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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없음 경(A4:62)을 인용

고요2 0 452 2019.05.14 10:38
8. 학동이 물었습니다. “명심보감에 ‘知足者는 貧賤亦樂이요 不知足者는 富貴亦憂니라’(만족함을 아는 자는 가난하고 신분이 천해도 즐겁고(행복하고) 만족함을 알지 못하는 자는 부유하고 귀하여도 근심하느니라) 하였는데 정말로 가난해도 걱정 근심 없이 살 수 있나요?” 김향원이 말했습니다. “그럴 수도 있단다. 일례로 공자님의 제자 안연 같은 분은 정말 그랬다는구나. 그 부분을 찾아서 읽어줄게.

‘子曰 賢哉라 回也여 一簞食와 一瓢飮으로 在陋巷을 人不堪其憂어늘 回也不改其樂하니 賢哉라 回也여 (논어, 옹야, 9장)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질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마실 것으로 누추한 시골에 있는 것을 딴 사람들은 그 근심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다, 안회여!”) (성백효 역주) 그런데 가족이 있는 가장이라면 식구들을 부양하고 보호해야 하니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재물이 있어야 한단다.”
 
학동들이 돌아가자 김향원은 불교수행반에서 들은 빚 없음 경(A4:62)을 검색하여 읽었습니다. (해피스님의 번역)
그때 아나타삔디까 장자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께 절하고 한 곁에 앉았다. 한 곁에 앉은 아나타삔디까 장자에게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자여, 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재가자가 올바른 경우에 붙잡고서 획득해야 하는 네 가지 행복이 있다. 무엇이 넷인가? 소유의 행복, 재물의 행복, 빚 없는 행복, 비난 없는 행복이다.”

“장자여, 그러면 무엇이 소유의 행복인가? 장자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에게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덮었고 법과 함께하고 법의 실천으로 얻은 재물이 있다. 그는 ‘나에게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덮었고 법과 함께하고 법의 실천으로 얻은 재물이 있다.’라고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것이 소유의 행복이라고 불린다.”

“장자여, 그러면 무엇이 재물의 행복인가? 장자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덮었고 법과 함께하고 법의 실천으로 얻은 재물로 사용하고 공덕을 짓는다. 그는 ‘나는 열정적인 노력으로 얻었고 팔의 힘으로 모았고 땀으로 덮었고 법과 함께하고 법의 실천으로 얻은 재물로 사용하고 공덕을 짓는다.’라고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것이 재물의 행복이라고 불린다.”

“장자여, 그러면 어떤 것이 빚 없는 행복인가? 장자여, 여기 좋은 가문의 아들은 적든 많든 누구에게도 무엇도 부담하지 않는다. 그는 ‘나는 적든 많든 누구에게도 무엇도 부담하지 않는다.’라고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것이 빚 없는 행복이라고 불린다.”

“장자여, 그러면 무엇이 비난 없는 행복인가? 장자여, 여기 성스러운 제자는 비난 없는 신업(身業)을 구족하고 비난 없는 구업(口業)을 구족하고 비난 없는 의업(意業)을 구족하였다. 그는 ‘나는 비난 없는 신업(身業)을 구족하고 비난 없는 구업(口業)을 구족하고 비난 없는 의업(意業)을 구족하였다.’라고 행복을 얻고 기쁨을 얻는다. 장자여, 이것이 비난 없는 행복이라고 불린다. 장자여, 소유의 삶을 살아가는 재가자가 올바른 경우에 붙잡고서 획득해야 하는 이런 네 가지 행복이 있다.”

“빚 없는 행복을 알고 난 뒤에 소유의 행복이 나중에 있다.
재물의 행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면 그때부터 지혜는 통찰한다.
현명한 자는 통찰하면서 재물의 둘 모두를 안다.
이것은 비난 없는 행복의 16분의 1의 가치도 없다.”

일요일 오전에 김향원은 불교수행반에 갔습니다. 지도 스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복습하겠습니다. (①길게 들이쉬면서 ‘길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내쉬면서 ‘길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②짧게 들이쉬면서 ‘짧게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내쉬면서 ‘짧게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③‘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자.’라고 시도하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자.’라고 시도한다. ④‘신행(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들이쉬자.’라고 시도하고, ‘신행(身行)을 고요히 하면서 내쉬자.’라고 시도한다.) 호흡 수행의 앞의 네 가지를 혼자서 하시기에는 좀 어려워요. 그래서 은사 스님으로부터 배운 것을 근거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올바른 몸자세입니다. 결가부좌가 익숙하신 분은 결가부좌가 좋은데, 어려우시면 평좌로 해도 괜찮아요. 몸은 무너지는, 변형되는 습성이 있어요. 그래서 방석을 조정해도 됩니다. 그리고 척추를 똑바로 세우고, 턱을 에헴 하듯이 약간 잡아 당겨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머리의 무게를 목이 다 감당해야 하니까 머리의 무게를 척추가 감당할 수 있도록 턱을 조금 당깁니다. 눈은 아무 할 일이 없으니 눈은 주무실 때처럼 편안히 감습니다. 그리고 온 몸의 긴장을 풉니다. 이 말은 곧 마음의 긴장을 푼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마음의 긴장을 푸는 일에 잘 훈련된 분들은 마음의 긴장을 풀면 몸이 이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훈련되지 않은 분들은 몸의 긴장을 푼다고 생각하시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한번 죽 훑어 내립니다. 몸이 긴장되거나 마음이 긴장되어 있어서는 숨이 잘 안 봐져요. 오장애(다섯 가지 장애)와의 전투는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해요,. 훈련도 하고 몸과 긴장도 풀고 오장애와 대결해야 합니다. 

둘째는 올바른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무상하다’고 아는 것입니다. 몸, 마음,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무상하다고 숙고하시면서 무상한 마음, 생각들을 멈추겠다고 강한 결의를 합니다. 무상한 생각에 노예가 되지 않으리라, 휩싸이지 않으리라고 결의합니다. 이 들숨날숨 관찰 수행은 모든 사람에게 적합하니까 나에게는 안 맞을 거야 라는 의심을 하실 필요는 없어요. 그래서 모든 생각을 멈추겠다는 강한 결의가 매우 중요합니다. 강한 결의가 있으면 생각의 패턴이 올라올 때 숨을 기억하고 숨에 마음챙김할 수 있을 거예요. 그러면 두 번째 화살에 맞지 않을 거예요. 모든 근심 걱정 계획들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있으니 과거 미래에 가지 말고 여기 숨에 사띠하는 거예요.

셋째는 들숨 날숨에 친숙해지기입니다. 그동안 우리의 마음은 밖의 색성향미촉법에 엄청나게 친숙했어요. 그래서 조그만 소리가 나면 그쪽으로 가서 시비하고 소리가 안 놔도 아무 소리가 안 난다고 시비하고. 눈을 감아도 무엇인가 얼렁거리면 눈을 떠서 보려고 하고, 이렇게 우리의 마음은 밖의 대상들을 향해 달려갔고 친숙했습니다.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을 일으키며 알 수 없는 생을 계속해 왔어요. 이렇게 마음은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먼저 이해해야 합니다. 참고로 몸은 대상을 필요로 하지 않아요. 여기서 마음이 대상을 필요로 한다는 의미는 : 마음은 그 대상을 향해서 기우는 경향이 있다는 거예요. 마음이 아무 대상이 없는 순간이 한 순간도 없어요.

수행은 ‘그런 대상을 향하는, 쫓아가는 성질을 가진 마음’에 ‘적합한, 이익이 되는 대상을 주도록 하는 것’, ‘그것을 이해하고 명령하고 길들이는 것’이 수행이에요. 그래서 대상을 향해서 기우는 성질을 가진, 대상을 항상 필요로 하는 마음에게 숨을 알도록 명령하고, 계속 숨을 기억하고 숨을 알도록 상기시킵니다. 그러면 어디에 있는 숨인가요? 누구는 숨이 배까지 단전에도 숨이 있다고도 해요. 그러나 숨은 거기까지 못 가요. 횡격막이 팽창하면서 압박하기 때문에 숨이 배까지 간다는 느낌이 있지만 배에는 사대의 움직임만 있을 뿐이지요. 

숨의 덩어리를 가장 정확하게 명료하게 알 수 있는 곳이 인중 부분입니다. 얼굴 앞의 인중 부위, 코끝 아래 윗입술 위, 여기에 오락가락 들어오고 나가는 숨에 마음챙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초보자는 처음부터 여기를 지나가는 숨을 잡기가 좀 어려울 수도 있어요. 그래서 뗏목이 필요해요. 숨이 들어가면서 피부의 어느 부위를 터칭하면서 들어가요. 접촉해서 들어가요. 좀 차가워요. 나올 때는 몸의 온도에 데워져서 나오니까 조금 따뜻할 거예요. 그 따뜻함을 어떻게 아나요? 여기 피부에 닿기 때문에, 접촉하기 때문에(육입-촉-수-애) 느낌들이 차갑다거나 따뜻하거나 하는 느낌이 일어날 거예요. 인중 위 부분에서 숨을 바로 아실 수 있으면 좋아요. 인중 위 공중에서 아시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에요. 그런데 바로 비행이 안 되면 활주로를 죽 달려가다가 비행하듯이, 자신이 강을 점프할 힘이 없으면 뗏목을 타든 배를 타든 : 방법, 수단, 웨이(way)를 활용하면 되어요. 그래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강을 건너고 나면 뗏목을 버리면 되지요. 즉 인중 위에서 숨을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면, 숨이 들어가고 나올 때 인중 부위의 피부를 터칭하니까, 숨이 그 접촉 지점을 통해서 인중 부근 위를 지나가니까, 피부에 닿는 접촉 지점을 통해서 공기의 흐름을 아시면 되어요. ...”

강의가 끝나고 양 대리가 회사 분들에게 ‘만일 여기에 김철수가 있어 그는 한 평생 고통 속에서 살았다면 죽을 때 어떤 생각을 할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누구는 하늘 세상에 태어날 꿈을 가질 겉 같다고, 누구는 부자로 태어날 꿈을 꿀 것이라고, 누구는 다시는 안 태어나기를 바랄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양 대리가 말했습니다. “송 부장님께서는, 태어남이 너무 큰 고통이라서 김철수가 죽을 때 다시는 안 태어날 생각을 할 것 같다고 대답하셨는데, 죽어서 안 태어나는 그런 방법이 있을까요? 정말로 다시는 모태에 들지 않는 그런 방법이 있을까요?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김향원도 마찬가지로 그 답을 몰랐습니다. 그러자 양 대리가 참고삼아 해피스님께서 번역하신 (SN 12.19-우현(愚賢) 경을 읽어주었습니다. 

사왓티에 머물다. …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어리석은 자에게 이와 같이 이 몸이 일어난다. 이렇게 이 몸과 밖의 명색(名色)이 있다. 여기에 이 쌍(雙)이 있고, 쌍을 연(緣)하여 육촉처(六觸處)가 있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에 의해 닿아진 어리석은 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초기불전연구원]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어리석은 자의 이 몸은 이와 같이 생겨난다. 이처럼 이 몸과 밖의 정신-물질이 생겨난다. 이렇게 해서 한 쌍이 존재하게 된다. 한 쌍을 조건으로 하여 감각접촉이 있고, 여섯 [감각접촉이] 장소에 닿거나 이들 가운데 하나에 닿아서 어리석은 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수행승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는 이 현세의 몸이 생겨난다. 이처럼 이러한 몸이 생겨나고 외부에 명색이 주어진다. 이러한 방식으로 한 쌍이 성립하고 한 쌍의 성립에 의해 접촉, 즉 여섯 가지 접촉의 감역이 생겨나고 어리석은 자는 그들 또는 그들 가운데 어느 하나의 접촉을 통해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여서 현명한 자에게 이와 같이 이 몸이 일어난다. 이렇게 이 몸과 밖의 명색(名色)이 있다. 여기에 이 쌍(雙)이 있고, 쌍을 연(緣)하여 육촉처(六觸處)가 있다. 이들 가운데 어떤 것에 의해 닿아진 현명한 자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한다.

“비구들이여, 어리석은 자에 비해 현명한 자에게 어떤 차이, 어떤 특별함, 어떤 다름이 있는가?” “대덕이시여, 참으로 법들은 세존을 뿌리로 하고, 세존을 도관(導管)으로 하고, 세존을 의지합니다. 대덕이시여, 이 말씀의 의미를 세존께서 분명히 해주시면 참으로 감사하겠습니다. 비구들은 세존에게서 듣고서 명심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비구들이여, 듣고 잘 사고(思考)하라. 나는 말할 것이다.” “그러겠습니다, 대덕이시여.”라고 비구들은 세존에게 대답했다. 세존은 이렇게 말했다. ㅡ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 이 몸이 일어난다. 그 어리석은 자에게 무명은 버려지지 않고 갈애는 부수어지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어리석은 자는 괴로움의 부숨을 위해 바르게 범행을 닦지 않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몸이 무너진 뒤 몸을 받게 된다[몸으로 가게 된다]. 몸을 받아 있은 그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현명한 자에게 이 몸이 일어난다. 그 현명한 자에게 무명은 버려지고 갈애는 부수어진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자는 괴로움의 부숨을 위해 바르게 범행을 닦는다. 그래서 현명한 자는 몸이 무너진 뒤 몸을 받지 않게 된다[몸으로 가지 않게 된다]. 몸을 받지 않은 그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으로부터 벗어나고,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범행의 실천, 어리석은 자에 비해 현명한 자에게 이것이 차이이고, 이것이 특별함이고, 이것이 다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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