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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기관의 단속 - 욕탐의 제어

고요2 0 548 2018.04.01 05:09

 빙청 선인이 오늘 하루는 각자 개인 시간을 가지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성은 가까운 마을로 가서 볼일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에게 마을에서 현자가 누구인지를 물어 그분을 뵈러 갔습니다. 다성이 도착해보니 현자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대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다성은 양해를 구해 한쪽 빈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주제는 ‘감각기관의 단속’ 또는 ‘동요하지 않음’이었습니다.   


대화가 중요한 대목에 이르렀는지 현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참석자 중의 한 사람이 지금까지 진행된 대화를 요약해서 들려주었습니다. 처음에 현자가 ‘동요하지 않음’에 대해서 물었고 이에 참석자들이 여러 가지로 대답했습니다. ‘동요하지 않음’을 누구는 어떤 위협에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용감한 것이라고 했고, 누구는 호연지기를 길러 그것으로 자기 마음을 가득 채워 쭈그러지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했고, 누구는 아예 눈귀코혀몸의 감각기관을 막아 외부 사물과 접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다성은 잠시 생각했습니다. 동요하지 않으려면 먼저 외부 사물의 달콤함에 빠져 이끌려 가면 안 될 것이고, 또 공포나 두려움으로 떨어서도 안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성은 어떻게 마음을 써야 동요하지 않음인지 아직은 몰랐습니다. 과연 저기 참석자들이 말한 것처럼 용감하거나 호연지기를 채우거나 감각기관의 문을 닫는 것이 동요하지 않음인지.
 
현자는 참석자들이 말한 내용을 일단 긍정했다고 했습니다. 용감한 것도 호연지기를 기르는 것도 훌륭한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감각기관의 문을 닫는 대답은 무슨 뜻인지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했습니다. 그리고 이 대목에서, 감각기관의 단속이라는 말을 여러 번 되뇌이며 현자가 한참 동안 말없이 앉아 있다고 했습니다. 다성은 궁금했습니다. 과연 현자가 어떤 말을 할지 다음 말을 기다렸습니다.
 
그때 수행자 4명이 이곳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감각기관은 고요했고, 그들은 감관의 문을 지키며 걸어갔습니다. 현자가 수행자들을 뒤따라가서 잠시 이곳에 좀 머물러 주십사고 부탁했습니다. 수행자들이 자리에 앉자 현자가 질문을 했습니다. “수행자들이시여, 그대들께서는 어떻게 감각기관을 단속하십니까?” 수행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우리들은 욕탐을 제어하여 감각기관을 단속합니다.” 현자가 다시 질문했습니다. “무엇을 욕탐의 제어라고 합니까?”
 
다성은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 오늘 정말 중요한 내용을 들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욕탐이란 말을 몇 번 들었는데 오늘 분명한 뜻이 드러날 것 같았습니다. 욕탐과 탐과 갈애가 어떻게 다른지 늘 궁금했는데 오늘 욕탐의 뜻을 알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수행자1이 말했습니다. “‘색•수•상•행•식’이라는 오온이 있습니다. 이 오온에 집착함이 있으면 그것을 오취온이라고 합니다. 저는 오온을 ‘내 것이다, 나다, 나의 자아다’ 하고 집착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고 갈애 상태가 되어 행위하면 오온을 오취온으로 붙잡게 됩니다. 욕탐의 제어란 첫째, 여기서 오온을 오취온으로 붙잡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물질을 두고 ‘이것은 내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자아다.’ 하고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참석자들은 오온, 오취온이라는 용어가 낯설어서 수행자1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성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선 오온을 오취온으로 붙잡지 않는 것이 욕탐의 제어이고, 이것이 감각기관의 단속이라고 잠정적으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수행자2가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눈으로 저기에 있는 저 물체(송아지)를 보려고 주목할 때, 눈만이 저기 물체를 보는 것이 아니고, 무명의 요소라는 욕탐이 개입하여 마음이 눈으로 하여금 주목하게 합니다. 욕탐의 제어란, 둘째 이렇게 무명의 요소가 개입하여 눈으로 저기 물체를 보려고 주목하는 이것을 그만두게 하는 것입니다. 즉 욕탐의 개입 없이 눈이 저기 물체를 주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여리작의하지 말고 여리작의하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참석자들과 다성은 더욱 모르게 되었습니다. 눈으로 저기 물체를 보려고 주목하는 대목에서 무명의 요소라는 욕탐이 개입한다는 말은 더욱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수행자2가 들려준, 찬다가 한 순간 이전의 삶의 내용을 싣고 와서 일차인식의 과정에 참여하는데, 이때 실려 오는 것이 욕탐이고 이것이 무명의 요소로 개입하는데, 그 욕탐을 제거하여 비여리작의가 되지 않게 하는 것이 감각기관의 단속이라는 말에서, 다성은 그 뜻을 좀 이해했습니다.
 
수행자3이 말했습니다. “배우지 않고 앎이 없는 범부는 ①오온을 오취온으로 붙잡아서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못하고, ②욕탐을 개입시켜 비여리작의하여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①과 ②에서 감각기관을 단속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어서 눈으로 저기 물체(송아지)를 볼 때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③욕탐에 오염된 니밋따(相)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욕탐에 의해 오염된 니밋따(相)를 붙잡지 않는 것이 감각기관을 단속하는 것입니다.”
 
참석자들과 다성은 감탄했습니다. 감각기관의 단속이 그냥 단순히 정신 차려서 내 마음을 저기 사물에 빼앗기는 정도가 아니고, 더 근원적인 영역에서 욕탐을 제어해 들어가는 것인 줄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수행자4가 말했습니다. “욕탐의 제어는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가 저기 송아지를 보게 되면 어떤 느낌(受)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느낌을 바르게 경험하지 못하고 ‘병든 상(想)’의 개입으로 바르지 않게 인식하게 됩니다. 병든 상을 번뇌라고도 합니다. 이때 번뇌를 부수어서, 느낌을 인식할 때 번뇌가 개입하지 않게 하는 것도 감각기관의 단속입니다.
그러면 저기 물체를 보았을 때 생긴 느낌을 바르게 인식하여, 마음이 만들어질 때 더 이상 갈애가 되지 않고 청정한 마음이 됩니다. 그래서 이 청정한 앎과 청정한 마음을 기반으로 하니 더 이상 오온을 오취온으로 붙잡지 않게 되고, 청정한 행위를 하게 되니 욕탐이라는 것이 생겨 날 리도 없고, 눈으로 저기 물체를 볼 때 무명의 요소로 개입할 리도 없게 됩니다. 그러면 탐에 왜곡된 니밋따(相)를 볼 리도 없고, 번뇌를 부수었으니 느낌(受)를 경험할 때 병든 상(相)인 번뇌가 개입할 여지도 없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감각기관의 단속의 완성입니다.”
 
수행자4가 말을 마치자 현자와 참석자들과 다성은 “와, 대단하다!”며 모두 감동했습니다. 감각기관의 단속이 이렇게까지 깊은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다성은 오늘에야 제대로 배우게 되었습니다. 감각기관의 단속이 욕탐의 제어와 연결하여 번뇌를 부숨에서 완성된다니 그 장엄한 설명에 다성은 가슴이 벅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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