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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을 것이다

고요2 0 288 2018.03.04 14:14

이 글은 예전의 해피스님의 동영상 법문에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그런데 이 글에 오류가 있다면 그것은 모두 저의 잘못임을 밝힙니다.

 

 

지금은 어떤 노인이 성자에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이미 나이가 90이 넘어 늙고 뇌쇠하고 병고에 시달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성자를 뵙고 좋은 말씀을 들을 기회도 갖기 어려울 테니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말씀을 하나 들려달라고 했습니다. 이에 성자가 말했습니다. “참으로 그러합니다. 할아버지여. 지금 당신의 몸은 노쇠하고 병고에 시달리며 거동까지 힘듭니다. 그러므로 할아버지께서는 이와 같이 공부하면 좋겠습니다. ‘나의 몸은 병들었지만 나의 마음은 병들지 않을 것이다.’ 하고 공부하셔야 합니다.” ((S22:1) 참고 및 인용)

 

생각해보니 다성은 몸이 아플 때 마음도 따라 괴로웠습니다. 다성은 이 몸이 항상 그대로 건강한 채로 있기를 바랐는데 사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건강한 이 몸이 병이 나기도 했습니다. 병이 나서 몸이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니 자신에게는 근심, 슬픔, 괴로움, 고뇌, 절망 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다성은 몸이 병들면 마음도 병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자께서는 이 몸이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도록 해보라고 하셨습니다. 과연 그런 방법이 있을 것인지 다성도 알고 싶었습니다. 노인이 빨리 더 물어주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끝내 묻지 않고 그냥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성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지금까지 다성은 이 몸이란 (죽을 때까지 항상 그대로인 채로 있는) 항상된 나 자신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래서 이 몸을 <나 그 자체>라고 보기도 하고, 이 몸을 가진 것이 나 그 자체라고도 보았습니다. 이런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성은 몸이 병들어도 마음은 병들지 않도록 하지 못했습니다. 또 그 방법을 아직은 몰랐습니다.

 

그때 한 여행객이 일어나서 “어떤 것이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은 것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다성은 누가 질문해 주어서 정말 다행이라 여기며 성자의 답변을 기다렸습니다. 성자가 대답했습니다. “여기에 누가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만약 그가 성자들을 친견하고 잘 배우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잘 인도되고 참된 사람의 길에 능숙하면, 몸인 이 물질을 <항상하는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을 가진 것을 <항상하는 자아>라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이 영원불변하는 <자아>안에 있다고 관찰하지 않고, 물질 안에 영원불변하는 <자아>가 있다고 관찰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아>는 물질이다. 물질은 자아의 소유이다.’라는 견해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는 물질이다. 물질은 내것이다.’라는 견해에 사로잡히지 않은 자의 (몸인) 물질은 변하고 다른 상태로 되어가지만 그에게는 근심, 슬픔, 괴로움, 고뇌, 절망 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몸은 병들었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을 것이다.’ 하는 한 가지 경우입니다.” ((S22:1)에서 인용 및 변형)
  
‘아, 그랬군요.’ 다성이 비로소 조금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이해한 것을 더 이해하려고 계속 음미했습니다. 조금 있자 이제 다른 사람들이 성자에게 질문했습니다. 누구는 자신이 너무 가난해서 남에게 베풀 것이 없어서 복을 짓지 못하는데 다른 방법이 있는지를 물었고, 또 누구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평소에 계속해서 생각해야 할 것들이 있는지를 물었고, 또 다른 누구는 성인의 가르침을 듣고 기뻐할 수 있는 기반이 무엇인지를 물었습니다. 이에 성자는 베풂의 다른 종류를 말해주었고, 계속해서 생각해야 할 것 여섯 가지를 말해주었고, 제부끄러움과 남부끄러움을 기반으로 하여 성자의 말씀을 기뻐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다성은 남에게 베풀면서 살아야 한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좀 불편했습니다. 그동안 다성은 남에게 베풀면서 살거나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안이 가난하여 베풀 것이 별로 없었고, 생계를 위해 어린 나이 때부터 여기저기 일하러 다녔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나마 ‘돈을 많이 벌어 나 자신과 가족도 행복하게 하고 부모님도 행복하게 해드리고 형제 친척도 행복하게 해드리고, 수행자들에게도 베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자.’고 상상만 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자께서는 재물이 없어도 베풀면서 살아갈 수 있는 다른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중의 한 가지가, 남들이 자신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고 증오하지 않고 악의를 없게 하도록 자신이 올바르고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이 올바르고 착한 사람이 되는 것이 남에게 ‘두려움 없음, 증오 없음, 악의 없음’을 베푸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베풀고 나면, 그 ‘두려움 없음, 증오 없음, 악의 없음’을 (베푼 그 사람에게 베푼 것이 다시 돌아와서) 나누어 가진다고 하셨습니다. ((A8:39)을 참고하고 인용함) 

 

이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궁금한 점을 다 물어보았나 봅니다. 더 이상 질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빙청 선인이 질문 드렸습니다. “존자시여,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광채가 있어 그것으로 세상은 빛납니까?” 성자가 대답했습니다. “세상에는 네 가지 광채가 있습니다. 낮에는 저 ‘태양’이 비추고 밤에는 저 ‘달’이 비춥니다. 또 ‘불’이 있어 밤낮으로 빛을 발합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깨달은 사람’이 있는데, 그는 빛나는 것 가운데 으뜸입니다.” ((S1:26)에서 적절히 인용)

 

이렇게 깨달음은 밝음이나 빛으로 잘 비유하고, 깨달음의 본질은 지혜인가 봅니다. 다성은 예전에 이 세상에서 가장 밝은 것이 ‘지혜’라고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지혜는 햇빛이나 달빛이 비추지 못하는 곳을 비출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내면의 번뇌를 부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빙청 선인의 제자들도 질문 드렸습니다. 제자1은 재가자의 최상의 행복과 출가 수행자의 최고의 행복을 물었고, 제자2는 삼계(三界)가 무엇인지를 물었고, 제자3은 원인과 조건에 대해 물었고, 제자4는 성인의 분류에 대해 물었고, 제자5는 해탈 열반에 대해 물었습니다.

 

이에 대해 성자는, 재가자가 어디를 가든 패하지 않는 최상의 행복과(숫~ 191) 출가 수행자의 최상의 행복(해탈 열반)을 말했습니다. 또 삼계(三界)는 ‘욕계•색계•무색계’라고 했습니다. 또 원인과 조건에서 원인은 ‘탐, 진, 치’와 ‘무탐, 무진, 무치’로 설명하고, 조건은 ‘조건과 연기’로 구분해서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성인은 ‘예류자, 일래자, 불환자, 아라한’이 있다고 했습니다. 해탈은 각각의 ‘묶임(이나 속박이나 집착)에서 풀려 벗어나는 것’이고 열반은 ‘탐, 진, 치의 멸진’이라고 했습니다.

도시 사람들에게는 빙청 선인과 제자들의 질문이 다소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돌보아야 할 일이 있다면서 한 사람 두 사람씩 돌아갔습니다. 다성도 지금 이 말씀들을 이해하기란 어려웠습니다. 그렇지만 훗날을 위해 중요한 용어는 메모해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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