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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 조금 필기 1

고요2 0 241 2018.10.13 07:10

김현수는 대학 1년생입니다. 철학개론 과목을 수강했는데 철학 교수님이 리포트를 내주셨습니다. 제목은 ‘사람들은 무엇을 자기 존재라고 하는가?’라는 주제로 A4 용지 4쪽 분량(글자크기는 12)으로 일주일 내로 작성해서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김현수는 교수님이 추천해주신 도서를 도서관에서 빌리고 또 인터넷으로도 검색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등의 비슷한 주제가 많이 검색되었습니다. 동영상도 많이 있었습니다. 김현수는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들었는데, ○○스님이 십이연기 특강으로 법문하시는 내용 중의 일부분이었습니다. 김현수는 법문의 내용을 조금 요약했습니다. (아래부터는 그 내용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나>라고 하는 것일까요? 나는 누구인가요? 사람들은 무엇을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가요? 우리는 몸과 마음을 나라고 하지요. 우리의 삶은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면 어떤 일이 생겨나나요? 인식을 합니다.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코로 냄새 맡거나 혀로 맛보거나 몸으로 감촉하거나 마노(意)로 법(法)을 인식합니다.  (참고로 세상은 있습니다. 어떻게 있나요? 조건에 의해 무상, 고, 무아의 방식으로 있습니다. 첫째는 색성향미촉이라는 물질으로 있습니다. 둘째로 이 물질적인 세상을 내가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 질적인 차이가 나는 세상으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누구는 지옥처럼 살고 누구는 천상처럼 삽니다. 즉 세상이 물질적으로 있고 없고는 별개로 치더라도 내가 어떤 수준의 삶을 사느냐에 따라 세상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둘째로 세상은 안이비설신의-색성향미촉법이라고도 하겠습니다.)


나는 몸과 마음이 함께 하지요. 이것을 나타내주는 교리 용어가 유신(有身)-삭까야sakkāya입니다. 삭까야는 몸이 있는 상태로, 마음이 몸이 있는 상태로 있는 것이지요. 마음만 있고 몸이 없는 그런 것은 아니지요. (참고로 유신견은 유신에 대한 잘못된 견해로서, 몸과 마음이 함께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중생으로의 견해인데, 자기 존재에 대한 잘못된 견해를 말합니다.) 자기 자신은 기본적으로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이것을 좀 더 확장하여 개념을 보면, 세상을 살아갈 때 생겨난 것까지도 자기 존재로 합니다. 즉,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 삶의 과정을 통해서 생겨나서 쌓이는 것이 있습니다. 중생이라는 삶의 과정에서 생겨나서 쌓이는 것이 있지요. 이전에 살아오면서 쌓인 것도 있고 지금 살아가면서 생겨나서 쌓이는 것도 있습니다. 수, 상, 행 등이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수(受)는 느낌(경험)을 말합니다.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감촉하거나 법을 인식할 때, 우리는 각각을 아는 것(식별)으로 끝나지 않고 즐겁든지 괴롭든지 무덤덤하든지 어떤 느낌이 경험됩니다(낙, 고, 불고불락). 이렇게 감각기관으로 대상을 분별하여 알 때, 즐겁거나 괴롭거나 무덤덤하거나 하는 느낌으로 경험되는 이 부분을 수(受)라고 합니다.

 

 

그런데 삶의 과정에서 즐거운 것을 느끼면 ‘이 즐거운 느낌은 지속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붙잡아야지’하게 되는데, 이런 내적인 경향을 상(想)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누가 김철수를 보면 어떤 사람들은 좋아하고 예쁘게 보고, 어떤 사람들은 싫어하고 나쁘게 보며, 길가는 사람들은 무덤덤하게 보고 지나갈 수도 있습니다. 착한 마음의 경향이 쌓여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볼 때 ‘행복하셔요’하는 경향으로 보고, 나쁜 마음의 경향을 쌓은 사람은 ‘네 잘 되는 모습은 못 봐’ 하는 경향으로 볼 것입니다. 이렇게 삶의 과정에서 쌓아있는 경향이 상(想)입니다.

 

 

이런 경향이 수(느낌, 경험)에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이제 나는 몸과 말과 마노로 행위를 합니다. 이 행위를 행(行)이라고 합니다. 무명 위에서 색, 수, 상, 행, 식을 계속해서 형성해 나갑니다. 그런데 행위 자체가 쌓입니다. 이런 행위를 했다, 저런 행위를 했다는 행위는 쌓입니다. 한번 행위하고 나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쌓입니다. 행(行)이라는 형성작용은 쌓입니다. 물론 `수도 쌓이고 상도 쌓이고 행도 쌓입니다.

그리고 이 행에 의해 한면으로는 상이 잠재하고 한면으로는 식이 머뭅니다. (잠재해서 쌓여 있는 것이 경향으로 작용하는 것이 상(想)이고, 식(識)이라는 마음이 욕계 색계 무새계에 머물러 쌓이는 것이 식(識)입니다.

 

 

잠깐 되짚어볼까요? 이전의 삶의 과정이 쌓여 누적된 몸과 마음으로 구성된 내(有身)가 (몸은 색色, 마음은 식識), 지금을 살기 때문에 삶의 과정에서 생겨나서 쌓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색, 식) ‘수, 상, 행’이었습니다. (색은 한면으로는 몸, 한면으로는 물질(세상)). 유신을 구성하는 물질로서의 색도 쌓여있는 것이고, 수상행식도 쌓여있어서 ‘온(蘊)이라고 하고, 다섯 개라서 오온(五蘊)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몸과 마음까지 합해서 삶의 과정을 통해서 쌓여 있는 것이 오온이 되었습니다.

 

 

이 오온에 대해서 ‘유신이 오취온이다’고 정의를 해주시므로, 자기 자신은 = 유신이고 유신은 = 오취온입니다. 그럼 오취온이 무엇인가요? 마음이 몸과 함게 있으면서 세상을 살다보니 색수상행식이 쌓여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중생은 쌓여있는 이런 색에 대해서도 나라고 붙잡고, 수에 대해서도 나라고 붙잡고 상에 대해서도 나라고 붙잡고 행에 대해서도 나라고 붙잡고 식에 대해서도 나라고 붙잡아 버립니다. 그래서 색수상행식을 나의 것이라고도 하고 나라고도 하고 나의 자아라고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유신은 오취온이다.’는 말의 뜻입니다. 쌓여있는 오온에 대해 ‘나의 것이다, 나다, 나의 자아다’라고 붙잡아서 오취온이라는 상태가 되어버리면, 스스로 오온에 집착했다는 상태가 되고 스스로가 내가 되어서,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등으로 견해를 일으키고 불안해합니다. 붙잡아서 내(아뜨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오취온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오온이란 그냥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면서 수, 상, 행을 쌓아 가는 것을 말하고, 오취온이란 이런 오온을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붙잡는 것을 말합니다. 오취온은 내(아뜨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여기서 개념 하나를 보겠습니다. 오온을 붙잡아서 내가 되어 버리는 것을 자기화라고 합니다. 중생은 번뇌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괴로움을 만드는데, 깨달음을 정의하는 한 가지 방법이 자기화를 해소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자기화의 해소는 붙잡는 일을 안 하면 됩니다, 오취온에서 붙잡는 일을 안 하면 자기화가 되지 않습니다. 자기화하지 않으면 살아가면서 아파해야 하는 자기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설명은 한 단계를 더 가는데, 어떻게 설명될까요? 오취온은 색, 수, 상, 행, 식이 쌓여 있는 것입니다, 지난 삶의 과정이 쌓인(누적된) 것이지요. 여기서 누적된 삶, 삶이 누적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정적인 것이 되는데, 십이연기는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지금 만나고 있는 이야기이므로 지금의 삶도 설명해야 하겠습니다. 어쨌든 자신이 세상을 만나는 것인데, 지난 삶이 누적된 그것이 스스로 자기화가 되어 지금을 산다는 것인데, 지금을 산다는 개념이 이제 아주 중요한 대목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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