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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에 대해 동영상 법문을 들으며

고요2 3 311 2017.10.23 18:39

이 글은 해피스님의 깨달음 관련 동영상 법문을 듣고 제 나름대로 간략히 생각해본 글입니다.

중학교 1학년 정도의 학생에게 깨달음에 대해 들려주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해보았습니다.

이름을 가나다다마바사 ... 에서 '가나'를 따와 '가나'라고 지었습니다.

 

2. 깨달음이란 무엇일까?

 

2-1 그동안 잘 있었니? 오늘은 깨달음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해 볼게. 깨달음, 어마어마한 말 같지 않니? 그래, 나에게는 너무 큰 주제야. 그러나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지식의 정보가 넘쳐나니 여기저기서 얻은 내용들을 잘 짜 맞추면 그럭저럭 이야기해볼 수도 있을 거야. 그래서 내가 책에서 읽은 것과 훌륭한 분들로부터 강의들은 것과 내가 생각한 것을 섞어서 오늘 깨달음에 대해 한번 말해 보려고 하는 거란다.

 

우리는 깨달음을 보통명사로 사용한다고 해. 즉 책상, 나무, 버스처럼 누구나 부를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해. 그래서 초등학생도 어떤 것을 궁리하다가 , 이것을 깨달았다!’하고, 중고등학생들도 어떤 문제를 풀다가 , 드디어 깨달았다!’고 해. 어른들도 그 사람이 그런 말을 한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해.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깨달음 : 진리나 이치 따위를 생각하고 궁리하여 알게 됨. 예문) 깨달음을 구하다, 깨달음을 얻고자 고행(苦行)하다.’고 나와. 그러니까 조금 더 엄밀하게는 진리나 이치를 알고 보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하는가 봐. 이런 진리나 이치는 초등학생도 중고등학생도 어른도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또는 배워서 조금씩은 알고 있을 거야.

 

그런데 오늘 내가 말하려는 깨달음은 성인의 깨달음이야. 성인(聖人)은 사람 중에서 으뜸인 분들이야. 앎과 행동에서 최상인 분들이셔. 이분들 성인의 깨달음 중에서 나는 오늘 특히 한분의 깨달음과 관련하여 말하려고 해. 진리나 이치를 (나름대로의 방법을 통해서) 아신 분들, 그분들의 깨달음 중에서 어느 한 분의 깨달음에 대해서야.

 

세상에는 공자님도 예수님도 부처님도 성인이라고 알려져 있어. 이중에서 공자님은 학문 쪽에서 주로 언급되고, 예수님은 하나님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되고, 부처님은 깨달음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돼. 그래서 나는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말해 보려고 해. 공자님과 예수님에 대해서는 내가 잘 모르고, 부처님에 대해서는 그쪽 방면의 책을 좀 읽고 강의도 좀 들어서 그럭저럭 말할 수 있거든.

 

참고로 이렇게 물을 수 있어. “공자님, 예수님, 부처님, 이 세 분의 가르침은 모두 같습니까?”하고. 그럼 나는 그 질문이 너무 포괄적이라서 이렇게 다른 방식으로 묻고 싶어. “세 분의 가르침은 <의미><표현>에서 모두 똑 같습니까?”하고. 그리고 우리가 물을 때는 이런 형식도 있어. “이 세분의 가르침에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하고, 또 이렇게 물을 수도 있어. “이 세분의 가르침은 (어떤) 차이점이 있습니까?”하고. 이렇게 우리는 물음을 통해서도 배워나가는 거란다.

 

 

2-2 , 그럼 이제부터 내가 읽고 배우고 듣고 생각한 것들을 잘 짜 맞추어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 이야기해볼게. 명상이나 수행의 세계에는 여러 스승들이 있어. 그 중에서 누구의 깨달음입니까?’라고 하면 우리는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하고 이야기를 시작할거야. 그 말은 다른 스승들의 깨달음은 우리가 잘 모르니까 놓아두고, 그래도 그나마 책을 좀 읽고 강의를 좀 듣고 생각을 좀 해본 경우는 부처님이니까,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서 한번 볼게.

 

부처님은 스스로를 여래라고도 부르셨다고 해.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고구려의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이 있고, 백제의 서산 마애 여래 삼존상이 있어. 이때 여래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로 부처님이 스스로를 부르는 말이라고도 해.

 

그리고 부처님은 이렇게 정의(定義)된다고 해. “아라한(阿羅漢), 정등각(正等覺),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조어장부(無上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 세존(世尊)’이라고 불리며, 이것이 여래(如來)의 깨달음의 특성이라고도 말한대. 그러니까 포괄적 의미의 부처님은 여래(如來)’이고, 여래(如來)의 깨달음을 아라한, 정등각,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조어장부, 천인사, , 세존의 아홉 가지 단면적 특성의 구족으로 정의한다고 해.

 

한자어로 되어 있어서 많이 낯설고 어렵지? 그렇다면 가나는 백과사전에서 붓다구덕을 찾아보니까 이런 항목이 나온다고 지식삼아 그냥 듣고 지나가면 된단다.

 

여기서 뜻을 대충 살펴볼게. 인터넷 어느 곳에서 그 뜻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나와. 여래는 - 진리로 오신 분, 또는 그렇게 가신 분이라고 나오네. 다음은 「①아라한-번뇌를 떠난 자이고, 정등각-완전한 깨달음을 이룬 자이고, 명행족-밝음과 실천을 갖춘 자이어서, 선서-

Comments

고요2 2017.10.23 19:38
앞서 가 닿은 진리의 자리를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길을 제시하였고, ⑤세간해-그럼으로써 세상일을 잘 알고, ⑥무상조어장부-모두를 잘 이끌어, ⑦천인사-천상과 인간의 스승이라고 찬탄 받는 자, 그가 곧 ⑧불-깨달은 자(佛, 부처)이고, ⑨세존-존귀한 존재」 라고 나오네.

어때, 좀 어렵지? 그래서 우리는 용어 설명은 넘어갈게. 다음으로 부처님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묻는다고 해. “세상에 어떤 것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이 출현합니까?”하고. 그러면 대답은 “태어남, 늙음, 죽음이라는 세 가지 법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에 여래 아라한 등정각이 세상에 출현합니다.” 한다는구나. 

만약 이 세상에 태어남, 늙음, 죽음이라는 이런 세 가지 것이 없다면 부처님은 이 세상에 출현하지 않는다고 해. 여기서 부처님의 깨달음의 성격이 나오는 것 같아. 누가 이 세상에 태어나면, 살아가면서 즐거움도 경험하고 괴로움도 경험할 거야. 부처님은 존재들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근심, 비탄, 괴로움, 절망, 고난 등과 늙음, 죽음 등을 극복하려고 수행했대.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부처님은 “태어남, 늙음, 죽음,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 등 온갖 괴로움을 모두 극복하셨다고 해. 그래서 마침내 진리를 드러내 보이시고 몸소 청정한 삶을 실천하셨다고 해. 그리고 불교의 진리는 사성제이고, 그 실천 방법은 팔정도라고 하네.

우리가 세계사를 공부하면 중국의 공자님의 사상도 좀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도 좀 배우고, 부처님의 말씀도 좀 배워. 거기에 보면 아마 불교는 사성제와 팔정도라고 나올 것 같아.

내가 찾아보니, 사성제는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인데, “①이것이 괴로움이다, ②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다, ③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 ④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8가지 바른 길이다”고 해. 팔정도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인데,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계, 바른 정진, 바른 사띠(念), 바른 삼매(定)’라고 해.

그럼 이것이 부처님 깨달음의 전부일까? 아니라고 한단다. 모두 사성제와 팔정도에 포섭되겠지만, 세부적으로 ‘연기, 오온, 육입, 오근, 오력, 사여의족, 해탈, 열반, ...’ 등 많은 가르침이 있다고 해.
고요2 2017.10.23 19:39
2-3 그래, 부처님 깨달음의 특징은 ①첫째 매우 심오해서 우리가 알기는 어려워.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혼자 생각하셨대. ‘내가 증득한 이 법은 심오하여 알아차리기도 이해하기도 힘들며, 평화롭고 숭고하며, 딱까(takka)의 영역을 넘어서 있고 미묘하여 오로지 현자만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집착을 좋아하고 집착에 물들어있고 집착에 탐닉하고 있다. 집착을 좋아하고 집착에 물들어있고 집착에 탐닉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즉 서로 조건 지워져 있음, 저 연기(緣起)에 토대하기는 어려우리라. 또한 모든 행(行)을 그침, 모든 움켜쥠을 놓아버림, 갈애의 멸진, 이탐(離貪), 소멸(消滅), 열반을 토대하기란 어려울 것이다. 설혹 내가 법을 가르친다 하더라도 저들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나만 피곤하고 나만 성가실 뿐이다.'라고.

이렇게 부처님이 법을 설하지 않으려고 생각할 때, 어떤 범천이 나타나서 “대덕이시여, 세존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선서께서는 법을 설하소서. 오염이 적게 태어난 중생들은 법을 듣지 않으면 쇠퇴할 것이지만, 법을 들으면 법을 아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하고 청했대. 여기서 법(法)이란 ‘담마’라고도 하고 ‘다르마’라고도 하는데,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고 해. 

그래서 부처님이 법을 설하셨는데, 부처님이 설한 법의 특징이 어떤지 찾아보았어. 부처님이 설하신 법은 “스스로 보아 알 수 있고, 시간이 걸리지 않고, 와서 보라는 것이고, 향상으로 인도하고, 지자(智者)들이 각자 알아야 하는 진리입니다.”라고 나와. 또 부처님 가르침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마지막도 좋다고 나와.

부처님 제자들은 어땠을까? 제자들은 스승이 가르친 것을 배우고 실천하여 어떤 목표점에 도달했을까? 답은 그렇다고 해. 많은 제자들이 번뇌를 제거하여 아라한이 되었다고 해. 그러니까 스승에 의해 깨달음이 알려졌고, 스승이 거기에 이르는 길을 제시했고, 제자들은 스승이 알려준 길을 따라 실천하여 열반을 실현했다는 거야.

이렇게 부처님 깨달음의 ②또 다른 특징은 부처님 혼자서만 깨달은 채로 돌아가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도 스승이 알려준 길을 따라 걸어가서 깨달음을 성취했다는 점이야. 과학에서 실험 조건을 같게 하면 누가 실험을 하든 똑 같은 결과가 나오듯이, 부처님이 깨달으신 것을 제자들도 똑 같이 깨달았다는 점이야. 물론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고 해.

우리 수준에서 보면 첫 번째 차이는 부처님은 처음으로 깨달음을 얻었고, 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수행해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라고 해. 두 번째 차이는 알고 보는 양의 차이라고 해. 부처님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것을 깨달았고, 제자들은 부처님의 양에는 못 미친다고 해.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중생들을 청정함으로 이끌고, 슬픔과 비탄을 끝나게 하고, 괴로움을 소멸하고, 해탈 열반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 설했다고 해. 중생들을 청정함으로 이끌지 못하고, 슬픔과 비탄을 제거하지 못하고, 괴로움을 소멸하도록 못하고, 해탈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는 내용들은 부처님이 설하지 않았다고 해.

비유하면 저기 히말라야 산에 있는 흙하고 이 손톱 끝에 올려놓은 먼지 덩어리하고 어느 것이 더 많은가 물으면 당연히 히말라야 산에 있는 흙이라고 대답할 거야. 손톱 끝의 먼지 덩어리는 히말라야 산에 있는 흙하고는 비교 자체가 안 될 정도로 적어.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사람들을 위해 설하신 가르침은 그 양이 마치 손톱 끝의 먼지 덩어리만큼 밖에 안 된다고 해. 왜냐하면 부처님이 설하지 않은 그 많은 것들은 중생들의 삶을 향상시키지 못하고 해탈 열반으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해. 

부처님 깨달음의 또 다른 특징은 ③번뇌를 제거하는데 남이 대신 못 해주고, 오직 자신이 제거해야 한다는 점이야. 내게 있는 괴로움과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오직 내 스스로 직접 노력해야 하지, 다른 사람이 대신 닦아줄 수가 없다는 거야. 부처님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고 사람들을 그 길로 이끌 수는 있어도, 그 길을 직접 걸어가는 것은 • 팔정도를 직접 닦아가야 하는 것은 오직 자신이라고 말한대.

남이 나 대신 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괴로움을 대신 제거해주고 내 번뇌를 대신 제거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 그런 일은 현실적으로 없다는 거야. 남이 나를 번쩍 들거나 마차에 태워 해탈 열반의 장소로 옮겨다 놓을 수가 없다고 해. 왜냐하면 해탈 열반은 개별적으로 실현되는 법이라서 그렇다고 해.

그래서 부처님 깨달음은 먼저 자신을 위한 깨달음이고, 번뇌를 제거하려는 사람을 위한 깨달음이라고 해. 그리고 이렇게 해서 깨달으면 깨달은 사람은 세상을 연민하여 법을 설해.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뒤따르면서 자신의 삶을 향상하게 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나날이 괴로움은 줄어들고 행복이 늘어나는 삶을 살게 돼.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부처님의 중생 구제의 방법이라고 하는구나.
고요2 2017.10.23 19:41
2-4. 그래, 사실 지금까지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을 자세하게는 거의 하나도 살펴보지 못했어. 대충 제목만 열거한 형편이야. 업과 윤회에 대해서, 해탈과 열반에 대해서도 거의 하나도 살펴보지 못했어.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이만큼이나마 부처님의 깨달음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았다.

그런데 혹시 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니? ‘깨달음은 사랑입니다.’ 또는 ‘깨달음은 내가 저 우주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는 ‘깨달음은 모든 존재가 하나라는 것을 알고 하나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는 말들을 들어보았니? 내가 한참 공부할 때는 그런 말들을 많이 들어보았어. 그리고 그런 말처럼 되는 것이 깨달음인 줄로 알았어.

그러나 책을 읽다가 보니까 스승들마다 표현이 점점 다른 거라, 그래서 나는 좀 이상하게 생각했어.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스승들마다 표현은 다르지만 그 가르치시는 내용과 의미는 모두 같다.’고 말들을 하니까, 그 당시 나는 미심쩍으면서도 그런가 보다 면서 그 시절을 지나왔어.

가나야, 지금 나는 어떤 입장일까? 그래, 지금은 내 입장이 바뀌었어. 그런 말들은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는 부처님의 깨달음은 아니라고 이제는 분명히 알게 되었단다.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하면, 부처님은 당신의 깨달음의 결과를 그렇게 정의(定義)하지 않으셨다고 배웠기 때문이야. 부처님은 주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제거했다, 탐진치가 멸진되었다.’ 또는 ‘모든 괴로움을 제거했다’ ‘모든 번뇌를 제거했다.’ 라는 식으로 깨달음의 결과를 설명하신다고 해.

부처님이 깨달음의 결과를 들려주실 때는, 인터넷의 어느 곳에서 검색해보니 “모든 행(行)들의 그침이고, 모든 재생을 초래하는 붙잡음을 놓음이고, 갈애의 부숨이고, 이탐(離貪)이고, 소멸(消滅)이고, 열반(涅槃)이다.”는 표현으로도 나오고, “나는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心解脫]과 지혜를 통한 해탈[慧解脫]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최상의 지혜로 알고 실현하고 구족하여 머문다.”고도 나오고, “모든 번뇌를 부수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할 바를 다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참된 이상을 실현했고 삶의 족쇄를 끊었으며 ...” 라고도 나온다고 해.

자, 어때? 이제 우리는 부처님 깨달음의 특징을 대충 짐작할 수는 있겠지? 예를 들어 만약 누가 ‘깨달음은 아뜨만이 브라만과 합일하는 것입니다, 범아일여(梵我一如)입니다.’라고 말하면,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이 사람이 말하는 깨달음은 이 사람의 깨달음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은 아니구나.’하고. 마치 내가 무엇을 보고 “깨달음은 이러합니다.”하고 말하면, 이것은 단지 나의 깨달음일 뿐 부처님의 깨달음은 아니듯이.
 
이제 정리해 볼게. 부처님 깨달음의 내용을 우리 수준에서 말해 보면 이렇게 돼. ①부처님은 자기 존재에 내재한 문제(태어남 늙음 죽음)를 극복하셨어. 예를 들어 우리가 어디서 왔는지 그 태어남의 문제를 극복하셨고, 태어난 존재는 반드시 늙기 마련이고 죽기 마련인 그런 문제들도 해소하셨어. 다르게 표현하면 사람들에게 ②‘괴로움이란 무엇인지,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지, 괴로움의 소멸은 무엇인지,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여덟 가지 바른 길(道)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어.

마지막으로 이것은 여담인데, 이런 일이 가능할까? ‘부처님 같은 분은 하늘을 날기도 하고, 물위를 걷기를 마치 육지처럼 하고, 자신의 전생을 알고, 남의 마음을 알기도 하고, 사람이 죽어서 어디에 태어나는지를 알고, ... 이런 일이 가능할까? 만화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손오공이 여러 명으로 변하기도 하는데, 부처님 같은 분도 여러 명으로 모습을 나타나게 할 수 있을까? 과연 부처님은 그런 능력이 있을까?

어떨 것 같니? 내가 책을 읽으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부처님 당시 다른 사람들도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해. 삼매에서 사선(四禪) 이상 증득한 수행자는 그런 신통력을 행할 수 있다고 해. 신통력은 인간의 법을 넘어선 것이라고 하는데, 이런 능력을 갖춘 수행자는 참으로 대단해. 그러나 이것 하나는 꼭 알고 있어야 해. 우리가 오늘 이야기한 부처님 깨달음의 목표는 “괴로움의 멸진이고, 번뇌의 멸진‘이라고.

참, 여기서 조심할 부분이 하나 있단다. 누가 가나를 보고 ‘당신의 전생은 이러이러합니다.’하고 말하면 어떨까? 나는 그 말을 믿어야 할까? 아니란다. 그 말을 믿으면 안 된단다. 만약 전생이 있다면 자기 자신이 수행을 통해서 깊은 삼매에 들어 알아야 하지, 남이 말해주는 •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해. 내가 알기로는 부처님 제자들은 아무도 ‘남의 전생’에 대해 말하지 않았어. 그러니 나중에 어른이 되었을 때, 누가 가나의 전생을 봐 주겠다고 하면, ‘이 사람은 부처님의 제자처럼 하지 않는구나.’하고 알아야 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