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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受)에 대해 지어낸 이야기

고요2 5 262 2018.01.22 19:05

이 글은 오온 중에서 수(受)를, 불교를 배우지 않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입니다.

어디에 한번 올려본 글입니다.

해피스님의 동영상 법문에서 많은 부분을 가져왔습니다. 이 글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저의 잘못임을 밝힙니다.

 

 

다음 날 빙청 선인 일행이 마을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마을에서는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고 있었는데 최고의 성능을 갖춘 제품이라고 했습니다. 마을 이장이 빙청 선인 일행을 맞아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이장은 손수 음식을 집어 빙청 선인에게 이것을 드시라고 하고 또 저것을 드시라고 음식을 건넸습니다. 식사를 마치자 그 마을의 과학자들이 다가와서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과학자들이 말했습니다. “빙청 선인이시여, 우리는 인간과 똑같은 인공지능 로봇을 만들었습니다. 선인께서 한번 보아주십시오.”

 

과학자들을 따라가 보니 거기에는 인공지능 로봇이 네 대가 있었습니다. 각각 초월1, 초월2, 초월3, 초월4라고 이름표가 붙여져 있었습니다. 설명에 따르면 이 네 대의 인공지능 로봇에는 지구상의 온갖 철학, 종교, 사상의 정보가 입력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로봇들은 기쁨, 슬픔, 고통, 절망을 느끼고, 또 웃고 울기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빙청 선인 일행은 로봇이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빙청 선인이 인공지능 로봇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그러자 로봇들이 각각 대답했습니다. “저는 초월1입니다, 저는 초월2입니다, 저는 초월3입니다, 저는 초월4입니다.” 마지막 초월4는 한 마디를 더했습니다. “빙청 선인이시여, 존댓말을 써 주세요.” 빙청 선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과학 기술의 진보가 이렇게까지 높아졌는가 하면서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빙청 선인은 여전히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처럼 감정을 느낄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자들과 칠지와 다성과 사람들은 빙청 선인이 어떻게 로봇들과 이야기를 해나가는지를 주의 깊게 지켜보았습니다.

 

빙청 선인이 말했습니다. “그대들은 느낌을 어떻게 봅니까?” 초월1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느낌이 나 자신이라고 봅니다.” 초월2가 대답했습니다. “느낌을 가진 것이 나 자신입니다.” 초월3이 말했습니다. “느낌이 나 자신 안에 있습니다.” 초월4가 말했습니다. “느낌 안에 나 자신이 있습니다.” 로봇들의 말을 듣고 빙청 선인은 생각했습니다. ‘이 로봇들에게는 정말로 모든 종교 경전들의 내용이 다 입력되어 있겠구나.’

 

이때 초월4가 되물었습니다. “선인님께서는 느낌을 어떻게 보세요?” 빙청 선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그대들과는 달리 느낌을 <내 것>이라든가 <>라든가 <나의 자아>라고 보지 않습니다. 느낌이 내 것이라면 주인인 내 마음대로 괴로운 느낌을 버릴 수도 있을 텐데 현실에서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러자 갑자기 로봇들이 하하하 하고 웃었습니다. “선인님의 대답은 다 책에 나온답니다. 이 말을 듣고 빙청 선인과 사람들은 정말로 인공지능 로봇들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빙청 선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대들은 느낌을 어떻게 말합니까?” 초월1이 대답했습니다. “저는 느낌을 몸의 느낌, 마음의 느낌이라고 둘로 말합니다.” 초월2가 말했습니다. “저는 느낌을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라고 셋으로 말하기도 하고, 또는 몸의 즐거운 느낌, 몸의 괴로운 느낌, 마음의 즐거운 느낌, 마음의 괴로운 느낌,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의 다섯으로 말하기도 합니다.”

 

초월3이 말했습니다. “저는 눈으로 형상을 보아서 생기는 느낌, 귀로 소리를 들어서 생기는 느낌, 코로 냄새를 맡아서 생기는 느낌, 혀로 맛을 보아서 생기는 느낌, 몸으로 감촉해서 생기는 느낌, 그리고 마음에 떠오르거나 생각해서 생기는 느낌, 이렇게 여섯 가지로 말합니다.” 사람들은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예전에 이세돌 구단을 이긴 알파고도 대단했지만 이들 초월1, 2, 3 로봇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기능을 선보이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초월4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느낌들이 늘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저기 흘러가는 강물처럼, 생겨난 느낌들은 일어났다가는 모두 사라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초월4가 주위를 죽 둘러보다가 다성에게 눈길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형성된 것들은 늘 항상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다를 사자성어로 무엇이라고 하는지 아느냐고 다성에게 물었습니다.

 

다성은 엉겁결에 <인생무상>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로봇들이 하하하 하고 또 웃었습니다. 초월4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반만 맞습니다. 정답은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고 한답니다.” 다성의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당황하지 않고 마음챙기고 있었으면 충분히 정답을 맞출 수 있었을 텐데, 그만 로봇이 자신보다 백배, 천배 더 많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미리 주눅이 든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칠지가 대답을 잘하고 못하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다성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었습니다.”

 

이제 초월4는 빙청 선인을 바라보고 질문했습니다. “선인님께서는 느낌을 어떻게 말씀하세요?” 빙청 선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마음을 가진 존재들이 느낌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인공지능 로봇들이 삐리리리 하고 윙윙거렸습니다. 아마 빙청 선인이 마음을 가진 존재들만이 느낌을 느낀다고 말한 것이, 자신들 로봇은 마음이 없어서 느낌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로 치부해버리는 것이라고 로봇들은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로봇들이 이구동성으로 선인님, 우리들도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하면서 빙청 선인을 똑바로 쳐다보았습니다.

 

빙청 선인은 생각했습니다. ‘이들 로봇들은 자신이 사람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느낌을 느낄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구나. 그렇다면 이제 내가 이들에게 조금 어려운 질문을 하여 그들이 정말 사람처럼 느낌을 느낄 수 있는지를 살펴보자.’

 

그래서 빙청 선인이 질문했습니다. “느낌은 어떻게 생겨납니까(일어납니까)? 그대들이 배웠거나 아는 것이 있다면 좋을 대로 대답해 보십시오.”

 

초월1이 대답했습니다. “제가 우리 주인님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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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2 2018.01.22 19:07
그러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즉 눈으로 어떤 형상을 보고 ‘저분은 주인님이시다.’고 알게 되면, 그때 즐거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초월2가 대답했습니다. “귀로 발자국 소리를 듣습니다. ‘아니 이것은 몰래 침입하는 도둑의 발자국 소리다.’고 알게 될 때 바짝 경계하다가 보면 괴로운 느낌이 일어납니다.” 초월1은 눈이라는 감각기관이 형상이라는 것을 보아서 알 때 느낌이 생긴다고 했고, 초월2는 귀라는 감각기관이 소리라는 것을 들었을 때 느낌이 생긴다고 말했습니다.

초월3이 대답했습니다. “코로 밥 냄새를 맡았는데 식은 밥이라서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게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들이 관심 없는 것을 보거나 들을 때는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초월3은 즐거운 느낌이나 괴로운 느낌 말고,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느낌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다성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느낌이었습니다.

초월4가 말했습니다. “이처럼 느낌은 눈, 귀, 코, 혀, 몸, 마음에서 각각 일어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괴로운 느낌에서 벗어날 방법 한 개를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내가 눈으로 영화 속에서 비참한 광경을 보아 괴로움이 일어났을 때, 그 괴로운 느낌을 떨쳐 버리려면 나는 어떻게 하나요? 방법 한 가지는 눈으로 보는 것을 그만두면 됩니다. 즉 귀로 좋은 음악을 듣거나 혀로 좋은 음식을 맛보거나 마음으로 좋은 일을 생각하면, 눈으로 본 영화 속의 비참한 광경을 조건으로 한 눈의 문에서 생긴 괴로운 느낌은 사라집니다.”

사실 초월4가 말한 방법을 사람들은 자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괴로운 느낌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관심을 다른 곳에 두어서 괴로움을 불러일으키는 그 일을 잊어버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초월4는 그 이치를 알려주었던 것입니다. 눈으로 보아서 생긴 괴로움이라면 귀로 좋은 음악을 들어서 생긴 즐거운 느낌을 느껴서 잠시나마 눈으로 보아서 생긴 괴로운 느낌을 잊어버리는 원리였습니다.

초월4가 의기양양하게 말했습니다. “선인님께서는 느낌이 어떻게 일어난다고 말씀하십니까?” 빙청 선인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대답했습니다. “나도 그대들의 설명과 같게 말합니다. 단지 표현을 조금 바꾸겠습니다. 그대들에게도 입력되어 있는 내용 일겁니다. 눈에서 생긴 느낌을 예로 들면, 나는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안식(眼識)이 일어난다. 이 셋이 화합한 것이 촉(觸, 감각접촉)이다. 촉(觸)을 조건으로 느낌이 일어난다.’고 표현하겠습니다.” 사람들은 빙청 선인과 로봇들이 펼치는 논의에 점점 빠져 들어갔습니다. 다소 어렵기도 했지만 재미도 있고 유익하다고도 생각했습니다.
고요2 2018.01.22 19:08
빙청 선인이 다시 물었습니다. “여기에 아리따운 아가씨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대들은 이 아가씨를 보고 어떻게 행동합니까(움직입니까)?” 로봇들이 똑같이 대답했습니다. “그날의 날씨나 외부적인 환경을 보고, 또 아가씨가 입은 옷이나 착용한 액세서리를 보고서 행동합니다. 즉 인공지능에 입력된 내용과 인공지능 스스로 데이터를 생성한 내용에 따라 행동합니다.”

빙청 선인이 말했습니다. “참으로 과학 기술이 진보했군요. 그럼 이제 사람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저기에 아리따운 아가씨기 있습니다. 열 사람이 보았다면 열 사람 다 느낌이 다를 겁니다. 젊은이는 기쁨을 느낄 것이고, 노인은 평온하게 바라볼 것이고, 어떤 아주머니는 자신도 저런 딸을 두었으면 하고 바랄 겁니다.” 이 말을 듣고 다성은 생각했습니다. ‘아, 이것이 사람과 로봇의 다른 점이겠구나.’

이때 초월4가 말했습니다. “그런 경우는 우리들 로봇에 저장된 정보에 다 있습니다. 그 점에서 우리 로봇과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다성은 머쓱해졌습니다. ‘저런 것도 인공지능이 해낼 수 있단 말인가!’

빙청 선인이 이어서 말했습니다. “아, 그렇게 사람을 각종 유형별로 분류하여 행동 양식별로 매뉴얼을 만들어놓을 수도 있겠군요. 그러나 사실은 저기 아리따운 아가씨를 볼 때, 보는 사람이 누군가에 따라서만 느낌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듣고 인공지능 로봇들은 다시 삐리리리 소리를 냈습니다.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습니다. 인공지능 로봇들은 인간보다 몇 백배 몇 천배 더 향상된 기능을 발휘하도록 만들어졌는데도 빙청 선인이 자신들을 인간처럼 느낄 수는 없다고 말하니까 속이 상하는 것 같았습니다.
고요2 2018.01.22 19:09
빙청 선인이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사람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때, 이런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합니다. 무엇인가 하면 바로 한 순간 이전의 내 마음 상태가 어떠했는가에 따라 느낌이 영향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아까 그 젊은이가 바로 한 순간 이전에 (예를 들어 1초 전에) 화가 났다면 지금 이 순간 (1초 후에) 저기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더라도 그 젊은이는 기쁨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괴로움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비일비재했습니다. 즉 다성이 기분 좋을 때는 모든 것이 용서되고 좋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다성이 몹시 화가 나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싫고 괜히 심술이 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저기 아리따운 아가씨를 보았을 때 생기는 느낌은, 그 사람이 남자냐 여자냐 젊은이냐 노인이냐 아니면 한국 사람이냐 서양 사람이냐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고, 바로 한 순간 이전의 내 마음 상태가 어떤 가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젊은이인가 노인인가, 한국 사람이냐 서양 사람이냐 하는 것은 그 다음 (과정의) 문제일 것 같았습니다.”

인공지능 로봇들이 다시 삐리비리 소리를 냈습니다. 과부하가 걸린 모양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이 새로운 칩을 넣었습니다. 로봇들이 다시 활기를 되찾았습니다.

초월4가 질문했습니다. “인공 지능이 도달할 수 없는 인간만 가지는 특별한 영역이 있나요?” 빙청 선인이 대답했습니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마음을 가지지 못한 인공지능이 알 수 없는 영역이 있습니다. 느낌은 조금 전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한 순간 이전의 삶의 과정이 내면에 쌓여 그것이 눈으로 형상을 볼 때 영향을 미친다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내부에서, 아까 생긴 그 느낌을 분별해서 아는 어떤 과정이 진행됩니다. 즉 인식의 가공 과정, 또는 느낌을 분별해서 아는 과정이 진행되는데, 이것은 과학의 영역이 아닐 겁니다.”

로봇들은 생각했습니다. ‘선인님께서 들려주시는 말씀을 정보로 처리하여 가공하면 우리도 사람처럼 할 수 있을 거야.’ 그러나 빙청 선인은 로봇이 그렇게 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의 내적 영역에서 진행되는, 느낌을 분별해서 알아 앎이 결과 되는 과정과 마음이 형성되는 과정은 ‘눈, 귀, 코, 혀, 몸이라는 감각기관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 과정은 과학이 미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마음이 몸과 함께 할 때에만 과학이 (몸과 함께 한 그) 마음만을 탐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마음이 몸과 함께 하지 않고 마음의 내적 영역에서만 활동할 때, 그 영역은 지혜로써 알아진다고 말할 뿐입니다.”
고요2 2018.01.22 19:10
인공지능 로봇 ‘초월1, 2, 3, 4’를 만들었던 과학자들이 이들보다 훨씬 뛰어난 인공지능 로봇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한 달을 걸려 만들었는데 이름을 ‘신비’라고 지었습니다. 수소문 끝에 빙청 선인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칠지와 다성과 다성 일행들만 있었습니다. 빙청 선인과 제자들이 좀 떨어진 곳에서 낮 동안의 홀로 앉음을 닦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과학자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머뭇거리다가 과학자들은 ‘신비’를 소개시켜주면서 한 달 전에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하자고 했습니다. 누가 빙청 선인을 대신해서 신비와 토론할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모두 칠지라고 하자 ‘신비’는 칠지 앞으로 와서 자신을 소개하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인공지능 로봇 신비가 먼저 말했습니다. “지난 번 대화에서 그쪽에서는, 아무리해도 인공지능은 인간과 같은 느낌을 느낄 수 없다고 했었지요. 그리고는 예를 들기를, 한 순간 이전의 내면의 상황이 바로 지금 보는 일에 영향을 준다고 했었지요. 또 느낌을 분별해서 아는 과정은 몸의 작용과 관계없이 마음 내면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라서 과학이 탐구할 수 없다고 했었지요. 정말 그렇게 주장하셨나요?”

칠지는 자못 긴장했습니다. 첫 말부터 신비의 능력은 초월1, 2, 3, 4를 훨씬 능가하는 것 같았습니다. 칠지 자신도 지난 번 토론에서 무엇인가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을 신비가 들고 나왔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신의 공부를 향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 같아서 칠지는 집중하여 토론에 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비가 말했습니다. “지난 번 그쪽에서, 예를 들어 여기 어떤 젊은이가 있는데, 바로 앞 순간에 분노에 휩싸였다면 다음 순간 미녀를 보아도 기쁨이 안 일어날 수도 있다고 했었지요. 그런데 반대의 경우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여기에 어떤 할머니가 계시는데, 마찬가지로 화가 잔뜩 났어요. 그러다가 손녀가 웃는 것을 보고 화가 눈 녹듯이 사라지고 기쁨이 일어났어요.”

당시에 칠지도 바로 그 부분이 의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날 밤 칠지는 오래 동안 생각했는데, 그날 내린 임시 결론을 말했습니다. “예, 그런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그 경우에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할머니는 죽 화가 나 있었는데 이제 그만 화를 내자면서 화를 떨쳐내려는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즉 바로 앞 순간에는 화난 마음이 아니라 떨쳐버리려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손자를 볼 때는 <화난 마음>이 아니고 <화를 떨쳐내려는 마음>이 되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인공지능 로봇 신비는 칠지의 대답이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냥 넘어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를 시뮬레이션하고 있었습니다.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신비가 말했습니다. “느낌을 경험했으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 아닌지요? 느낌을 다시 분별하여 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요?” 다성도 신비의 말이 옳다고 보았습니다. 즐거움을 즐거움이라고 경험했고, 괴로움을 괴로움이라고 경혐했다면 그것으로 다 된 것이지, 거기에 무엇 다른 과정이 필요할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고요2 2018.01.22 19:11
칠지가 대답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느낌을 경험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각 개인이 가진 내적 경향성에 따라 자신이 경험한 느낌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다성은 칠지가 말한 ‘내적 경향성’이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비관적인 사람은 무엇을 보더라도 늘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낙관적인 사람은 늘 낙관적으로 생각하는데, 이것도 내적 경향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비가 내적 경향성을 잠재성향으로 이해해도 되느냐고 물었고 칠지는 우선 그렇게 이해해도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면서 칠지는 예를 들어 눈으로 미녀를 보았을 때는 두 가지가 생겨난다고 했습니다. 바로 ‘눈의 식(識)’과 ‘느낌(受)’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눈의 식이 생기고 느낌이 생긴 것은 마음이 몸과 함께 한 것이지만, 이제 몸의 작용에 기대지 않고 마음 내부에서만 진행되는 과정들이 있는데, 느낌을 분별해서 아는 것‘도 그렇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느낌을 분별해서 아는 과정에 내적 경향성, 달리 말하면 상(想)이 개입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눈의 식(識)은 마음이라서 활동을 하는데, 마음의 내부에서 아까 생긴 느낌을 상(想)의 개입 하에 분별하여 안다고 했습니다.

다성은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습니다. 그러나 신비는 잘 알아들었는지 핵심으로 파고 들어와 ‘느낌(受)과 내적 경향성(想)과 식(識)인 마음은 결합되어 있지 분리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느낌을 분별하여 알 때 내적 경향성인 상(想)이 개입하여 간섭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습니다. (M43에서 인용 및 변형 이하도 마찬가지임)

칠지는 세 가지가 결합되어 있지 분리되지 않는 것은 책에 나오는 말씀이므로 자신도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느끼는(受) 그것을 상(想)하고 상(想)하는 그것을 분별해서 안다(識)’는 말씀이 바로 다음 줄에 나오니까 자신은 그렇게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칠지가 말을 이어갔습니다. “우리 인간은 욕계(慾界)에 사는 욕계 중생입니다. 그래서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상(想)에 심하게 오염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느낌을 경험하면 그 느낌을 상락아정의 내적 경향성으로 왜곡하여 보게 됩니다. 비유하면 상락아정이라는 안경을 끼고 사물을 보는 것과 같이, 우리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느낌을 ‘항상하다, 즐거움이다, 이 느낌을 가진 것이 나다, 깨끗하다’는 잠재성향을 가지고 보게 됩니다. 이렇게 느낌을 왜곡하여 앎을 만들어냅니다. 이것이 느낌을 분별하여 안다는 과정의 대체적인 뜻입니다. ...”

다성은 칠지의 말을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비는 인공지능에 저장된 정보에서 욕계, 욕계 중생, 상락아정에 관한 자료를 찾아 순식간에 습득했고, 관련된 정보를 가공하여 새로운 정보를 생산해냈습니다. 그러나 신비는 느낌을 분별하여 아는 과정을 자신의 몸 안에서 실현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 과정은 물질의 활동과 상호작용하여 일어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음 내면에서 마음 자체의 활동으로 일어나는 과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