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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受)에 대해 배우고 생각하며 2

고요2 0 274 2018.10.20 06:10

 이상에서 김현수는 몸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육체적인 즐거움이나 육체적인 괴로움은 그럭저럭 이해했습니다. 그럼, 이제 ‘눈•귀•코•혀’ 각각의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들을 다섯 가지 느낌으로 분류한 것에 적용하면 이것들은 어디에 소속시켜야 할까요? 아마 이것들은 눈이 아프거나 귀가 아프거나 코가 아프거나 혀가 아프다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말한 것이 아니니까 아무래도 정신적인 것과 많이 연관될 것 같았습니다.


눈으로 저기 아름다운 형상을 보았을 때 눈 자체가 즐겁다기보다는 그 형상이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희열이나 행복이 일어나서 즐거운 것 같았습니다. 귀로 멋진 소리를 들을 때도 귀 자체가 즐겁다기보다는 그 소리가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희열이나 행복이 일어나서 즐거운 것 같았습니다. 코로 향긋한 냄새를 맡을 때도 코 자체가 즐겁다기보다는 그 향기가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기 때문에 희열이나 행복이 일어나서 즐거운 것 같았습니다. 혀로 맛있는 것을 맛보았을 때도 혀 그 자체가 즐겁다기보다는 그 좋은 맛 때문에 희열이나 행복이 일어나서 즐거운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김현수는 육체적인 즐거움과 육체적인 괴로움은 몸과 관련된 것으로 이해하고, 그 밖의 즐거움과 괴로움은 정신적인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럼 세 가지 분류에서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고, 다섯 가지 분류에서는 ‘평온’에 해당하는 이 느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육체적이건 정신적이건 편안하지도 않고 편안하지 않은 것도 아닌 느낌’으로, 즉 무덤덤한 느낌으로 이해했습니다. 아무 관심 없이 나무를 바라보거나 관심 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들을 때 일어나는 무덤덤한 느낌이 세속의 평온한 느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일상에서는 즐거운 느낌이 아니고 괴로운 느낌도 아닌, 주의하지 않으면 모른 채로 지나간 느낌들이 모두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온의 느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스님이 청중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마음이란 무엇인가요?” 청중1이 대답했습니다. “마음은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것으로서, ’색성향미촉법‘을 분별해서 알고 ’신구의‘ 삼업을 짓는 원인이 되는데, 탐•진•치에 오염되기도 하고 수행을 통해 청정해지기도 하며, 일어났다 사라졌다 할 때 마음이 변하는 것은 너무나 빠릅니다. 즉 마음이란 자기존재를 지속시키기도 하고, 인식하기도 하고 업을 짓기도 하는 원인입니다.”

 

스님은 잘 대답하셨다며 그럼 느낌은 언제 있느냐고, 하루 24시간 중에 무엇을 할 때 느낌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청중2가 대답했습니다. “느낌은 촉(觸)이 있을 때면 언제 어디서나 있습니다. 그러나 촉이 소멸하면 느낌도 소멸합니다. 우리의 삶이 인식과 행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하면, 인식에서 행위로 나아가는 과정에는 언제나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느낌은 마음이 일어나는 곳에는 반드시 일어난다고 하겠습니다. 말하는 동안에는 신경 안 쓰지만 문득 아래를 보면 발이 있는 것을 알듯이 다른 일을 할 때는 염두에 두지 않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가르침을 따라 이치를 음미해보면) ‘... 육입 → 촉 → □ → 애 ...’ 사이에는 반드시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일어나는 곳에는 언제나 느낌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스님은 이번에도 잘 대답하셨다며 그럼 느낌이 우리 삶과 어떤 관련이 있기에 지금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청중3이 대답했습니다. “「화살경」(S36:6)을 보면 그 답을 알 수 있습니다. [ §4.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면, 근심하고 상심하며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결국 그는 이중으로 느낌을 겪고 있는 것이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에 꿰찔리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에 또다시 꿰찔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사람은 두 화살 때문에 오는 괴로움을 모두 다 겪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와 같이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으로 괴로운 느낌을 겪을 때, 근심하고 상심하고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그래서 이중으로 느낌을 겪는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 ... ] 고 하셨습니다.“ (경은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인용)

 

청중4가 대답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괴로운 느낌을 접하게 되면, 그는 그것에 적의를 품습니다. 그처럼 괴로운 느낌에 적의를 품는 그에게는 그 괴로운 느낌에 대한 적의의 잠재성향이 자리 잡게 됩니다. 또 배우지 못한 범부가 즐거운 느낌을 느낄 때는 그것을 진실하다고, 나의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즐거운 느낌이 일어나면 거기에 압도되어 묶이고 소유적 사유의 즐거움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는 즐거운 느낌에 대한 탐욕의 잠재성향이 자리 잡게 됩니다. 한편, 불고불락(不苦不樂)의 일어남과 사라짐과 달콤함과 위험함과 벗어남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하면 무명의 잠재성향이 자리 잡게 됩니다.” ((S36:6) 참조)

 

스님은 이번에도 잘 대답하셨다며 느낌에 대해 복습해 주었습니다. 느낌은 ‘색성향미촉법’에 있는 것이 아니고 ‘눈, 귀, 코, 혀, 몸, 마노(意)’의 감각접촉에서 생긴다고 했습니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촉에서 생긴 느낌에 대해 바르게 알지 못하므로 : 괴로운 느낌에 대해서는 적의의 잠재성향을,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는 탐욕의 잠재성향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에 대해서는 무명의 잠재성향을 잠재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괴로운 느낌이라면 소유적 사유를 탐하는 것으로 벗어나려고 하고, 즐거운 느낌에 대해서는 갈애를 일으켜서 집착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청중들에게 느낌은 ‘안이비설신의’ 쪽에 있고, 갈애는 ‘색성향미촉법’을 즐기는 데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시라고 했습니다.

 

김현수도 그 뜻을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안과 색과 안식이 화합하여 촉이라 하고, 촉을 조건으로 하여 수가 일어난다’고 할 때, 수는 색(色) 쪽에서 느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A와 B가 있다면 느낌은 A가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즐거운 것이라면 이제 그 즐거움이 바로 저 색이라고 전도되어 색에 대한 갈애를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갈애는 B 쪽을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느끼는 것은 눈이고 갈애는 색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김현수는 이 두 가지를 자꾸 구분했습니다. 일상에서 느낌에 압도될 때마다 느낌은 안에 있고, 갈애는 밖을 향한다고 기억해내자고 마음먹었습니다.

 

스님이 백팔 방편 경(S36:22)를 읽고 나서 묻자 청중들은 대답했습니다. “어떤 것이 두 가지 느낌입니까? -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입니다. 어떤 것이 세 가지 느낌입니까? -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입니다. 어떤 것이 다섯 가지 느낌입니까? - 육체적 즐거움의 기능, 육체적 괴로움의 기능, 정신적 즐거움의 기능, 정신적 괴로움의 기능, 평온의 기능입니다. 어떤 것이 여섯 가지 느낌입니까? - 눈의 촉(觸, 감각접촉)에서 생긴 느낌, 귀의 촉에서 생긴 느낌, 코의 촉에서 생긴 느낌, 혀의 촉에서 생긴 느낌, 몸의 촉에서 생긴 느낌, 마노의 촉에서 생긴 느낌입니다. ...” 참고로 사성제의 고성제는 이런 느낌의 분류와는 다른 범주라서 (S36:22)에서 느낌을 한 가지로 분류하시지는 않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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