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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中道)의 뜻을 배우며

고요2 0 252 2018.03.19 21:19

지금까지 다성은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생명을 해치지 말고, 주지 않는 것을 가지지 말고, 바람 피우지 말고, 거짓으로 증언하여 죄 없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지 말고,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품을 섭취하지 말 것’들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훌륭한 수행자에게 음식(이나 옷, 의약품, 거처)을 베푸는 것, 남에게 베풀면서(또는 좋은 일에 봉사활동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 된다고도 배웠습니다. 또 ‘자애의 마음, 연민의 마음, 함께 기뻐하는 마음, 평온의 마음’을 닦는 것이 거룩한 마음이라고도 배웠습니다.


빙청 선인 일행이 어떤 마을에 다다랐습니다. 그 마을에서는 성인을 환영하고 수행자를 존경하여 성인과 수행자가 도착하면 화려한 장판을 깔아 놓고 마을 회관까지 그분들이 그 위를 걸어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일부 수행자들은 화려한 그 장판 위를 걸어왔고, 성자들은 그 위를 걷지 않고 다른 길로 마을 회관에 왔습니다.

 

빙청 선인이 도착하자 안내인이 빙청 선인과 제자들에게 이 화려한 장판위로 걸어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빙청 선인은 가만히 있었습니다. 안내인이 세 번이나 말했지만 여전히 가만히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를 돌아보자 제자1이 말했습니다. “옛날에 위대한 한 영웅이 계셨습니다. 보디 왕자가 그분을 초대하고는 천을 깔고 그 위를 걸어오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위를 걸어가지 않으셨습니다. 후대의 수행자들이 이런 경우를 당할 때를 위해서였습니다. 저희 스승께서도 그 영웅을 받들어 존경하시므로, 후대의 수행자로서 감히 이 화려한 장판 위를 걸어갈 수 없답니다.” ((M85)에서 인용 및 활용)

 

이 말을 듣고 안내인이 장판을 치웠습니다. 빙청 선인 일행이 식사를 마치고 나서자 안내인이 지금 수행자들이 마을 뒷산에 있는 ‘수행자 동산’에서 토론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빙청 선인의 자리도 마련해 놓았으니 참석해 주십사고 부탁했습니다. 마을 뒷동산에 가서 빙청 선인과 수행자들이 환담을 나누었습니다. 유쾌하고 기억할 만한 이야기로 서로 담소를 하고서, 빙청 선인은 안내인이 마련해준 자리에 앉았습니다. 제자들과 칠지와 다성 일행은 조금 떨어져서 마련된 자리에 앉았습니다.

 

수행자1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막 중도(中道)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중도를 깨달음에 이르는 실천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수행자2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도는 깨달음을 성취하게 해주는 바른 길 걸음입니다. 그 길 걸음은 ‘색, 성, 향, 미, 촉’을 즐기는 일에서 떠나야 합니다. 수행자는 범부가 원하는 ‘아름다운 형상들, 아름다운 소리들, 아름다운 향기들, 아름다운 맛들, 아름다운 감촉들’을 기뻐하면서 얻으려고, ‘내 것’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수행자3이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중도는 ‘지옥, 축생, 아귀, 인간, 욕계 천상’의 존재들이 즐기는 ‘소유적 사유(까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소유적 사유(까마)를 즐기면서 수행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우리들이 추구하는 깨달음과는 다른 깨달음을 구하는 자라고 앙아야 합니다.”

 

빙청 선인이 말했습니다. “훌륭하십니다. 수행자들이시여. 그럼 소유적 사유(까마)를 떠났으면 그 다음에는 어떤 과정(또는 방법)이 있어 수행자가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까?” 수행자4가 대답했습니다. “고행(苦行)입니다. 자신의 몸을 극한의 고통 속에 빠뜨려서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저 위대한 영웅도 ‘행복은 행복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참으로 괴로움으로 행복은 얻어진다.’ (M85) 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수행자5가 말했습니다. “저는 다른 의견입니다. 그 위대한 영웅께서는 M56:11에서 ‘... 출가자가 가까이하지 않아야 할 두 가지 극단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까마(소유적 사유)>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의지하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안목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최상의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 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소유적 사유와 고행은 중도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수행자6이 말했습니다. “여러분, M85에서 말씀하신 것은 그분께서 아직 정각을 이루기 전 보살이었을 때 하신 말씀이고, S56:11에서 하신 말씀은 정각을 이루고 난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중도는 우선 소유적 사유(까마)를 벗어나야 합니다. 소유적 사유(까마)는 삼매를 통해서만 떠날 수 있습니다. 보살이었을 때 그분께서는 삼매를 통해 소유적 사유를 떠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분께서는 고행과 고행 아닌 방법 둘 중에서 어느 것이라도 바른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러나 깨닫고 난 후에는 고행으로는 지와 견,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 대신 고행이 아닌 다른 방법, 즉 소유적 사유들과도 다르고 불선법들과도 다른 행복을 통해서 지와 견 그리고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수행자들과 빙청 선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수행자6의 말은 이전의 해석과는 완전히 다른 이해였습니다. 이전에는 대체로 이 극단과 저 극단을 버리고 양극단의 중간으로서 중도를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행자6은 첫 단계로 소유적 사유(까마)를 제거하고, 그 다음에 고행과 고행 아닌 방법 중에서 고행은 안 되고 고행 아닌 방법으로 지와 견 그리고 깨달음으로 나아간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수행자들이 수행자6에게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수행자6이 조금 더 설명했습니다. “도반들이여, 아마 그 영웅께서는 이렇게 하셨을 것 같습니다. 먼저 삼매를 성취하여 일단 소유적 사유(까마)를 넘어서셨습니다. 그러나 잠재되어 있는 소유적 사유를 아직 제거하지 못했고 가라앉히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삼매라는 토대 위에서 소유적 사유를 제거해 나가셨고 마침내 제거하셨습니다. 즉 먼저 몸과 말의 영역에서 소유적 사유를 넘어섰고, 더 나아가 잠재되어 있는 영역에서도 소유적 사유를 제거하고 가라앉히셨습니다.

 

이렇게 소유적 사유를 완전히 제거하고 나서야, 이때부터 정말로 존재에 내재한 ‘생, 노, 사’의 문제 – 윤회 - 를 푸셨습니다. 그리고 수행의 과정에서 고행은 바른 길이 아님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삼매 위에서 출발하는 두 가지 방법 중의 하나인 고행도 지와 견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간다는 보살 때의 생각을 버리셨고, 소유적 사유들과도 다르고 불선법들과도 다른 행복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정진하시어 마침내 정각을 이루셨고, 그 길 걸음이 바로 중도이고 팔정도라고 하셨습니다.” (해피스님의 수업보고 글에서 적절하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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