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서적출판 > 탐(貪)-진(嗔)-치(癡)

탐(貪)-진(嗔)-치(癡)

제6장 몸 [3] 몸의 역할

1 197 01.01 20:14

6장 몸 [3] 몸의 역할 


1. 몸의 역할 ㅡ ①경향 = 본능(?)


명(名)에 속하는 상(想)은 삶의 내면에서 작용하는 경향입니다. 삶의 과정에서 잠재하고, 누적된 뒤에 인식 과정에 참여하여 심(心)을 형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상(想)을 포함하는 명(名) 또는 명색(名色)은 죽으면 버려집니다. 식(識)과 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에서 식(識)만 ‘연기(緣起)된 식(識)’으로 다음 생으로 윤회하고 명색(名色)은 버려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삶의 과정에서 잠재와 누적이 행해지기 이전, 최초의 경향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몸이 여기에 대한 답을 줍니다. 몸이 가진 경향이 있어서 몸에 조건 지어진 식(識)의 삶에 경향의 틀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몸으로 태어나는지는 삶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부처님이 좋은 몸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유라고 할 것입니다. (SN 56.47-구멍이 있는 멍에 경1)과 (MN 129-우현(愚賢) 경)은 한 번 벌 받는 상태[악처(惡處)]로 간 어리석은 자가 인간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하는데,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여기에는 법다운 실천, 고른 실천, 유익한 행함, 공덕을 행함이 없다. 비구들이여, 여기는 서로 간에 먹는다. 약한 것을 먹는다.」라고 몸의 특성을 말합니다. 


또한, (AN 10.177-자눗소니 경)은 지옥-축생-인간-하늘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은 각각의 음식으로 거기서 삶을 유지하고 그곳에 머물고, 아귀 세상에 태어난 존재들은 아귀의 영역에 속한 중생들의 음식 혹은 친구나 동료나 친지와 혈육들이 여기서 이어 주는 것으로 거기서 삶을 유지하고, 그곳에 머문다고 합니다. 각각의 세상에 태어나면 각각의 몸에 따르는 삶을 유지하며 거기에 머무는 것인데, 각각의 몸에 따르는 삶 즉 각각의 몸이 가지는 경향에 묶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사람의 경향에 따르는 삶을 살고, 짐승으로 태어나면 짐승의 경향에 따르는 삶을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마도 모든 종류의 중생들이 태어나자마자 본능적으로 세상에 반응하는 것이 몸이 가진 경향의 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데, (AN 10.49-몸에 쌓여있는 것 경)은 몸에 내재된 것/몸에 본유(本有)된 것으로 차가움, 뜨거움, 배고픔, 목마름, 똥, 오줌, 몸의 단속, 말의 단속, 생활의 단속, 다시 존재로 이끄는 존재의 형성작용의 열 가지를 제시합니다.


2. 몸의 역할 ㅡ ②행위 ㅡ kāya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신행(身行)을 행하다. 


형성작용을 말하는 행(行-saṅkhāra)은 두 가지 경우로 사용됩니다. 몸과 말과 심(心)을 형성하는 작용으로의 kāyasaṅkhāra-vacīsaṅkhāra -cittasaṅkhāra와 고(苦)와 락(樂)의 과(果)를 형성하는 것으로의 몸과 말과 의(意)의 행위를 말하는 kāyasaṅkhāra-vacīsaṅkhāra–manosaṅkhāra입니다. 경들은 이 두 가지 경우를 엄격히 구분해서 나타냅니다. 몸과 말과 의(意)의 행위를 말할 때는 saṅkhāra의 목적격을 취하여 abhisaṅkharoti와 함께 나타내는 것입니다. ㅡ 「kāya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신행(身行)을 행하다)-vacī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구행(口行)을 행하다)-mano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의행(意行)을 행하다)」


경의 용례에 의하면, 모든 경우에 saṅkhāra가 신(身)-구(口)-심(心)의 짝으로 나타날 때는 kāyasaṅkhāra-vacīsaṅkhāra-cittasaṅkhāra의 형태를, 신(身)-구(口)-의(意)의 짝으로 나타날 때는 kāya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vacī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mano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의 형태를 취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뒤의 경우는 네 가지 업(業)을 설하는 경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용례는 두 개의 경을 통해 연결됩니다. 신행(身行)-구행(口行)-심행(心行)에 의해서 생긴 신(身)-구(口)-심(心)→의(意)가 있을 때 신행(身行)-구행(口行)-의행(意行)을 행해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결과 맺고, 신행(身行)-구행(口行)-심행(心行)의 조건인 무명(無明)이 소멸하면 신(身)-구(口)-심(心)→의(意)가 없어서 신(身)-구(口)-의(意)의 행위를 통해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결과 맺지 않는다는 설명입니다.


(SN 12.25-부미자 경)과 (AN 4.171-의도 경)은 「아난다여, 몸이 있을 때 몸의 의도를 원인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말이 있을 때 말의 의도를 원인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의(意)가 있을 때 의(意)의 의도를 원인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아난다여, 그것을 조건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신행(身行)을 스스로 짓는다. 또는, 아난다여, 그것을 조건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신행(身行)을 남들이 짓는다. 아난다여, 그것을 조건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신행(身行)을 옳고 그름을 판단하면서 짓는다. 또는, 아난다여, 그것을 조건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신행(身行)을 옳고 그름의 판단 없이 짓는다.(구행(口行)-의행(意行)에 반복) 아난다여, 이 법들에 대해 무명(無明)이 따라간다. 그러나 아난다여, 무명(無明)의 남김없이 바랜 소멸로부터 그것을 조건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몸이 없게 된다. 그것을 조건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말이 없게 된다. 그것을 조건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의(意)가 없게 된다. 그것을 조건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장소가 없게 된다. 그것을 조건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현장이 없게 된다. 그것을 조건으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이유가 없게 된다.」라고 합니다.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는 행(行)에 의해 신(身)-구(口)-심(心)이 생기면 신(身)-구(口)-의(意)로 행위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의 과(果)를 형성하는데, 무명(無明)을 조건으로 하는 행(行)이기 때문에 무명(無明)이 따라가고, 무명(無明)이 소멸하면 그 이유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때 의도[사(思)-cetanā]는 넓은 의미로는 행위 즉 행(行) 또는 업(業)입니다. 그러나 좁은 의미로는 행위 중 일부 즉 「떠오름 → [의도 → 기대 → 지향] → 사유 → 몸과 말의 행위」의 진행 과정의 일부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특히, 「의도(意圖)가 업(業)이라고 나는 말한다. 의도한 뒤에[의도하면서] 몸에 의해, 말에 의해, 의(意)에 의해 업(業)을 짓는다.」라고 말하는 (AN 6.63-꿰뚫음 경)은 주목해야 합니다.


3. 몸의 역할 ㅡ ③인식


몸의 세 번째 역할은 인식작용에의 참여입니다. 존재하는 것들은 물질과 물질 아닌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인식의 측면에서, 물질의 인식은 몸이라는 접점을 필요로 하고, 물질 아닌 것은 몸의 접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몸은 물질을 인식하기 위한 접점의 역할을 합니다. 대상인 물질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으로 구분되고, 대상에 대한 접점으로의 몸은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으로 배분됩니다.


이때, 몸 즉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 다섯 가지 기능[오근(五根)]을 접점으로 대상을 직접 인식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두 개의 경은 식(識)에 대해 정의합니다. (SN 22.79-삼켜버림 경)은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을 식(識)이라고 말하는가? 인식(認識)한다[분별(分別)해서 안다]고 해서 식(識)이라 한다.」라고 하여 식(識)의 성질을 정의하고, (SN 22.56-집착의 양상 경)은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식(識)인가? 비구들이여, 여섯 가지 식(識)의 무리가 있나니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이다.」라고 하여 식(識)의 구성을 정의합니다.

 

그렇다면 식(識)의 배분도 감안하여 안식(眼識)이 안근(眼根)을 접점으로 색(色)을 인식하고, 이식(耳識)이 이근(耳根)을 접점으로 성(聲)을 인식하고, 비식(鼻識)이 비근(鼻根)을 접점으로 향(香)을 인식하고, 설식(舌識)이 설근(舌根)을 접점으로 미(味)를 인식하고, 신식(身識)이 신근(身根)을 접점으로 촉(觸)을 인식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아있는 물질 아닌 것으로의 대상은 법(法)인데, 의식(意識)이 몸의 접점 없이 인식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의식(意識)과 법(法)의 인식에도 몸 아닌 접점의 개념으로 의근(意根)을 말하는데, 의식(意識)이 직접 접점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 의식(意識)은 스스로 의근(意根)의 접점 역할을 통해 법(法)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이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근(意根)의 육근(六根)을 접점으로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의 육외입처(六外入處)를 인식하는 것이 삶의 표면에서 세상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는 인식작용입니다.


이때, 인식의 주관은 식(識)입니까, 근(根)입니까, 아니면 식(識)이 근(根)을 접점으로 함께한 것입니까? 물론 인식주관은 식(識)이 근(根)을 접점으로 함께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처(處) 또는 입(入) 또는 입처(處)라고 하는데, āyatana라는 하나의 단어에 대한 다른 번역입니다. 안식(眼識)과 안근(眼根)이 함께한 것은 안처(眼處)-안입(眼入)-안내입처(眼內入處)가 되는데, 일반적으로는 안(眼)이라고 불립니다. 마찬가지로 이식(耳識)과 이근(耳根)이 함께한 것은 이처(耳處)-이입(耳入)-이내입처(耳內入處)가 되는데, 일반적으로는 이(耳)라고 불립니다. 비식(鼻識)과 비근(鼻根)이 함께한 것은 비처(鼻處)-비입(鼻入)-비내입처(鼻內入處)이고, 일반적으로는 비(鼻)라고 불립니다. 설식(舌識)과 설근(舌根)이 함께한 것은 설처(舌處)-설입(舌入)-설내입처(舌內入處)이고, 일반적으로는 설(舌)이라고 불립니다. 신식(身識)과 신근(身根)이 함께한 것은 신처(身處)-신입(身入)-신내입처(身內入處)이고, 일반적으로는 신(身)이라고 불립니다. 의식(意識)과 의근(意根)이 함께한 것은 의처(意處)-의입(意入)-의내입처(意內入處)이고, 일반적으로는 의(意)라고 불립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안(眼)-이(耳)-비(鼻)-설(舌)-신(身)-의(意)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법(法) 육외입처(六外入處)의 인식작용이 설명됩니다.


그런데 의(意)에 대해서는 다른 이해도 필요합니다.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이것’에서 식(識)이든 심(心)이든 그 작용의 측면에서 몸과 함께할 때 의(意)라고 부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의(意)는 의내입처(意內入處)를 지시하는 것인지 아니면 식(識) 또는 심(心)이 몸과 함께 작용하는 때를 지시하는 것인지 구분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식(識)이 몸과 함께 작용하는 것으로의 의(意)는 이렇게 설명됩니다. ㅡ (SN 22.56-집착의 양상 경)에 의하면, 식(識)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의 무리인데, 의식(意識)이 스스로 의근(意根)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고려하면 식(識)은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근(意根)입니다. 그리고 이런 식(識)이 몸과 함께 작용하고 있을 때 의(意)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런 의(意)의 대표적인 용례로는 작의(作意-manasikāra)가 있는데, 의(意)의 작용 즉 식(識)이 근(根)을 접점으로 외입처(外入處)를 주목하여 인식하는 작용입니다.


식(識)-근(根)-처(處)와 의(意)에 대한 이런 이해 위에서 설명되는 몇 가지 표현이 있습니다.


1) 「imasmiñca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hā ca sabbanimittesu 식(識)과 함께한 이 몸과 밖의 모든 상(相)들에 대한」 ㅡ (MN 109-보름달 큰 경)/(SN 22.82-보름달 경)/(MN 112-여섯 가지 청정 경)/(SN 22.91-라훌라 경)/(SN 18.13-잠재성향 경)/(SN 22.71-라다 경)/(SN 22.124-깝빠 경)/(SN 22.92-라훌라 경2)/(SN 18.14-제거 경)/(SN 22.72-수라다 경)/(SN 22.125-깝빠 경2)/(AN 7.49-상(想) 경2)


‘식(識)과 함께한 이 몸’은 식(識) 즉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근(意根)과 함께한 몸 즉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이어서 육내입처(六內入處)를 설명합니다. 그리고 상(相-nimitta)은 탐(貪)-진(嗔)-치(癡)에 의한 육외입처(六外入處)의 왜곡 상태로 정의되므로 밖의 모든 상(相)들은  색상(色相)-성상(聲相)-향상(香相)-미상(味相)-촉상(觸相)-법상(法相)의 육상(六相)입니다. 인식 과정은 이런 방법으로도 설명되는 것입니다.


2) 「iti ayañceva kāyo bahiddhā ca nāmarūpaṃ, itthetaṃ dvayaṃ, dvayaṃ paṭicca phasso saḷevāyatanāni 이렇게 이 몸과 밖의 명색(名色)이 있다. 여기에 이 쌍(雙)이 있고, 쌍을 연(緣)하여 육촉처(六觸處)가 있다.」 ㅡ (SN 12.19-우현(愚賢) 경)


나는 식(識)과 명색(名色)인데, 명(名)의 정의[수(受)-상(想)-사(思)-촉(觸)-작의(作意)]에 의하면 오온(五蘊)과 촉(觸)-작의(作意)로 구분됩니다. 삶의 과정의 누적으로서 나의 몸통인 오온(五蘊)과 지금 삶의 현장에서 동력으로 작용하는 촉(觸)과 작의(作意)입니다. 그래서 식(識)과 명색(名色)인 나는 지금 삶의 현장에서는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의 대응구조를 구성합니다. 식(識)과 안의 색(色)인 몸에 의해 육내입처(六內入處)가 구성되고 밖의 색(色)인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이 대응하고 나면, 수(受)-상(想)-행(行)이 법(法)으로 대응합니다. 그래서 밖의 명색(名色)은 육외입처(六外入處)활성화의 촉-작의입니다.


이런 설명에 의하면, 식(識)의 입장에서 ‘이 몸과 밖의 명색(名色)이 있다.’라는 것은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의 쌍(雙)이 구성되고 활성화 즉 인식작용이 진행되면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 육식(六識)을 출산합니다. 그러므로 쌍(雙)을 연(緣)하여 육촉처(六觸處)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asmī’ti kho pana, bhikkhave, avigate pañcannaṃ indriyānaṃ avakkanti hoti — cakkhundriyassa sotindriyassa ghānindriyassa jivhindriyassa kāyindriyassa. atthi, bhikkhave, mano, atthi dhammā, atthi avijjādhātu. 그러면, 비구들이여, '나는 있다!'가 사라지지 않을 때 눈의 기능, 귀의 기능, 코의 기능, 혀의 기능, 몸의 기능이라는 다섯 가지 기능들의 참여가 있고, 비구들이여, 의(意)가 있고, 법(法)들이 있고, 무명(無明)의 요소가 있다.」 ㅡ samanupassanāsuttaṃ(SN 22.47-관찰 경)


이 경은 인식 과정에 지금 삶의 행위자인 심(心)의 참여를 함께 설명하는데, 무명(無明)의 요소인 욕탐(欲貪)입니다. 그 외에는 안근(眼根)-이근(耳根)-비근(鼻根)-설근(舌根)-신근(身根)의 참여라는 말로써 대응하는 색(色)-성(聲)-향(香)-미(味)-촉(觸)의 참여를 포괄한 뒤 의(意)와 법(法)의 대응으로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의 대응구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때 의(意)는 몸과 함께 작용하고 있는 식(識)이어서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근(意根)입니다.


4) 「imesaṃ kho, āvuso, pañcannaṃ indriyānaṃ nānāvisayānaṃ nānāgocarānaṃ, na aññamaññassa gocaravisayaṃ paccanubhontānaṃ, mano paṭisaraṇaṃ, mano ca nesaṃ gocaravisayaṃ paccanubhotī” 도반이여, 서로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지 않는, 다른 대상과 다른 영역을 가지는 다섯 가지 기능들에게 의(意)가 의지처이고, 오직 의(意)가 그것들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합니다.」


안근(眼根)과 색(色), 이근(耳根)과 성(聲), 비근(鼻根)과 향(香), 설근(舌根)과 미(味), 신근(身根)과 촉(觸)의 접점 관계를 포괄하여 육외입처(六外入處)를 인식하는 것은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의근(意根)인 의(意)입니다. 안근(眼根)과 색(色)은 안식(眼識)을, 이근(耳根)과 성(聲)은 이식(耳識)을, 비근(鼻根)과 향(香)은 비식(鼻識)을, 설근(舌根)과 미(味)는 설식(舌識)을, 신근(身根)과 촉(觸)은 신식(身識)을 그리고 법(法)은 의식(意識)과 의근(意根)을 의지하여 인식 과정이 진행됩니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기능들에게 의(意)가 의지처이고, 오직 의(意)가 그것들의 영역과 대상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런 용례들의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식(識)-근(根)-처(處)와 의(意)에 대한 이런 이해는 중요합니다. 그리고 이런 위에서라야 이어지는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 또는 육촉처(六觸處)에 대한 이해가 가능해집니다. 경은 촉(觸)을 내입처(內入處)-외입처(外入處)-출산된 식(識)의 삼사화합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가 따라주지 않으면 촉(觸)을 근(根)-경(境)-식(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경에 부합하지 않고, 삶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Comments

대원행 05.03 14:32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4&wr_id=6 참조 (삶의 메커니즘) 오온과 십이처 그리고 활성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