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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識)을 포함한 마음(심, 의, 식)에 대해 생각해보며

고요2 5 385 2018.02.01 08:14

이 글은 오온 중에서 식(識) 뿐만 아니라 마음(심, 의, 식)애 대해, 불교를 공부하지 않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들려주기 위해서

해피스님의 동영상 법문을 듣고 제가 이해한 만큼을 바탕으로 하여 만든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어디에 올려본 글입니다.

이 글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저의 잘못임을 밝힙니다.

 

 

빙청 선인 일행이 도착한 곳은 삼일(三日) 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을 지나가려면 누구든지 삼일 동안 머물러야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빙청 선인 일행은 숙소를 정하고 각자 볼일을 보고 삼일 후에 다시 이곳에서 만나자고 약속했습니다. 빙청 선인과 제자들과 칠지는 참선을 하고 경행을 했습니다. 다성과 사람들은 마을을 이리저리 구경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한참 구경하다가 보니 다성은 혼자였고 일행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습니다.

 

며칠 전 일이 떠올랐습니다. 다성 일행 중 한 사람이 빙청 선인에게 마음이 무엇인지를 뭉었고, 선인은 마음이란 너무 복잡하여 한 마디로 대답하기가 곤란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이란 우선 아는 것이다, 또는 인식(認識)하는 것이라고 해놓자고 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다성도 마음이란 무엇인가?’ 하고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다성이 생각하기에 마음은 눈으로도 볼 수 없었고 귀로도 알 수 없었습니다. 마음은 오직 마음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무엇인지 알려고 하니 잘 되지 않았습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어보기도 하고 논리적으로 추론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국어사전도 찾아보았습니다. 사전에는 참으로 많은 뜻이 나왔습니다. 이 뜻 모두가 마음인지 아니면 어느 한 가지 뜻만이 마음인지 더 알쏭달쏭해졌습니다.

 

벤치가 두 개 보였습니다. 다성이 잠시 쉬려고 벤치에 앉았습니다. 이윽고 젊은이 두 사람이 와서 나머지 벤치에 앉았습니다. 다성을 보고 자신들은 어떤 주제에 대해서 대화하는 중인데 시끄럽게 해드릴지 모르니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다성은 전혀 상관마시고 이야기 나누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마음>에 대해서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이번에는 다성이 말했습니다. 두 분의 대화를 옆에서 들어도 되느냐고, 그랬더니 두 젊은이는 부끄러운 듯 좋으실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젊은이1이 말했습니다. “내가 배운 것을 한번 들어 봐. [보통 사람으로 불리고, 집에서는 철수 아빠로 불리고, 회사에서는 김대리로 불립니다. 하지만 만약 회사에서 사람이나 철수아빠라고 부르거나, 집에서 김대리라고 부르면 어색할 것입니다. 마음도 거기에 맞는 이름을 불러주어야 할듯합니다. 마음은 찟따(), 윈냐나(알음알이), 마노의 명칭이 있다고 합니다. ...]” (○○○○○○○□□ 님의 글에서 인용. cf)-마노를 한자로는 의()라고 번역함)

 

다성은 깜짝 놀랐습니다. 마음이 그냥 마음이 아니고 이렇게 이름이 다른 것으로도 불린다는 것을 처음으로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음이 복잡하고 알기가 어렵다더니 정말로 그런 것 같았습니다. 예전에 다성이 책에서 읽은, 제자가 이 마음이 괴롭습니다 하니까, 스승이 네 마음을 가져 와 보라고 대답했던 내용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옆의 젊은이2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그렇게 이해하는구나. 나는 약간은 다르게 들었어. 한번 들어 봐. [에이치투오(H2O)는 어떤가요? 얼음이라고도 물이라고도 수증기라고도 불리는 이것이 있어요. 이 에이치투오는 어떤 때는 얼음의 상태로 있고 어떤 때는 물의 상태로 있고 어떤 때는 수증기의 상태로 있어요. 조건에 따라 다르게 있어요. 우리 마음도 어떤 상황인가에 따라 어떤 조건인가에 따라 이름을 달리 불러요. 우리 마음은 심()이라고도 식()이라고도 의()라고도 불려요.]” (◊◊◊◊◊◊◊▱▱▱▱ 의 글을 변형하여 인용)

 

다성은 비유 하나를 또 듣게 되었습니다. 얼음과 물과 수증기로 상태가 변하지만 같은 것인 마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두 젊은이는 마음을 세 측면에서 보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이 세 자리에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다니, 도대체 마음이 얼마나 복잡하기에 그러는 것인지.

 

젊은이1이 말했습니다. “내는 문제를 맞추어봐. ‘이것과 다른 단 어떤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 □□ )이다. ( □□ )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조차 쉽지 않다.’에서 ( □□ )에 공통으로 들어갈 말은 무엇일까?” ((A1의 제5)에서 인용)

 

다성도 생각해보았습니다. 너무 빨리 변해서 비유를 드는 것조차 어려운 것은 시간일까 아니면 생각일까 하고 궁리하고 있는데, 젊은이2가 말했습니다. 바로 마음이라고. , 그랬구나 하고 다성도 완전히 수긍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변덕이 심하다는 것을 다성도 이제는 어느 정도 겪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젊은이들이 일어났습니다. 헤어지기 전에 다성은 왜 정신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마음이라는 말을 쓰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신들은 사는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바로 삶의 이야기가 마음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느끼고 의도하고 사랑하고 아껴주다가도 욕심 부리고 화내고 고집부리는 일들이 모두 마음과 깊이 연관되어 있으므로 정신이라는 말 대신에 마음이라는 말을 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는 이야기는 고원하여 먼 데 있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위하는 이것이 삶의 이야기이지, 이것을 벗어나서 머리에서만 상상하여 개념화한 것은 삶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 것은 소설이나 영화 속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마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했습니다.

 

다성 자신이 막연하게 그럴지도 모른다는,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는 소설이나 영화 속의 이야기를, 이 두 젊은이는 분명하게 현실이 아니다, 우리 삶의 이야기가 아니다고 했습니다. 젊은이들이 떠난 뒤에도 다성은 한동안 말없이 벤치에 앉아있었습니다.

 

이제 다성은 한 가지는 들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음은 한자로 심(), (), (), 이렇게 세 측면으로 보는 이론이 있구나.’ 하고. 과연 마음이란 무엇일까? 여기에서 읽은 시(

Comments

고요2 2018.02.01 08:16
詩)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나를 위로하며 / 함민복)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


2 막상 ‘마음이란 무엇인가?’ 자문(自問)해보니 다성은 대답할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에 늘 쓰던 말이었지만 진지하게 물어보니 마음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몸은 직접 볼 수 있으니 말할 수 있는데, 마음은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찾아들어갈지도 몰랐습니다. 다성이 숙소 쪽으로 걸어가는데 풀래카드가 걸려 있었습니다. “뇌○○ 학술발표회, 장소 : 마을 회관, 시간 : 오후 2시”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마을 회관을 들어서니 대학 교수로 보이는 사람들이 조교로 보이는 젊은이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오후 2시가 되자 교수 몇 사람이 주제 발표를 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뇌와 관련지어 마음을 설명했습니다. 뇌가 고도로 발달하면 정신이 출현하고, 그 정신이 활동하면 마음으로도 불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뇌(물질)에 의존한 것이고 뇌를 기반으로 한 것이며, 뇌가 죽으면 정신도 죽고 그러면 정신 활동을 못하니 마음도 따라서 없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이 영원하다거나 영혼이 있다거나 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라고 했습니다. 죽으면 끝이고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습니다.

대부분의 청중들이 환호했습니다. 죽으면 끝이지 죽은 다음 세상이 없다는 말에 너무 좋아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동화로 배워왔던, 자신의 행위에 따라 지옥에 가기도 하고 하늘 세상에 태어나기도 한다는, 이런 유치원생 같은 이야기를 이제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게 되어서 춤이라도 출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몸이 죽으면 마음도 죽어서 끝이라는 말에 실망하여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다성도 대체로 수긍했습니다. 요즘 같은 과학 시대에 뇌가 죽으면 마음도 죽는 것은 당연하다고 보았습니다. 사실 다성은 죽음 이후의 일은 알 수 없으니 살아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이 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오늘 강연을 듣고 나서 다성은, 죽음 이후를 두려워했던 선조들에 비해 오늘날 과학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죽음 이후의 일은 덜 걱정하거나 아예 걱정자체를 안 하게 된다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문제도 풀기가 한결 쉬울 것 같았습니다.

교수들의 주제 발표가 끝나고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교수님들의 강의를 감명 깊게 들었다며 감사와 축하의 인사말을 보냈습니다. 그때 연세 지긋하신 노인 한 사람이 일어나서, 가장 자신 있게 마음은 뇌에서 발생했고 뇌가 죽으면 마음도 죽는다고 발표했던 한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컴퓨터 기계에 나타난 기호나 표식 같은 것 말고, 자신의 마음을 직접 알고 보신 적이 있느냐고.

그러자 그 교수가 대답했습니다. “질문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은 우리가 느끼고 의도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뇌 속의 어느 지점에 딱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이 활동할 때 생겨나는 ‘느낌, 의도, 생각, 가치관 ...’, 이런 것들이 곧 마음입니다. 마음은 이전의 기억과 정보와 새로운 자극을 통해 생성됩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저의 갑작스런 질문에도 불구하고 교수님께서는 얼굴 붉히지 않으시면서 참을성 있게 대답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물을 일이 몇 가지 더 있는데, 혹시 시간이 되시는지요? 다른 질문자가 계신다면 저는 이만 마치겠습니다.” 그 교수가 청중들에게 의중을 물으니, 청중들은 더 이상 질문이 없다고 하여 남은 시간은 노인에게 할당되었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마음은 참 복잡합니다. 너무 빨리 바뀌고 변해서 알기도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접근할 방법이, 마음을 알고 이해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얽혀 있는 것을 특성별로 잠시 들추어서 분류하는 것입니다. 느낌, 의도, 생각, 가치관 등을 들추어내면 마음이 남는데, 그렇다면 이 마음의 특성은 무엇입니까?”
 
노인의 말에 다성은 당황했습니다. 다성은 그동안 느낌, 의도, 생각, 가치관 등이 모두 마음이거나 마음에 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노인은 마치 손에서 살갗, 근육, 뼈, 피, ... 등을 가려내어 특징별로 구분해내듯이, 마음에서도 마음 이외의 것들을 제외시켜놓고 마음 자체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습니다. 느낌, 의도, 생각, 가치관, 마음 등이 덩어리져 있는데서 마음이 가지는 특성만 말해보자고 한 것이었습니다.

교수가 대답했습니다. “참 어려운 질문이시군요. 저는 이렇게 대답 드리겠습니다. 마음이란 느낌, 의도, 생각, 가치관 등을 드러내는(실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수레와 같고 느낌, 의도, 생각, 가치관 등은 수레에 실린 짐과 같습니다.” (저의 생각이므로 사실로 받아들이지 말 것) 그러고 나서 교수는 선생님(어르신)께서는 어떻게 마음을 이해하시느냐고 되물었습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저는 대부분의 우리들 마음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부풀려져 있다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을 첫 번째로 이렇게 정의하겠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마음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부풀려져(오염되어) 있다고.”

청중들이 웅성거렸습니다. 저런 말도 마음의 설명이 되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성도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마음을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오염된 것이라고 하다니, 이런 설명도 마음을 정의하는 것이 되는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교수는 제가 듣지 못한 설명인데 그런 풀이도 있군요 하면서 그 부분은 자신이 몰라서 질의응답을 이어갈 수 없으니 다른 질문이 더 있으시면 하시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교수님께서는 죽은 이후에 다음 세상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하실 수 있느냐고 물었고, 교수는 지금은 과학기술의 시대라서 과학적 사고에 맞지 않는 ‘지옥, 하늘 세상, 다시 태어남’이라는 신념 체계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저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죽음 이후를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리 과학의 시대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은 없습니다.’ 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합리적 사고도 아니고 과학적 사고도 아닐 듯합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남들에게 단정하여 말하는 것은 피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성은 오늘 많은 것을 들었습니다. 마음을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하는 이론이 있었고, ‘느낌, 의도, 생각, 가치관, 마음’이 덩어리져 있는 것에서 마음을 따로 들추어내면 마음의 한 가지 특성이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부풀려져(오염되어) 있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심心)
고요2 2018.02.01 08:22
3 저녁에 다성은 칠지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칠지는 자신도 마음을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는 이론을 배웠다며, 마음을 탐진치로 오염되었다고 보는 것은 심(心), 의(意), 식(識) 중에서 심(心)의 측면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깨끗한 마음이 아니고 탐, 진, 치로 오염된 마음을 원인으로 하여 몸으로도 행위하고 말로도 행위하고 속으로도(마음속으로도) 행위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을 식(識)의 측면에서도 살펴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날 밤 다성은 책을 찾아보고 공책을 찾아보면서 마음이란 무엇인지 계속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깜빡 졸았습니다. 들판에 다성이 앉아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수행자가 삼매를 닦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중학생이 다성쪽으로 달려왔습니다. “살려주세요, 뱀들이 좇아와요!” 수십 마리의 뱀들이 학생 뒤를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다성이 학생을 진정시켜 앉히고, 언젠가 빙청 선인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빠르게 들려주었습니다. “자, 지금부터 이런 마음을 내 보세요.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을 생각해봐요. 또는 어미소가 송아지를 위하는 마음을 생각해봐요. 이것이 자애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저 뱀들에게도 향해 봐요. 저 뱀들에 대한 악의를 버리고, ‘저 뱀들이 행복하기를, 안락하기를, 태평하기를!’ 하고 마음을 일으켜봐요. 진심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우리 그렇게 해봐요.”

학생은 자애의 마음을 일으키려고 애썼고 저 뱀들이 살아있는 동안 행복하기를, 만약 죽음 이후에도 저 세상이 있다면 저 세상에서는 사람으로 태어나거나 하늘 세상에 태어나기를, 그리고 어디서나 행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일으키고 마음을 기울이고 자신의 마음에 충만하게 하고 점점 넓게 했습니다. 얼마쯤 지났을까요? 갑자기 뱀들이 방향을 바꾸어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자 학생도 사라졌습니다.

조금 있으니 수행자쪽으로 아름다운 형상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감촉과 마음속의 것들이 하늘에 쫙 펼쳐졌습니다. 수행자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삼매를 닦아나갔습니다. 천상의 색과 음악, 향기, 음식, 옷들을 보고 그만 다성은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허공에서 그물이 덮쳐왔고 다성은 그물에 걸렸습니다. 악마가 말했습니다. “이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는 수행자를 가두는 그물인데, 엉뚱하게도 탐, 진, 치에 오염된 자가 걸렸군.” 하면서 다성을 날려버렸습니다.

다성이 떨어져나간 곳은 아주 큰 수레 위였습니다. 수레 주위에는 독사와 독충과 늑대와 표범이 가득했습니다. 수레를 몰던 마부가 사람들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까만 옷을 입은 동자(童子)로 변했습니다. “제가 내는 문제를 하나라도 맞힌 분들은 안전한 곳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더니 공중으로 치솟아 방을 하나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갔습니다. 밖에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방안에서 소리만 들려왔습니다.

“저는 지금 옷을 바꿔 입었습니다. 무슨 색깔일까요?” 아무도 못 맞추었습니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자가 다른 문제를 냈습니다. “지금 저는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제목이 무엇일까요?” 벽으로 막혀있어서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도 못 맟추었습니다. 동자가 또 다른 문제를 냈습니다. “저는 지금 향수를 뿌렸습니다. 어떤 냄새일까요?” 사람들이 있는 수레 위까지 냄새가 안 나서 아무도 못 맡았습니다. 다시 문제를 냈습니다. “저는 지금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어떤 맛일까요?” 이 문제도 못 맞추었습니다. 다시 문제를 냈습니다. “저는 지금 신비한 돌을 손에 쥐었습니다. 어떤 감촉일까요?” 아무 힌트도 없이 이런 문제를 맞히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했습니다.

마침내 동자가 마지막 문제를 냈습니다. “지금 제 마음 상태는 어떨까요? 제 마음을 알 수 있나요?” 신통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다성처럼 마음이 오염된 범부는 남의 마음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아까 들판에 있던 수행자가 공중에 모습을 나타내더니 동자쪽을 향해 말했습니다. “그대의 마음은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입니다.” 동자가 말했습니다. “어떻게 제 마음이 삼매에 들지 않은 마음이라고 아십니까?”

수행자가 말했습니다. “... 그는 이와 같이 마음에 삼매에 들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활발발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남의] 마음을 아는 앎(타심통他心通)으로 마음을 향하게 하고 기울게 합니다. 그는 자기의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어 압니다. ... ((D2)에서 인용 및 변형)

동자가 변해서 다시 마부로 돌아왔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꿈을 꿨나 봅니다. 다음 날 다성은 삼일 마을의 도서관에 가서 컴퓨터로 찾아보았습니다. 마음에서 식(識)의 측면을 알아보기 위해서 ‘심의식, 식, 알음알이’ 등의 항목을 검색했더니 참으로 많은 자료들이 나왔습니다. 그중에서 다성은 지금 여기에서 지혜롭게 마음을 기울여서 알 수 있는 것들만 프린트해왔습니다. 다성은 천천히 뜻을 음미하며 읽었습니다.

“... 어떤 것이 식(識)인가? ... 여섯 가지 식의 무리가 있나니 형상(빛, 모양)에 대한 식(識, 알음알이), 소리에 대한 식, 냄새에 대한 식, 맛에 대한 식, 감촉에 대한 식, 담마에 대한 식이다. ... 이를 일러 알음알이(識)이라 한다. ...” ((S22:56)에서 인용)

(다성은 생각했습니다. ‘아, 그러니까 내가 색깔과 모양을 아는 것, 소리를 아는 것, 냄새를 아는 것, 맛을 아는 것, 감촉을 아는 것, 마음 속에 떠오르는 것 등을 아는 것, 이런 것이 마음의 한 측면인 식(識)이구나.’ 그래서 다성은 마음이란 식의 측면에서는 ‘아는 것’이라고 한번 이해했습니다.)

“... 그러면 왜 알음알이(識식)라고 부르는가? 식별한다고 해서(알아서 분별한다고 해서) 알음알이라 한다. 그러면 무엇을 식별하는가? (예를 들어보면) 신 것도 식별하고 쓴 것도 식별하고 매운 것도 식별하고 떫지 않은 것도 식별하고 짠 것도 식별하고 싱거운 것도 식별한다. ... 이처럼 식별한다고 해서 (알아서 분별한다고 해서) 알음알이(識)라 한다.” ((S22:79)에서 인용 및 변형)

(다성은 : 얼음, 물, 수증기가 서로 상태는 다르지만 같은 것을 지칭하듯이 심(心)과 식(識)은 상태는 서로 다르지만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뜻을 음미했습니다. 눈을 감으면 형상에 대한 식(識, 알음알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귀를 막으면 소리에 대한 식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코를 막으면 냄새에 대한 식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혀를 막으면 맛에 대한 식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몸을 막으면 감촉에 대한 식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고요2 2018.02.01 08:24
4 마노를 막으면 담마에 대한 식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마노와 담마를 이해하자면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다성은 우선 넘어가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의 한 측면은 아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라고 식별하는 것이었습니다. 저것이 무엇이라고 알아서 분별하는 것이었습니다.)

“... ‘알음알이(識), 알음알이(識)’라고 하는데, 무슨 이유로 알음알이라고 합니까?”
“... ‘분별해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알음알이라고 합니다. 무엇을 분별해서 알까요? (예를 들면) ‘즐거움’이라고도 분별해서 알고, ‘괴로움’이라고도 분별해서 알고,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음’이라고도 분별해서 압니다. ... ‘분별해서 안다, 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알음알이(識)라고 합니다.” ((M43)에서 인용 및 변형)

(다성은 분별해서 아는 것은 모두 알음알이(識식)라고 생각했습니다.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도 마음을 기울이면 어느 정도 분별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도 식(識)이라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식으로 작용할 때는 : 보아서 알고, 들어서 알고, 냄새 맡아서 알고, 맛보아서 알고, 감촉해서 알고, 마노로 분별해서 안다고 이해했습니다. (다성은 우선 여기서 마노(意)는, 눈 귀 코 혀 몸으로 아는 것 말고, 마음이 마음에 떠오르는 것을 분별해서 알 때 이름을 마음 대신에 마노로 부른다고 해놓았습니다.) 그랬습니다. 아는 것, 그것도 바로 마음이었습니다. 눈을 감으면 모르지만 눈을 뜨면 나무도 알고 바위도 알고 자동차도 알았습니다. 바로 이것도 마음이었고 이때는 이름을 식(識)이라고 불렀습니다.)

다성은 오늘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감촉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것들을 분별하여 아는 것은 고민할 것도 없이 그냥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마음이 식(識)으로 활동하는 것이라고 하니 새삼 뜻깊은 사실이었습니다. 저녁에 다성이 칠지에게 오늘 알게 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자 칠지가 잘 하셨다며 질문을 하나 했습니다.

“그런데 만약 누가 와서, ‘마음에는 무의식이 있습니다. 잠재의식도 있습니다. 초월의식도 있습니다.’라고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이 말에 다성은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이제 자신이 무엇인가를 좀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칠지가 이런 문제를 낸 것이었습니다. 다성은 머리를 긁적였습니다. 그러자 칠지가 M38을 읽어보라고 하면서 책을 빌려주었습니다. 다성은 제자리에 돌아와서 해당부분을 찾아 보았습니다.   
“... 알음알이(識식)는 조건을 반연하여 생기는데, 그 각각의 조건에 따라 알음알이는 이름을 얻는다. 알음알이(識)가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눈의 알음알이(眼識)라고 한다. 알음알이(識)가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귀의 알음알이(耳識)라고 한다. 알음알이(識)가 코와 냄새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코의 알음알이(鼻識)라고 한다. 알음알이(識)가 혀와 맛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혀의 알음알이(舌識)라고 한다. 알음알이(識)가 몸과 감촉을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몸의 알음알이(身識)라고 한다. 알음알이(識)가 마노(意)와 담마(法)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마노의 알음알이(意識)라고 한다.”

(다성은 생각했습니다. 만약 ‘무의식, 잠재의식, 초월의식’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들은 모두 마노와 담마의 범위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알음알이(識식)가 마노(意)와 담마(法)를 조건으로 하여 일어나면 그것은 마노의 알음알이(意識)라고 한다.”는 대목을 여러 번 읽고 그 뜻을 음미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마노는 마음인데, 현재의 내 마음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분별해서 알 때 붙여주는 이름이다. 마치 여기에 김 길동이 있다면 그를 <사람>이라고도 하고 <철수 아빠>라고도 하고 <김 대리>라고도 하듯이, 또 눈, 귀, 코, 혀, 몸을 감각기관으로도 말하듯이, 마음도 자신의 내면을 볼 때는 이름을 마음이라고 하지 않고 마노라고 하는구나.’ 하고.

그렇다면 현재의 마음(마노)이 자기 내면의 현상을 분별해서 알 때, 거기에는 나의 <마노>가 분별해서 안 것들만이 있지, 거기에 다른 마노에 의해서 생긴 다른 상태의 내용들이 있을 수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내 눈이 갑자기 망원경 눈이 되어서 저 멀리 보는 일은 없듯이, 현재의 내 마노(마음)가 ‘무의’라는 마음으로 바뀌어서 ‘무의’의 알음알이(無意識무의식)가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현재 마음이 ‘잠재의’라는 마음으로 바뀌어서 ‘잠재의’의 알음알이(潛在意識잠재의식)가 일어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내 현재의 마음(마노)이 변해서 ‘초월의’가 되어 ‘초월의’의 알음알이(超越意識초월의식) 같은 것이 생길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몇 시간 후에 다성은 칠지에게 책을 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했던 것을 말했습니다. 칠지는 자신이 도달한 결론도 그렇다고 다성의 생각에 동의해주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이 ‘무의식’이라든가 ‘잠재의식’이라든가 ‘초월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별해서 안다’는 것에 해당하는 식(識, 알음알이)이 아니고, 인간에 잠재해있는 잠재성향이라고 부르는 것이 낫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이어서 칠지가 비유를 하나 들어주었습니다. 물길을 계속해서 동쪽으로 내면 마침내 물길이 동쪽으로 흐르듯이, 사람도 계속해서 어떤 쪽으로 바라보고 느끼고 의도하고 생각을 일으키고 행위한다면 그쪽으로 삶이 흘러갈 것이고 그쪽으로 무엇인가가 쌓일 것이고 결과물들이 잠재하게 될 것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무의식이라거나 잠재의식이라거나 초월의식 등의 이름으로 부를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의 마음(마노)을 가지고 담마(법)를 설명하면 충분하므로, 마음을 미지(未知)의 것으로 바꾸어 설명하는 그런 개념은 그냥 놓아두고 공부하지 말자고 제안했습니다. 다성도 칠지의 말에 수긍하고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잠을 청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 배우고 알게 된 것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마음은 현재 어떤 조건에 있는가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는구나, 마치 어떤 상황에서는 얼음이라고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물이라고 하고, 어떤 상황에서는 수증기라고 하듯이. 그래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하고 마노로 담마를 분별하여 알 때는 식(識)이라고 하는구나. 한편, 배우지 못하고 성인들의 가르침을 듣지 않아서 앎이 없는 다성과 같은 사람들은 : 그런 식(識)이 어떻게 어떻게 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물들게 되는데 그때는 이름을 심(心)이라고 하는구나. 이렇게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있으니 다성과 같은 사람들은 : 아 마음이 괴롭다, 마음이 우울하다, 마음이 슬픔으로 가득차 있다 등의 말을 하게 되는구나.’
고요2 2018.02.01 08:31
5 다음 날 오전에 다성은 다시 삼일 마을의 도서관에 갔습니다. 책을 읽다가 한 대목을 보았습니다. “한훤당 김굉필이 ‘마음이 어느 곳에 있는가?’ 하고 물으니. 일두(정여창)는 ‘있지 않는 곳도 없고 또한 있는 곳도 없다.’ 하였다. (... 寒暄堂曰 心在何處 一蠹曰 無乎不在 亦無有處 : 해동속소학, 성백효 역주, p.238)

다성은 그저께와 어제는 마음을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식(識)과 심(心)을 배워서 지식이 조금 쌓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저 위의 글을 만나니 또 모르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다시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의기소침해 있는데 갑자기 한 가지 어떤 앎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모른다고 하면 아는 것도 모르게 된다. 그러나 이제부터 아는 것은 안다고 스스로에게 말해보자.’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저께하고 어제 다성은 마음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약간의 지식도 얻었고 이해도 좀 했습니다. 그렇다면 다성은 그 지식을 잊어버리지 않고 기억하고 뜻을 깊게 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누가 마음은 ‘있지 않는 곳도 없고 또한 있는 곳도 없다.’고 하시더라도, 주눅들 필요는 없었습니다. 다만 배운 것을 잘 간직하면서 깊이를 더해간다면 자신은 그 정도만큼의 앎은 지닌 셈이라고 깨달았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이 청명하고 햇볕이 따뜻했습니다. 그때 저쪽에서 학생이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눈으로는 스마트폰을 보면서 다성 쪽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더니 가로수 가지가 꺽여진 곳에 목이 딱 걸리고 말았습니다. 학생이 억하면서 비틀거렸고 다성이 달려가서 몸을 잡았습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었고, 스마트폰도 떨어뜨리지 않았습니다. 학생은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는 다시 스마트폰을 보면서 길을 걸어갔습니다.

오늘 아침 칠지가 해준 말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다른 생각에 빠지면 길을 걸으면서도 눈으로는 못 보는 것이 많아요. 그것은 내 마음을, 보아야겠다는 데 두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우리가 눈에 마음을 주목하여 볼 때, 그때는 마음을 마노라고 부른다고 하네요.” 다성은 칠지의 이 말이 번쩍 생각났던 것이었습니다. 저 학생도 마음을 다른 곳에 두었기 때문에 눈으로는 바로 앞의 꺾여진 나뭇가지도 못 보았던 것이었습니다.

다성은 이장님을 찾아가서 마을에 공부를 하신 어른이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이장은 저 언덕 위에 운하불학 노인이 사시는데 그분은 우리 마을에서 학식이 제일 높다고 했습니다. 다성이 그분을 찾아뵐 때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물으니, 그분은 귤을 좋아하신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다성이 마을 시장에서 귤과 떡과 음료수를 사서 길을 물어물어 운하불학 노인을 찾아갔습니다.
 
다성이 자기소개를 하고 몸은 편안하시고 건강하시며 생활에 불편은 없으신지 안부를 물었습니다. 운하불학 노인은 잘 지낸다고 하면서 다성의 안부도 묻고 또 이렇게 음식을 사 가지고 오셨다며 고맙다고 했습니다. 방안은 깨끗했고 작은 책장에는 종교 서적과 유학 서적들이 빽빽했습니다. 다성은 여기 오게 된 연유를 말씀드리고 몇 가지 질문을 해도 괜찮은지를 물었습니다. 운하-노인은 기쁜 마음으로 아는 것이 있다면 대답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성이 질문 드렸습니다. “저는 마음이 세 측면으로 되어 있다는 이론을 막 배웠습니다. 그 이론에 따르면, 마음은 조건에 따라서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린다고 했습니다. 저는 심과 식에 대해서는 막 배웠습니다. 그런데 아직 의(意)애 대해서는 못 배웠습니다. 의를 그 이론에서는 마노(mano)라고 불렀습니다.”

운하-노인이 대답했습니다. “장하십니다. 그런 이론도 다 배웠군요. 그 이론은 저기 어디 서쪽에 있다는 한 위대한 영웅의 말씀인 것 같군요. 예, 저도 젊은 시절에 그 이론을 배웠지요. 처음에는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사유하고 공부하여 이제는 조금이나마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선 마음이 몸과 함께 할 때, 그때의 마음을 마노(mano, 意의)라고 이해하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다성은 마노(mano)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한자로 의(意)를 풀라고 하면 ‘소리 음(音) + 마음 심(心)’이니까 ‘마음에서 이리저리 가려고 소리내는 것’이라고 풀면 그럭저럭 될 텐데, 마노라고 하니까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마음이 몸과 함께 할 때 마노라고 부른다고 하니 무슨 뜻인지 점점 모르게 되었습니다.

운하-노인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를 들어 두 사람이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때 한 사람은 길거리에 떨어진 지폐를 보았습니다. 5만 원짜리였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며 걸어서 지폐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 차이는 무엇인지요? 바로 한 사람은 눈에 마음을 두었고, 다른 한 사람은 귀에 마음을 두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몸의 감각기관에 주의를 둘 때, 또는 몸의 감각기관에 주목할 때, 그때의 마음을 마노(mano, 의意)라고 부릅니다.”

다성이 생각하기에 심의식(心意識)이라는 이론은 보통 우리가 아는 사실을 자꾸 새로운 용어로 설명하려는 것 같았습니다. 일상에서 한눈팔면 넘어지는 것은 예사듯이 자기가 하는 그 일에 집중하지 않으면 실수하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런데 심의식의 이론에서는 그런 당연한 사실에 자꾸 어떤 의미를 부여해서 새로운 이름을 붙이는 것 같았습니다. 과연 이런 일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 다성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운하-노인이 이어서 말했습니다. “또 이런 측면도 있습니다. 우리가 몸으로 행위하기도 하고 말로 행위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때는 자기 마음속에 있는 것을 몸으로 드러내고 말로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때 몸으로도 말로도 드러내지 않고 그냥 마음속에서 사유하다가 그만 둘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도 마음을 마노(意)라는 용어를 붙여서 사용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유는 심(心)이 자신 말고 다른 대상(식(識)을 생겨나게 만든 처음 그 대상)으로 향해가서 진행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운하-노인은, 마음이 감각기관으로 사용될 때 짝을 맞추기 위해서 붙인 이름인, ‘마노(意)-담마(法)’할 때의 그 마노는 여기 논의에서 제외하자고 했습니다.

다성은 운하-노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운하-노인의 이 말씀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성이 전혀 못 알아듣자 운하-노인이 그 부분은 넘어가자고 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운하-노인이 심의식을 전체적으로 설명해 주었습니다.
고요2 2018.02.01 08:32
6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하려면 마음을 눈에 두거나 귀에 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을 눈에 두어 보려고 하거나 귀에 두어 보려고 할 때는 <마노(意)>라고 부릅니다. 즉,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에 주목하여 대상을 감각하려고 할 때는 마음을 마노(意)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제 마노가 눈에 주목하여 저기 형색을 보면 눈의 식(識)이 생겨납니다. 즉 ‘저것은 자동차다.’ 하고 알게 됩니다. 이때는 분별하여 아는 마음이니까 <식(識)>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눈, 귀, 코, 혀, 몸, 마노’로 각각 ‘형색, 소리, 냄새, 맛, 감촉, 담마(法)’를 분별하여 알면, 그때는 각각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라는 새로운 마음)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다성은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운하-노인이 계속 말했습니다. 이렇게 생겨난 식(識)은 자기 활동성을 가져서 내면에서 어떤 활동을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은 죽어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서 펄떡펄떡 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활동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식이 내면에서 어떤 인식 과정을 더 진행하는데, 우리 같은 범부는 이 과정에서도 잘못된 것들이 개입하여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만들어낸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식은 이름이 심(心)으로 불린다고 했습니다. 우리들 마음은 대개 이렇게 탐, 진, 치로 물들어있는 심(心)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오염된 상태의 마음(心)을 원인으로 (처음 식이 일어나게 한 그 대상을 향해 행위하러 가는데) 사유하기만 하고 그치는 경우도 있고(意業), 말로 드러내는 경우도 있고(口業), 그것이 몸으로까지 드러내어 행위 하는 경우도 있다고(身業) 했습니다.

다성이 운하-노인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예를 하나 들어보았습니다. “여기 한 사람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는 빵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길을 걷는데 어느 날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는 일에 집중하여 빵가게에서 나는 냄새를 못 맡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그냥 편안하게 길을 걸었더니 무슨 냄새가 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코에 주목해서 냄새를 맡았습니다.(마노(意)) 갑자기 향긋한 빵 냄새가 났습니다. 즉, 마노가 코에 주목하여 냄새를 맡았더니 빵 냄새였습니다.(식(識)이 생겨남, 그중에서도 비식(鼻識)이 생겨남)

‘즐겁다’라는 느낌도 발생했습니다. 이제 생겨난 식(識)은 내면에서 빵냄새와 즐거운 느낌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했습니다. 이때 어떤 나쁜 요소들이 이 과정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래서 탐, 진, 치가 생겨났습니다. 이제 이름을 식에서 심(心)으로 바꾸어 불렀습니다. 마음(心)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에 물들었습니다. 이런 물든 마음(心)을 원인으로 하고 조건으로 하여 우리는 행위를 합니다. 빵을 먹고 싶다고 생각만 하다가(意業) 길을 걸어갈 수도 있고, 빵을 먹고 싶다고 말만 할 수도 있고(口業), 빵을 사러 직접 가게에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身業) 그런데 우리는 이런 빵 때문에 탐욕부리고 성내고 어리석음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성이 자신이 이해한 것을 말씀드리자 운하-노인이 훌륭하다고 칭찬해주었습니다. 다성이 조금 더 물어보았습니다. “왜 이렇게 마음을 심의식으로 나누는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말씀 들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운하-노인이 말했습니다. “마노가 감각기관에 주목하여 대상을 볼 때 간섭하는(참여하는) 나쁜 요소가 있습니다. 또 식이 느낌을 분별하여 아는 인식과정에 참여하는(간섭하는) 나쁜 요소가 있습니다.
또 심(心)이 대상을 향해 행위하러 갈 때 단속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마치 팔다리에 병이 나면 팔다리를 치료해야 하고 몸속에 병이 나면 몸속을 치료해야 하고, 뇌에 병이 났으면 뇌를 치료하듯이, 심, 의, 식에 각각 간섭하여 우리를 병들게 하고 나쁜 길로 가게 하는 요소들이 다 다르고, 치유하는 위치도 방법도 각각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구분을 하는 것이지요.“

설명을 듣고 보니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 더 이해되는 것 같았습니다. 다성이 어제 프린트해온 자료를 보여드리며 모르는 것을 또 물어보았습니다. 운하-노인이 안경을 끼고 다성이 건넨 자료를 검토했습니다. 아, 그러고보니 그저께 뇌○○ 학술발표회에서 질문자로 나선 바로 그 노인이었습니다. 운하-노인은 조목조목 짚어주면서 그 뜻을 설명해주었습니다.

이제 다성이 칠지가 말해준 문제를 마지막으로 물어보았습니다. “누가 말하기를, ‘마음에는 무의식도 있고 잠재의식도 있고 초월의식도 있습니다.’고 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 가르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운하-노인이 말했습니다. “무의식을, (마노와 담마를 조건으로 한(意-法)) 의식(意識)말고, 무엇인가 내면에 있는 식(識)이라고 말한 것이라면, 그것은 식의 무더기(識蘊식온)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식의 무더기에는 과거의 식들, 미래의 식들, 현재의 식들이 모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즉 무의식이 아니고 식의 무더기(識蘊)라고 하면 되겠습니다.

잠재의식의 경우에는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가에 따라 2가지로 말할 수 있겠군요. 첫째는 앞에서처럼 식의 무더기(識蘊)로 표현하는 것이고, 둘째는 식(識)에 잠재하는 것은 내적 경향성(想상)이니까 내적 경향성들의 무더기(想蘊상온)로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즉 둘째는,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가치관, 견해, 태도 등이 경향성으로 굳어 잠재한 것을 잠재의식이라고 불렀을 테니, 내적 경향성의 무더기(想蘊)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초월의식은 지혜가 식(識)과 함께 한 상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럴 경우에는 초월의식이라는 말을 하면 이상해지니까 그냥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 부분들은 제가 배운 것을 추론한 것임, 그래서 오류가 있을 수 있음)

다성은 이제 물러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며 큰 절을 올렸습니다. 운하-노인이 언덕길 아래까지 배웅해 주었습니다. 오늘 밤을 지나면 삼일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내일 다시 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삼일 동안 다성은 큰 공부를 했습니다. 마음에 대한 지식을 좀 얻었습니다. 물론 지금 다성은 마음을 직접 알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지혜로운 마음일 때만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잠시 앉아 며칠 동안 배운 지식으로 질문과 답을 하나 만들어보았습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마음이란 아는 것이고, 배우지 못한 다성과 같이 무식한 범부에게 마음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인들께서는 이런 탐, 진, 치를 제거하셔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고 빛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