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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貪)-진(嗔)-치(癡)

[9] takka와 몸과 함께하는 영역의 상호 관계 ㅡ 「감성(感性)과 이성(理性)」

1 152 2023.07.16 17:46

【제2부 삶의 서술】


제1장 삶의 메커니즘과 탐(貪)-진(嗔)-치(癡)


[9] takka와 몸과 함께하는 영역의 상호 관계 ㅡ 「감성(感性)과 이성(理性)」


한편,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하는 영역으로의 takka[애(愛)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은 삶의 또 다른 주제에 대한 해석도 가능하게 해줍니다. 바로 감성(感性)과 이성(理性)의 문제입니다. 느낌 또는 감정(感情)과 연결된 개념들인데, 삶의 과정에서 발견되는 현상들입니다. 이 개념들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표준국어대사전>.


• 느낌 ㅡ 몸의 감각이나 마음으로 깨달아 아는 기운이나 감정.


• 감정(感情) ㅡ 어떤 현상이나 일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이나 느끼는 기분.


• 감성(感性) ㅡ (철학) 이성(理性)에 대응되는 개념으로, 외계의 대상을 오관(五官)으로 감각하고 지각하여 표상을 형성하는 인간의 인식 능력.


• 이성(理性) ㅡ 1. 개념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을 감각적 능력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별시켜 주는 인간의 본질적 특성.

2. (철학) 진위(眞僞), 선악(善惡)을 식별하여 바르게 판단하는 능력.

3. (철학) 절대자를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


느낌은 감정(感情)의 우리말인 것 같습니다. ‘느낌=감정(感情)’이고 십이연기(十二緣起)가 설명하는 수(受)[락(樂)-고(苦)-불고불락(不苦不樂)]입니다. 그리고 삶의 메커니즘적 접근으로 볼 때, 감성(感性)은 인식의 영역이고, 이성(理性)은 행위의 영역인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성(理性)은 감각적 능력을 상회하여 개념적으로 사유(思惟)하는 능력인데, 사유(思惟)는 saṅkappa(상깝빠)이고 의업(意業)에 속하는 생각 과정입니다. 의업(意業-manokamma)은 견해(diṭṭhi)와 생각의 떠오름(vitakka)에서 출발하고, 의도-기대-지향(cetanā-patthanā-paṇidhi)을 거처서 saṅkappa(사유)에 이릅니다. 팔정도(八正道)의 정견(正見)과 정사유(正思惟)의 영역입니다. 그렇다면 이성(理性)은 견해와 생각의 떠오름 이후 과정으로 진행되는 영역 즉 마음이 몸과 함께하는 영역에서의 행위를 지칭한다고 하겠습니다. 이때, 견해의 정사(正邪)에 따라 떠오른 생각과 사유의 과정에서 진위(眞僞), 선악(善惡)을 식별하고 판단하게 되며, 무아(無我)의 정견(正見)을 갖추었는지의 여부에 따라 절대자의 인식 여부도 뒤따른다고 하겠습니다.


감성(感性)은 감각과 지각의 과정으로 설명되는 인식 능력입니다. 그런데 삶의 메커니즘적 이해에 의하면, 인식은 두 단계로 진행됩니다. 상(相-nimitta)을 대상으로 식(識)과 수(受)가 생겨나는 1차 인식과 심상(心相-cittassa nimitta)을 대상으로 심(心)이 생겨나는 2차 인식입니다. 몸과 함께하는 영역에서 식(識)과 수(受)가 생겨나면, 식(識)이 인식주관이 되어 몸의 참여 없이 수(受)를 인식하여 심(心)을 생겨나게 하는 과정입니다. 이렇게 생겨난 심(心)은 심상(心相)인 수(受)를 ‘기뻐하고 드러내고 묶여 머묾’의 과정으로 소망(所望)을 생겨나게 해서 애(愛)가 되는데, 이 과정은 몸의 참여 없는 심(心) 혼자의 행위과정입니다. 


이렇게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하는 영역은 식(識)이 수(受)[심상(心相)]를 인식하여 심(心)을 생겨나게 하는 2차 인식과 애(愛)를 생겨나게 하는 심(心)의 행위과정으로 구성됩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상(想)이 2차 인식의 공동주관으로 참여합니다. 중생에게는 병들어 있고, 번뇌[루(漏)] 또는 잠재성향이라고 불리는 것이며, 삶의 질(質)을 결정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하였습니다. 즉 이 영역이 번뇌의 영향 위에 진행되면 중생의 삶이고, 번뇌의 영향에서 벗어나면 해탈된 삶이 진행되는 것입니다.


이성(理性)은 행위, 감성(感性)은 인식이라는 이해에 의하면, 감성(感性)은 1차 인식에서 세상을 만나고, 2차 인식에서 세상에 대한 느낌[감정(感情)]을 가공하여 지금 삶의 행위자인 심(心)을 생겨나게 하는 과정이고, 이성(理性)은 생겨난 심(心)이 2차 인식의 대상인 수(受)[심상(心相)]를 대상으로 애(愛)를 생겨나게 하는 과정과 그 이후의 몸과 함께한 행위과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는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하는 영역에 대한 앎이 없이 인식과 행위를 설명하는 방법에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하는 영역을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불교(佛敎)는 인식(認識)인 감성(感性)과 행위(行爲)인 이성(理性)으로의 일반적 또는 철학적 이해 위에서 takka[애(愛)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 즉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하는 영역을 설명함으로써 삶의 심오함의 끝을 드러내 줍니다. 인식을 구성하는 두 과정 중 뒷부분과 행위를 구성하는 두 과정 중 앞부분이어서 몸과 함께하는 영역에서의 인식을 가공하여 행위에 연결하는 중간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 또는 철학적 이해 위에서 삶은 인식(認識)인 감성(感性)과 행위(行爲)인 이성(理性)으로 구분되지만, 불교(佛敎)는 ①인식의 뒷부분과 행위의 앞부분을 묶은 takka[애(愛)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 즉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하는 영역과 ②행위의 뒷부분 그리고 관심에 의해 연결되는 인식의 앞부분을 묶은 몸과 함께하는 영역으로 삶을 다르게 구분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불교적으로는, ①의 영역을 감성(感性)의 영역, ②의 영역을 이성(理性)의 영역이라고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삶은 ①감성(感性)의 영역에서의 가공 결과가 ②이성(理性)의 영역에서의 행위와 인식의 질을 결정합니다. 다시 말하면,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하는 영역이 몸과 함께하는 영역에서의 삶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딱까(takka)의 안과 밖[이성(사유)과 감성(경향)].jpg

그렇다고 해서 이 지배 관계가 절대적인 것은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번뇌의 영향 위에 있는[유위(有爲)] 중생들에게 삶은 번뇌의 영향의 누적을 통해 점점 더 퇴보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이 지배 관계는 역전될 수 있습니다. 이 지배 관계의 역전을 위한 바른 방법을 찾아 바르게 실천하면 몸과 함께하는 영역에서의 시도가 몸의 참여 없는 영역을 제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제어 위에서 몸의 참여 없는 영역 안으로 들어가 직접 문제를 해소하는 시도를 할 수 있는데, 「염오(厭惡) → 이탐(離貪) → 소멸(掃滅)」의 과정입니다. 그 과정은 몸의 참여 없는 영역에 참여하는 상(想)의 치유 즉 번뇌의 부서짐[누진(漏盡)] 또는 잠재성향의 뿌리뽑힘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해탈(解脫)된 삶의 실현이고, 이 가공의 과정은 애(愛)를 생겨나게 하지 않아서 삶의 모든 문제가 소멸합니다[고멸(苦滅)]. 

 

그렇다면 그 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팔정도(八正道)이고, 그 실천 즉 중도(中道)를 통해서 완성됩니다. 정념(正念)[바른 사띠=사념처(四念處)]에 의해서 몸과 함께하는 행위의 현재를 발견하고 제어함으로써 신구의(身口意)의 업(業)이 괴로움을 만들지 못하게 하고, 인식으로 순환하여 1차 인식의 공동주관이 되어 식(識)의 왜곡을 제어합니다. 그리고 제어된 식(識)은 2차 인식의 주관이 되고, 상응하는 상(想)의 공동주관으로의 참여로써 수(受)를 인식하게 됨으로써 몸의 참여 없이 작용하는 영역을 제어하게 됩니다. 이 지배 관계의 역전이고, 이것이 사띠[염(念-sati)]의 의미입니다. 행위의 발견을 통해 제어하는 것으로의 사띠의 자리는 세 곳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①신구의(身口意)의 행위를 발견-제어하는 곳과, ②행위를 싣고 1차 인식의 공동주관으로 참여하는 관심[욕탐(欲貪)]을 발견-제어하는 곳 그리고 ③takka[애(愛)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 안의 행위인 ‘기뻐하고 드러내고 묶여 머묾’을 발견-제어하는 곳입니다. 특히, 이 세 곳은 「①계(戒) → ②사념처(四念處) → ③염오(厭惡)」의 순차적 전개를 말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③염오(厭惡)의 완성은 사띠의 완성입니다. 이렇게 완성된 사띠는 사띠토대(satiāyatana)라고 불립니다. 육신통(六神通)의 실현을 위한 토대가 되고, 사마타-위빳사나의 완성을 위한 토대가 되는데, 깨달음을 위한 최후이고 직접적인 토대입니다.


살다가 만나지는 어떤 상황에 대해 우리는 감성적으로 대응하기도 하고 또는 이성적으로 대응하기도 합니다. 때로 감정적 대응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해에 의하면, 감정적 대응이란 표현은 옳지 않고, 감성적 대응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감성적 대응이란 번뇌 즉 삶의 과정에서 쌓은 경향의 영향이 제어되지 않은 채 사실에 괴리(乖離)된 행위를 유발하는 경우[→ 고(苦)]라고 할 것이고, 이성적 대응이란 사띠의 작용 하에 사유를 제어하여 사실에 부합(符合)한 행위를 유발하는 경우[→고멸(苦滅)]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이성적 대응이 향상하고 완성되면 감성적 대응의 영역에서도 번뇌 없는 대응이 되어 별도의 제어 과정 없이도 사실에 부합(符合)한 행위를 유발하게 되어 고멸(苦滅)의 삶을 살게 되는데, 해탈(解脫)된 아라한(阿羅漢)의 삶입니다.


• 감성적(感性的) 1. (관형사·명사) 감성을 위주로 하거나 감성에 관한. 또는 그런 것. 2. (관형사·명사) 감성이 예민하여 자극을 잘 받는. 또는 그런 것.


• 이성적(理性的) (관형사·명사) 이성에 따르거나 이성에 근거한. 또는 그런 것. <표준국어대사전>

 

Comments

대원행 2023.07.16 22:58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09&wr_id=51 참조 (해피스님과의 대화(서울 230708) ― 사띠는 무엇인가 & 노자와 부처의 무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