 법회도, 기타 여러 가지 법회도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을 향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법회는 모두 삶의 메커니즘 위에서 진행됩니다. 그런데 삶은 행위와 인식입니다. 행위는 찬다[chanda-욕(欲)]에 의해 인식으로 전달되고, 인식은 가공되어 행위로 전달됩니다. 이때, 인식은 vijānāti이고, 가공의 과정은 takka입니다. 그래서 공부의 중심은  vijānāti와 takka 그리고 행위와 chanda의 네 가지로 압축하여 말할 수 있습니다. chanda에 대해서는 그간에도 충분히 설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서야 비로소 takka 이후 즉 행위의 영역으로 공부는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vijānāti는 육처 상윳따(SN 35) 등 경에서도 가장 비중 있게 다루는 주제입니다. 육내입처(六內入處)가 chanda의 간섭 위에 육외입처(六外入處)를 인식하여 식(識)과 수(受)를 만들고, 식(識)은 다시 수(受)를 상(想)의 간섭 위에 인식하여 심(心)과 애(愛)로 몸집을 부풀리는 과정은 놓쳐서는 안 되는 삶의 몸통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식(識)과 수(受) 내지 애(愛)로 몸집을 부풀리는 과정이 takka입니다. 그래서 이 가공의 과정을 「애(愛)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이라고 이름 붙인 것입니다.


이런 이해의 중심에는 식(識)이 수(受)를 상(想)의 간섭 위에 인식하여 심(心)으로 몸집을 부풀리는 과정이 있습니다. 식(識)이 상(想)과 수(受)의 과정을 거쳐 심(心)이 되는 것인데, 경전이 「심행(心行)=상(想)-수(受)」라고 제시하는 심(心)의 형성 작용입니다. 이런 이해에 의하면, 삶은 심(心)이 생겨나는 과정과 생겨나서 존재하는 심(心)의 활동 과정으로 나누어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공부의 중심에는 vijānāti와 takka가 있습니다. 가르침에 입각한 삶의 이해, 그래서 향상하는 삶을 위한 모든 시도는 이 두 가지 개념을 배제하고는 거론할 수 없다고 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공부는 가장 경쟁력 있는 공부라고 해야 합니다. 특히, takka에 대한 구체적 이해는 불교 안팎의 여러 관점들에 대해 니까야 즉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에게 경쟁력을 부여합니다.


말하자면, 뇌 과학 등 현대과학이 주장하는 삶의 이해는 매우 정교합니다. 그래서 불교가 뇌 과학의 주장을 극복하고 삶에 대한 바른 이해로서의 지위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삶의 심오한 영역에 대한 물질적 접근을 넘어서는 구체적 해석이 필요합니다. takka는 바로 이 문제에 답을 줍니다. 몸과 함께하는 행위의 출발인 vitakka를 경영하는 자로서의 nandi가 제시되는데, takka의 끝 즉 애(愛)의 형성을 위한 직전의 과정입니다. 따지자면, 무인무연(無因無緣)을 주장하는 모든 이론들에 대한 확실한 답변, 확실한 극복이 이렇게 물질의 영역 이전의 삶의 현상에 대한 설명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신(神)의 창조 또는 전생의 업(業)에 의한 결정 등 삼종외도(三種外道)의 극복을 위한 불교의 구체적 대응이 바로 이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또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유식(唯識)의 삶에 대한 이해도 깊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니까야 즉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은 이들과도 차별됩니다. 무의식이라거나 제칠 말라식 또는 제팔 아뢰야식으로 이름 붙여진 입체적 구조의 마음 이해에 비해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하는 삶의 주체로서의 마음의 전개와 삶의 질의 측면에서 함께하는 상(想)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는 입체적으로 자리 매겨지는 무의식이라거나 말라식 또는 아뢰야식이라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 자리에는 마음 아닌 것 즉 삶의 과정이 잠재되고 누적되어 경향으로 작용하는 상(想)이 있어서 번뇌라는 이름으로 삶에 참여할 뿐입니다. 그 경향의 질적 수준에 따라 삶의 질이 결정되기 때문에 불교적 삶의 완성 즉 수행은 번뇌의 부숨 즉 누진(漏盡)으로 제시되는데, 상(想)의 병듦을 치유하여 중생으로의 경향을 청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기신론(起信論)도 큰 영향력을 가지고 불교 안에 자리합니다. 그러나 니까야의 가르침은 기신론과도 차별됩니다. 생겨나지 않은 것으로의 심(心)을 중심에 두고 생멸(生滅)의 삶과 진여(眞如)의 삶을 제시하지만 takka에 대한 이런 이해는 심(心)이 생겨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무아(無我)의 선언 위에서 설해진 부처님 가르침 안에서 생겨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만약 어떤 것이든 생겨나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면 불교는 완전한 깨달음에 의한 완전한 가르침이란 지위를 포기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마음에 대해서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럴 때 단지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기신론을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 무아라면,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이 확보되어야 비로소 기신론의 주장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takka는 바로 여기에도 답을 주는 것입니다. 바로 「심행(心行)=상(想)-수(受)」 즉 심(心)의 형성 작용입니다. 

  

• 「심행(心行)=상(想)-수(受)」 → 「상(想)과 수(受)의 과정이 심(心)을 형성하는 작용임.」


그런데 이렇게 부처님 가르침의 중심에 있는 「심행(心行)=상(想)-수(受)」라는 설명이 붓다고사 스님 이래 천육백 년 동안 불교 안에서 감춰져 왔습니다. 붓다고사 스님에 의해 ‘심(心)의 작용이 상(想)과 수(受)’라고 잘못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붓다고사 스님의 오류를 지적하고 불교를 붓다고사 스님 이전으로 되돌린 것입니다.


다시 사람들은 붓다고사 스님의 해석은 아비담마 논장(論藏)에 연결된 해석이므로 붓다고사 스님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아비담마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문제 이외에도 아비담마 논장의 가르침이 ‘경(經)과 율(律)의 범위에서 교리적 충돌이 배제되는 가장 좁은 영역의 공부’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아비담마 논장을 공부의 기준에 포함하지 않습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아직 역사가 일천한 우리 공부가 교단의 울타리를 벗어나 홀로서기를 선택할 때에는 그만한 공부의 자신감에 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신감은 바로 법우님들께서 지적하신 바 vijānāti와 takka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런 지적에 대해 아쉬움과 미안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공부가 아직 완성되지 못한, 그래서 더 높은 완성의 상태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적-물적 조건의 미비로 인해 공부 능력의 차별에 맞춰 적절히 배분된 법회를 아직은 진행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기다려 주셔야 합니다. 아직 소수의 인원으로 부처님 가르침의 진정(眞正)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의 과정입니다. 오히려 더 많은 관심과 사랑으로 지켜보고 성원하여 이 공부가 무난히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도록 힘이 되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어줍지만 이런 몇 가지 말씀으로 교단을 떠나 홀로 서는 근본경전연구회 해피법당에 대한 많은 분들의 의혹을 해소하기 위한 변명으로 삼았습니다. 의혹과 질시보다는 관심과 성원으로 「불교(佛敎)를 부처님에게로 되돌리는 불사(佛事)」의 또 한 단계 발걸음을 응원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2018년 4월 11일


근본경전연구회 해피법당 비구 뿐냐디빠 해피 합장


변명의 말미에 소개한 그림교재는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4_02&wr_id=48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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