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공무변처는 몸이 없는가? - 아니다 (조금 녹취)

고요2 2 256 2017.12.24 09:49

 

합송경 5-1[오온-오취온 1)](부산 합송경 법회 171206)

[동영상] https://youtu.be/xPd0swGWGyM

 

(1435~ 2211)

우리가 이 표현을 할 때는 놓치면 안 되는 것이 (있어요), 저기 법우님, 중생들이 사는 세상을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라고 부르는데, 혹시 무색계가 어떤 세상인지 좀 특징적으로 말씀해 줄 수 있나요? 다른 법우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몸은 없다는 것인가요? ... 어쨌든 유신인 나를 중생이라고 부르는데, 오취온이에요. 오취온이니까 색수상행식 여기에 집착됨이 있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럼 이 중생이라는 것이 어떻게 구성되었는가 하면, ‘욕계 중생, 색계 중생, 무색계 중생’. 이것을 삼계, 삼계의 중생이라고 하지요. 대승불교에서 예불보실 때 부처님을 삼계도사 사생자부(三界導師 四生慈父) : 삼계의 도사(삼계의 중생을 이끌어주시는 스승)이시다고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삼계가 욕계 색계 무색계로 나오는데, 이때 보면 불교계에서 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한 가지가 있어요. 방금 제가 여쭈어 본 것이지요.

 

욕계는 어쨌든 내 것이라고 하는, 소유라는 개념이지요. 색계는 물질적인 세상이라고 말하는데, 하여간 몸과 관련한 세상이겠지요. 무색계는 무엇인가요? 글자로만 보면 물질 없는 세상이잖아요. 그런데 무색계의 존재 상태를 말할 때, ‘몸이 없다, 마음만 있다.’ 이런 식으로 무색계를 설명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되면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기본적으로 유신(有身), 나라는 중생이 살아가는 세상이 이것(삼계)인데, 그 내가 누구라고 정의되는가 하면 색수상행식, 오온에 대한 집착이지요. 이때 색()이라는 것이 무엇이지요? 물질이지요. 그런데 포괄적으로 말하면 색은 물질이지만, 삶을 설명하는 경전들에서는 색을 몸이라고도 사용하거든요. 어쨌든 물질은 몸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요.

 

그런데 몸이 없다고 무색계를 이해하면 어떤 문제가 생기나요? 기본적으로 중생인 나의 세상은, 색수상행식을 몸통으로 집착되어 있는 자들의 삶이잖아요. 그러면 이런 삶이라는 것은 몸을 포함한 물질이 함께 하는 거예요. , 나라고 하는데서 몸을 포함한 물질이라고 하면, 세상을 말하는 오온에서의 색은 몸 밖의 물질도 들어가지만, 나라고 하는 오취온으로 접근해보면 내 중에서 물질은 몸이잖아요.

 

그러면 이라는 것과 몸 아닌 어떤 것들(수상행식)’이 함께 있고, 거기에 집착될 때 오취온인 이잖아요. 이렇게 정의되는 상황에서, 만약에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대로 욕계 색계 무색계의 삼계가 있는데, 이 중에 무색계는 물질 없는몸이 없는 세상이다, 마음만으로 (이루어진 세상이라고 한다면 곤란합니다). 심지어는 이렇게 직접적인 표현도 하잖아요. (무색게는) 수상행식 네 가지 무더기로만 존재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어요.

 

이렇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교리적인 충돌이 있게 되지요. 교리적인 충돌이 없는 공부를 해야 부처님의 가르침을 확정적으로 알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이것은 어때요? 만약 무색계가 몸이 없는 세상이다는 일이 사실이라면, 그렇게 말하는 학자들이 올바르게 설명한 것이라면,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되는가요? ‘나는, 욕계와 색계라는 이 영역에서는 오온이고 무색계에서는 사온이다고 설명이 되어야 하지요. 그런데 부처님은 중생이라고 삼계를 포괄하는 존재 상태에 대해서 오취온이 나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무색계는 사온만이 있다고 말하면 곤란한 거예요.

 

(예를 들어 무색계에 몸이 없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 제가 중생이잖아요. 그러면 중생인 저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나요?’(하고 질문드렸을 때). 부처님이 이쪽에서는 색수상행식에 대한 집착 상태가 중생이라고 알려주셨는데, 다른 쪽에 가서는 그런데 그중에 무색계는 빼고 욕계와 색계까지는 오취온이고 무색계는 사취온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되잖아요.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교리적 충돌이잖아요.

 

그런데 부처님 가르침이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과 저기서 말씀하시는 것이 다를까요? 다르다면 이 가르침은 완전한 가르침이고 그런 완전한 가르침에 의한 완전한 깨달음의 부처님이라고 말할 수는 없잖아요. 부처님 가르침이 이렇게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되지요.

 

 

(2212~ 2759)

이런 부분을 우리가 좀 주목한 상태에서 사실 이 자리를 보면 무색계라고 하는 이 자리는 경전이 답을 해주어요. 무색계를 사온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경전을 잘못 본 거에요. 경전에서는 무색계라는 것이 공무변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라고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공무변처가 무색계 중에 가장 낮은 상태이지요. 무색계로 삶을 끌어올렸다고 하면 그 첫 자리가 공무변처이고, 그 공무변처에서 한 단계 더 올라서고 한 단계 더 올라서고 한 단계 더 올라서고 하여 비상비비상처까지 가는 거지요.

 

이런 이해위에서 공무변처를 부처님이 정의를 해 주어요. 이때 몸과 관련해서 루빠산냐를 어떻게 말하는가 하면, ‘루빠산냐에서 루빠는 색()이고 산냐는 상()입니다. (그래서 루빠산냐는) 색상(色想)이라고 하는 물질에 대한 어떤 경향성, 몸에 대한 어떤 경향성, 이 자리에서만 딱 말하자면 이 몸이야말로 마음과 함께 하는 그 상태가 나여 라고 말하는, 몸에 대해서 이 몸이야말로 어쨌든 나야 라고 붙잡는 경향성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공무변처를 설명하시면서 루빠산냐(

Comments

고요2 2017.12.24 09:52
색상)를 초월했다•넘어섰다’, 이렇게 표현을 해요. 색상(色想)을 초월했다는 이 이야기는 무엇인가 하면, 부처님이 공무변처라는 무색게를 정의하실 때 몸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몸에 대해서 나야’ 라고 붙잡는 그런 경향성을 극복했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무색계는 몸이 없는 세상이 아니고 몸에 대해서 ‘나야!’ 라고 붙잡는, 몸과 마음을 싸잡아서 나야!라고 붙잡는, 그래서 그런 몸도 나야! 라고 몸에 대해 집착하는 그 경향성을 넘어선 것입니다. 즉 몸에 대해서는 ‘이 몸을 바로 보니까 몸이라는 것은 물질이고 부모에게서 생긴 것이고 밥으로 채워나가는 것이고 ... 그런데 식이라고 하는•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귀한 것이구나. ...’ 라고 (알게 됩니다).

그렇게 보지 못할 때는 식(識)이라는 이 마음이 몸에 의지하고 묶여 있는 상태로 살아요. (마음이) 몸에 의지하고 묶여있다는 것이 사실은 좀 낮은 상태라는 거에요. 그런데 제4선만큼의 높은 상태까지 올라가면 그때부터는 ‘몸은 이렇게 보잘 것 없는 것인데, 거기에 비해 마음은 이럻게 멋진 것이다.’(고 알게 된다는 거예요).

경이 비유를 해주는데, 팔각형으로 된 잘 가공된 멋진 보석이 있어요. 그런 보석을 이런 저런 색깔로 좀 감아놓았어요. 그런데 사람들이 밖의 실을 쳐다보면서 안에 들어있는 그 멋진 보석은 모르고, 이 실만 가지고 멋지다고 합니다. 실에 의지하고 묶여 있는 거에요, 이 보석이. 그런데 제4선이라는 높은 수행의 경지에 들면 그때 비로소 그렇다는 거예요. ‘아, 사실은 몸이라고 하는 이것은 보석 위에 둘러쳐져 있는 실과 같은 것이구나. 이 보석을 보게 되면 그 실이라는 것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이렇게 보게 된다는 겁니다.

그것을 보기 전에는 식이 몸을 의지하고 몸에 묶여 있다고 말을 합니다. 보았다고 하는 것은 이제 실이 보잘 것 없다는 것을 보았기 때문에 (마음이) 더 이상 몸에 의지하지 않게 되고 몸에 묶여있지 않게 된다는 이런 이야기이지요. 그렇다고 해서 중생 자체가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몸에 의지하지 않는다, 몸에 묶여있지 않는다’는 이 말이, 내 마음이 몸을 어디에다 두고 밖에 간다는 그런 개념은 아니에요. 몸과 함께 해야 비로소 나(자기 존재)인 거예요.

그러나 그 가운데 몸과 마음을 이렇게 보고 나니까, 더 이상 몸을 붙잡고 나라고 매달리는 이런 낮은 삶 • 그런 낮은 경향성을 더 이상 갖지 않게 되었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중생의 입장에서는 아주 높은 삶의 영역, 그것을 무색계라고 말하지요.
고요2 2017.12.24 09:53
(28분 00초 ~ 29분 24초)
어쨌든 다섯 가지로 구성된 첫 번째 주제가 오온입니다. 두 번째 주제가 거기에 집착되면 오취온인 중생-나가 된다, 몸과 함께 하는 존재 상태-유신이라고 불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 제기입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무색계라는 것을 몸이 없는 네 가지 온(蘊)만으로 존재하는 세상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그것은 교리적으로 타당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경전은 실제로 무색계의 출발자리인 공무변처를, 색(色)을 넘어섰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색에 대한 경향성(色想) (을 넘어섰다고 말합니다), 몸까지를 싸잡아서 나라고 붙잡는 이런 경향성을 넘어섰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므로 법우님, 몸이 없다는 것과 몸에 대한 경향성이 없다는 것은 다른 것이죠. 이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어쨌든 ‘깨달아서 해탈 열반을 실현했다, 아라한 되었다, 윤회에서 벗어났다’는 이 상태를 가기 전에는, 어쨌든 우리 상태는 ‘오온에 대한 집착 상태이다, 몸을 떠나지 못한다’는 이 개념은 명확히 알고 가야 합니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