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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는 ... 조금 필기 2

고요2 0 254 2018.10.13 07:14

의도에 속하는 업을 짓고 쌓는 것은, 중생들이 번뇌의 영향을 받아 지은 유위적인 업이기 때문에 경험하지 않고는 소멸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즉 누적된 삶이 지금 나의 몸통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현재진행형입니다. 누적된 것 위에 현재 나의 의도와 행위가 진행되는 것입니다. 비록 누적된 것이 가지는 힘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당장 해탈된 삶을 살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그렇게 되지는 않습니다만. 내면에서 누적된 것들이 계속 작용해서 번뇌를 계속해서 일으켜주니까 안 되는 것이지만, 문제는 내면에서 작용하는 이런 수(受)와 상(想)과 행(行)의 내적인 작용들이 그동안 누적되어 중생의 경향으로 누적되어서 해탈로 바로 못가지만, 한 순간 이전까지는 어떻게 살았든 간에, 지금 내가 해탈된 삶을 살면 과거의 모든 것이 끝장난다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현재진형행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바로 지금 마음먹었다고 해서 해탈 열반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가 수행을 하는 것이지요. ‘믿음, 정진, 사띠, 사마디, 빤냐’의 기능의 도움을 받아서 수행해야 하지요. 그래서 수행은 중생의 번뇌의 경향을 부수는 것입니다. 누적된 삶, 누적된 중생의 성향들을 수행을 통해 부수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적된 삶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것을 부수었기 때문에, 그것이 붙잡는 것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해탈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당장은 해탈 열반이 안 되겠지만, 해탈 열반할 때까지는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현재진행형이라는 말의 뜻을 조금 더 보겠습니다. 현재 이 순간의 삶은 마음이 몸을 접점으로 하여 대상에 주목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대상에 주목하는 것을 작의(作意)라고 합니다. 지난주에 한번 만난 ○ 법우님을 오늘 다시 만났는데, 저의 마음이 눈을 통해서 : ‘눈(眼)’ + ‘○ 법우님(色)’ → ‘안과 색을 조건으로 ○ 법우님이라고 아는 식(識)’인 <안식(眼識)>이라는 새로운 마음이 생겨났습니다(지금 누구라고 알았습니다). 이것은 한 순간이라도 과거의 것이 아니고 지금 보고 있는 ○ 법우님을 보는 것이지요. 이렇게 안과 색과 안식이 함께 한 것을 삼사화합촉이라고 합니다. 보는 자인 안과 보이는 자인 색과 여기서 생겨난 안식. 이 셋이 화합했다, 만났다, 같이 있다, 동시적이다 하여 이 현상을 촉(觸)이라고 합니다. 이 촉을 조건으로 하여 수(受)가 있습니다. 눈으로 본 지금 만난 ○ 법우님을 즐거워하고 좋게 보는 느낌이 저에게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재를 사는 이야기에서는 눈으로 저기 색에 주목하는 작의(作意)가 있고, 작의해서 인식하여 삼사화합하는 촉(觸)도 있습니다. 촉하면 수(受)가 있고, 나머지는 죽 이어집니다. (작의해서 알고 촉해서 경험합니다.) 현재 삶은 작의와 촉을 설명하면 됩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아가는 나는, 누적된 삶으로의 자기 존재로 정적 상황으로만 정의되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지금을 사는 것이고 현재의 삶을 사는 것까지 포함해야 합니다. 지금 삶의 결과도 쌓입니다. 그래서 누적된 자기 존재는 작의와 촉이 더해져 현재를 살면서 쌓이고 증장하여 누적된 자기 존재의 상태를 계속 변화시킵니다.

 

김현수는 동영상 법문을 조금 더 필기했습니다. (아래는 그 내용입니다.)
우리는 ①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데, 이것을 유신(有身, 삭까야sakkāya)이라고 합니다. ②그런데 (마음이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 살아가는) 삶의 과정은 흔적을 남깁니다. 그 흔적이란 바로 ‘느낌(수受), 경향(상想), 행위(행行, 형성작용)’인데, 이들은 쌓이고 누적되며, 삶의 과정을 거치고 나면 경향(상想)은 잠재하고 식(識)이 머뭅니다. 이렇게 삶의 과정에서 각각의 흔적들이 쌓여서(수온, 몸과 마음과 함께 자신을 구성합니다(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 그래서 이제 자신은 몸과 마음 + 삶의 과정을 포함하는데, 이렇게 ‘몸과 마음 + 삶의 과정에서 쌓여 누적된 것’까지 포함한 자기 존재를 ‘오취온(五取蘊)’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여 유신(有身)이라는 나의 정의(마음은 혼자 있을 수 없고 몸과 함께 한다는)가 → 삶의 과정을 통해 쌓여 누적된 오취온으로 한 단계 나아갔습니다.

 

(지금부터 자기 존재를 <나>라고 부르겠습니다. <나>는 ㉠상락아정이라고 하는 아뜨만도 있고, ㉡태어나서 한 평생 살다가 늙어 죽는 자기 존재도 있는데, 여기서 <나>는 아뜨만이 아닌, 태어나서 늙어 죽는 무상고무아부정의 자기 존재를 말합니다.)

 

③‘나는 누구인가?’를 물을 때 <나>는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①몸과 마음이 유신이라는 <나>에서 → ②몸과 마음 + ‘삶의 과정이 포함되었다•쌓였다•지나간 업들이 쌓였다’는 오온에 집착한 오취온이라는 <나>에서 → ③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촉(觸), 작의(作意)가 더해진 식과 명색의 <나>입니다. 그래서 이제 <나>의 범위는 : 삶의 지난 과정이 쌓여 있는 누적된 삶(오취온)만이 나가 아니라, 지난 삶의 결과들이 누적된 것 • 누적된 삶이 스스로 내가 되어 → 지금을 살면서 • 지금을 산다는 이 하나의 사건을 통해 삶은 연장되고 있습니다. 즉 ‘누적된 삶’에 + ‘촉과 작의’가 더해져서 → 작의로 대상을 알고 촉으로 대상을 경험해서 → 새로 출산된 마음(식識)이 수(受)를 경험하면서 지금 삶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로 확장된 <나>는 ‘누적된 삶 + 지금의 삶인 촉과 작의가 더해진 <식과 명색>이라고 하겠습니다.

 

요약하면 <나>는 ①몸과 마음의 유신(有身)이고 → 나아가 ②지난 삶의 과정이 누적된 오취온(五取蘊)이고 → 더 나아가 ③누적된 삶 위에 + 촉과 작의를 통해 알고 경험하면서 지금을 살아가는 <식(識)과 명색(名色)>입니다.

 

김현수는 위 동영상 법문의 내용을 참고하여 철학 리포트를 작성하여 제출했습니다. 그리고 느낌(受)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철학에는 ‘존재, 실존, 인식(앎), 자아, 정신, 신(神) ...’ 등은 탐구하는 것 같았는데, 느낌은 잘 다루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김현수는 느낌이란 무엇일까? 하면서 책을 읽고 참고자료를 검색하면서 느낌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친구를 따라 불교 동아리를 갔더니, 모월 모일에 ○○ 스님이 ‘느낌이란 무엇인가?’를 주제로 법문을 하신다고 했습니다. 김현수는 그날을 오기를 잔뜩 기대하며 미리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국어사전에는 ‘몸의 감각이나 마음으로 느끼는 기운이나 감정’ 또는 ‘어떤 대상이나 상태, 생각 등에 대한 반응이나 지각으로 마음속에 일어나는 기분이나 감정’이라고 했고, 불교에서는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더 찾아보니 "비구들이여, 그러면 왜 느낌이라 부르는가?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을 느끼는가? 즐거움도 느끼고 괴로움도 느끼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도 느낀다. 비구들이여, 이처럼 느낀다고 해서 느낌이라 한다."(S22:79)고도 했습니다.
마침내 ○○ 스님이 법회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김현수는 일찍 와서 앞자리에 앉았습니다. 평생 처음으로 참석해보는 법회라서 그런지 기분이 묘했습니다. 설레고 경건해지고 설법을 들으면 어떤 복(福)이 찾아올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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