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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取)에 대해 배우고 생각하며 3

고요2 0 251 2018.09.29 07:34

이곤이는 계율과 의례의식에 집착하는 것(계금취戒禁取)에 대해 예를 들어보았습니다. 불교신자가 길에 불상이 있는 것을 보고 무심히 지나쳤다가 ‘아차, 내가 불상에 예배하지 않았구나.’하면서 후회하고 침울해하면 이것도 계금취에 속하고, 남녀 간에 직접 손을 잡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키는 사람이 개울을 건너다가 미끄러져 넘어진 여인을 보고 ‘내가 지키는 규칙에 어긋난다.’하면서 할 수 있는데도 손으로 잡아주지 않아(맹자, 이루장구상, 제17장 응용) 여인이 물에 떠내려가 죽었다면 이것도 계금취에 속하고, 신하라면 임금 앞에서는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고 하여 폭군 앞에서 그만 두라고 하는데도 쉬지 않고 간언하여 폭군이 분노하여 자신도 목숨을 잃고 가족도 목숨을 잃고 친지 친구도 목숨을 잃는다면 이것도 계금취라고 생각했습니다.


계금취의 예는 또 있었습니다. 제사 지낼 때 시간은 언제 하고 음식은 어떻게 배열하고 혼백을 부를 때 흙은 어떻게 준비하고 향은 어떻게 피우고 술잔은 어떻게 돌리고 절은 어떻게 하라는 것은 전통이므로 시대에 맞게 뺄 것은 빼고 더할 것은 더하여 알맞게 하면 되는데, 누가 그 전통과 다르게 했다 하여 화를 내고 미워하고 큰 소리로 욕한다면 이것은 의례의식에 집착한 계금취라고 생각했습니다. 산에서 고사를 지내거나 비가 오라고 기우제를 지낼 때 전통을 시대에 맞게 적절하게 조절하면 되는데, 전통과 다르게 했다하여 미움과 분노를 일으키고 소리 내어 욕설을 한다면 이것도 계금취에 속할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사 갈 때 이 방향은 안 된다, 집을 지을 때 이 방향에 화장실을 만들지 말라 는 말에 집착하는 것도 계금취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돼지를 잡는 등 동물을 죽이는 행위도 계금취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자의 말씀을 배운 사람이라면 자기를 위해 동물을 죽여 대접하면 먹지 않는 데, 하물며 인간보다 더 훌륭하고 거룩한 천상의 신(神)들이 동물을 죽여 제사를 지내는 것을 받을 이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덧 세월이 많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이곤이는 욕취, 견취, 계금취를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고, 이제는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我語取)’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곤이는 ‘자아’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여러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누구는 ‘나 자신’이 자아와 같은 말이라고 했고(나=자아), 누구는 ‘몸이 죽어도 죽지 않은 영혼’이 자아라고 했고(영혼=자아), 누구는 M38에 나오는 ‘말하고 느끼고 여기저기 선행과 악행의 결과를 체험하는 (신(神)적인 성격의) 식(識)’을 자아라고 했고(업을 짓고 과보를 받는 식(識)=자아), 또 누구는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의식이나 관념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했습니다(나의 나=자아). 이렇게 사람들이 들려준 말을 참고하여 이곤이는 ‘자아’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계속해서 생각했습니다. 

 

나라에서는 새 임금님이 왕위에 오르셨습니다. 그러나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났어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했고 세종은 아버지의 그늘에 가려 숨죽이며 지냈습니다, 마치 국왕의 자격이 없는 것처럼. 태종이 승하하자 또 3년을 우유부단하고 무기력하게 보이듯이 조용히 보냈습니다. 아마도 아버지의 방침을 고치지 않는 것이 효도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子曰 父在에 觀其志요 父沒에 觀其行이니 三年을 無改於父之道라야 可謂孝矣니라 : 논어, 학이 11장) 그러다가 세종 4년부터 세종은 장인 심혼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을 밝히고 신원을 회복하게 했고, 김도련이 132명의 노비를 17명의 권력자들에게 뇌물로 준 사건이 일어났는데 세종 8년에 사헌부에서 조사하여 태종의 구신(舊臣)들을 모두 몰아내고 세종 자신의 세력으로 조정을 채우게 했습니다. 그리고 세종 9년에 황희가 좌의정, 맹사성이 우의정이 되면서부터 세종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세종은 능력이 뛰어나고 총명했으며, 성실하고 솔선수범했고, 정책의 추진력이 있었고, 온화하고 부드러웠으며, 포용력으로 신분에 관계없이 인재를 폭넓게 등용하여 적재적소에서 활용했습니다. 국방에는 최윤덕이 4군을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고, 재상에는 황희 허조 맹사성이 활약했고, 학자로는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등이 있었고, 음악에는 박연, 과학에는 이천 장영실이 활약했습니다. 인재양성을 위해 집현전을 설치했고, 연구 기관이라 승진이 잘 안 되는 점을 고려하여 유급으로 사가독서(賜暇讀書) 제도를 운영하여 집이나 절에서 책을 읽으며 재충전의 기회를 삼도록 했습니다. (이것이 성종 대에는 아예 독서당을 만들어서 했고, 중종 대에는 동호독서당을 지었는데, 동호문답은 율곡이 동호독서당에서 사가독서할 때 지은 것이라고 함)
세종 대는 건국 후 30여 년이 지난 시기였으므로 자주, 민본, 실용이 시대정신이었고, 세종은 이 시대적 과제를 훌륭히 해냈습니다. 창제과정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했으며, 우리 실정에 맞는 농서인 농사직설, 의학서인 향약집성방, 우리나라 고유의 달력인 칠정산 내외편을 펴냈습니다. 또, 세종은 세법을 정할 때 백성들에게 찬반 여부를 물었고, 노비에게 100일 간의 출산 휴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건강이 좋지 않으셨습니다. 몸이 아프고 다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하고 당뇨병을 앓은 지 13년이 되었고, 방광염이 있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시대에 해결할 과제를 명확히 인식하시고 그런 과제들을 정신력으로 완성하신 세종대왕. 그래서 우리는 세종대왕을 배출했다는 우리의 역사와 토양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kbs 역사저널 그날, ebs 이야기 한국사 등을 보고)

 

이제 이곤이는 노년에 이르렀고, ‘나’와 ‘자아’는 어떻게 다를까? 하는 의문은 사라졌습니다. 그냥 문맥에 따라 나라고 쓰거나 자아라고 쓰면 될 일이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 대한 발생이나 변화나 소멸에 관련된 사유를 하면 그때 자아에 대한 사유라고 하면 되었습니다. 자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나 자신에 대해 의식하고 사유하고 추론하고 어떤 견해를 가질 때 그때 ‘자아’라는 용어로 접근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노년이 깊어가자 이곤이는 자신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걱정과 두려움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관심사가 아니고 ‘죽으면 나는 어떻게 될까?’ 하는 자기 자신으로 관심이 옮겨갔습니다. 죽으면 나는 없어진다거나 죽어도 나는 계속 살아있다는, 나 자신(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는 것이 자아의 교리에 대한 견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아의 교리를 그냥 자아의 교리라고 보지 않고, 그 견해를 집착하여 가지면 그것이 자아의 교리에 대한 집착(我語取)이라고 이해했습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두려울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이 사람의 무리에서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공포가 밀려올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죽어도 내 자신은 또 태어난다는 견해를 붙잡거나 죽으면 이제 다 끝나니 더 이상 두려워하지 말자면서 스스로를 달래기도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곤이는 ‘중생은 윤회한다’는 바른 견해만 가지자고 다짐했습니다. 악업을 계속해서 행하면 나쁜 세계에 태어나고 선업을 계속하면 좋은 세상에 태어난다는 바른 견해만 가지도록 노력하자고 다짐했습니다.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과 바른 견해에 집착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는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곤이는 ‘취 → 유 → 생 → 노사’의 뜻을 계속 생각하다가 목숨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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