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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라이죄 중의 하나

고요2 0 539 2019.04.01 13:57
.2. 어느 일요일 오전 김향원은 마을 입구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젊은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어제 역사저널 그날을 보았는데 봉오동 전투의 홍범도 편을 했어. 홍범도 장군은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의고 머슴 생활도 하다가 군대에도 들어갔다가 잠시 금강산의 어느 절에서 머물렀다고 해. 그때 한글도 배우고 주지스님으로부터 임진왜란, 이순신 장군 이야기, 승병의 활약상 등을 들으며 역사의식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 그런데 이때 근처 절의 비구니 스님과 혼인했다고 해. 비구니 스님은 환속하여 아들을 둘(셋?) 두었는데 홍범도가 워낙 무장독립투쟁에 신출귀몰해서 일제가 체포할 수가 없었어, 그래서 일제는 가족을 인질로 삼아 홍범도에게 투항하라고 편지를 쓰게 했다는 거야. 그런데 부인은 끝까지 거절하여 심한 고문을 받고 목숨을 잃었고, 한 아들은 아버지를 따라 독립 전투에서 숨지고, 다른 아들도 고문으로 숨졌다고 해. ...”

김향원이 시민명상교실에 가니 양 대리가 와 있었습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자 양 대리는 송 부장님과 회사 동료 몇 사람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송 부장은 양 대리가 불교신자이고 수행도 잘 하는 사람이라며, 그래서 자신들이 수강하는 명상모임에 좀 같이 가자고 부탁해서 양 대리도 매주 여기에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지난 번에 김향원은 양 대리 같이 교학과 수행이 높은 사람이라면 굳이 여기 초보자의 명상 모임에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회사 동료들의 부탁으로 함께 온 것이었습니다. 양 대리는 송 부장님과 회사 동료들을 위해서 많은 준비를 했는가 봅니다. 프린터 물도 나누어주고 지난 번에 강사님이 설명하신 내용을 다시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되자 강사님이 말했습니다. “여기 호수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물결이 심하게 출렁이면 바닥에 있는 자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수가 잔잔하면 바닥에 있는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지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호흡을 관찰하자고 할 때 마음이 혼란하고 산란하면 호흡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필요한 것이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입니다. 산란한 생각을 그치고 마음을 콧구멍 밑과 윗 입술 사이에 두고 호흡이 남기는 감촉을 느껴 봅시다. 마음이 머리로 가게 하지 말고 인중 어느 지점에 머물게 해 봅시다. ...”

명상시간이 다 끝나고 돌아갈 때 김향원은 양 대리에게 다가갔습니다. 송 부장이 자신들은 1시간 정도 불교와 수행에 대해 대화를 나눌 예정이라며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김향원은 불감청고소원이라며 합석했습니다. 나중에 발언 기회를 얻어 김향원은 아까 들었던 비구니 스님과 홍범도 장군의 혼인 이야기를 들려주며 출가 스님의 혼인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양 대리가 말했습니다. “불교에는 승단에서 추방하는 율이 있는데, 그것을 바라이죄라고 한다 합니다. (해피스님의 수업보고서 중에서 : pārājika[빠라지까] - 바라이(波羅夷), 단두죄(斷頭罪) → 승단추방죄(僧團追放罪) 4조(四條). 상가에서 추방되고 다시는 구족계를 받을 수 없음. 단, 사미계는 받을 수 있음. ①음행, ②투도, ③살인, ④인간을 넘어선 상태[uttarimanussadhamma]에 대한 사칭).” 그러니까 출가 스님은 비구(니)의 신분으로는 음행하면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환속하면 결혼하여 살 수 있습니다.“

그때 회사 동료가 물었습니다. “아주 드물게 소설에서 재가자가 스님을 사모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때는 어떻게 하면 될까요? 사랑은 국경도 없고 신분의 차이도 넘나든다고 하는데 과연 사랑앞에 모든 것을 내맡겨야 할까요?”
양 대리가 말했습니다. “만약 스님을 사모하는 재가자가 있다면 먼저 절의 어른 스님께서 자기 존재가 무엇이고 세상이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주고 비구(니)는 욕계, 색계, 무색계를 넘어선 해탈 열반을 향해 정진하는 사람이라고 알려줍니다. 그래서 그 재가자가 부끄러워하고 뉘우쳐서 잘 돌아서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재가자가 끝까지 비구(니)를 사모한다면 그 해당 비구(니)는 그 재가자가 모르는 곳으로 떠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김향원이 말했습니다. “제가 들으니, 공자께서는 ‘子絶四러시니 毋意, 毋必, 毋固, 毋我러시다(논어, 자한 4장, 공자는 네 가지의 마음이 전혀 없으셨으니, 사사로운 뜻이 없으셨고, 일은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한다고 기필하는 마음이 없으셨고,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셨으며, 이기심이 없으셨다)’ 고 하셨다 합니다. 毋固(고집부리는 일이 없다)에 해당할 만한 불교 용어가 있을까요?”
양 대리가 말했습니다. “저는 공자님께서 말씀하셨다는 고집이 어쩌면 불교에서 말하는 취(取)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합니다. 취는 우선 집착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경에는 ‘...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취(取)인가? 비구들이여, 네 가지 취가 있나니,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 견해에 대한 취착, 계율과 의례의식에 대한 취착, 자아의 교리에 대한 취착이다.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취라 한다.’ (S12:2) 라고 나옵니다.”

회사 동료1이 말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는 견해에 대한 집착(取)이 심한 편이네요. 저는 정치적으로 견해를 같이 하는 사람들의 말만 듣고 반대 진영 사람들의 말은 전혀 듣지 않는 편입니다.”
회사 동료2가 말했습니다. “저도 견해에 대한 집착이 심하군요. 불교를 공부하고 나서부터는 다른 학문이나 다른 종교에서 설명하는 자기 존재와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거부감이 생기고 분노가 일어납니다.”
양 대리가 말했습니다. “자신이 배우는 학문이나 종교에 대해 능통하고 그 가르침을 잘 지키는 것은 ‘믿음’의 영역이라서 우리가 관여할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자신이 배운 가르침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것과 ‘집착(取)’은 다른 개념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믿음을 잘 지키며 살아가면서도, 믿음이 다르다 하여 남과 다투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잘 지켜나가지만, 그 믿음에 집착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송 부장이 말했습니다. “어떻게 자신의 믿음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나요?”
양 대리가 말했습니다. “집착의 원인은 갈애라고 나옵니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일어나므로 집착하는 사람은 괴롭고 남과 다투고 분노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바른 믿음을 일으키고 계발하는 데 갈애 없이 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김향원이 물었습니다. “그럼 갈애 말고, 다른 방식으로 괴로움의 원인을 말할 수 있을까요? 괴로움의 뿌리는 무엇일까요?
양 대리가 말했습니다. “해피스님께서는 동영상 법문에서 bhadrakasuttaṃ (SN 42.11-바드라까 경)을 설명하시면서, 「생겨나는 것인 괴로움은 어떤 것이든지 모두 찬다(chanda)를 뿌리로, chanda를 인연으로 생긴다. 참으로 chanda는 괴로움의 뿌리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찬다는 참 어려운 용어로 예전에는 의욕이라고 많이 번역했는데, 해피스님께서는 ‘관심(關心)’으로 번역하시려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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