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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의 두 주관, 마노와 찟따에 대한 도입 부분

고요2 0 237 2018.05.06 16:17

 99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무슨 일이든지 마지막 한 번을 못 마쳤습니다. 누구는 책을 100번 읽어야 하는데 99번을 읽고 그만 두었고, 또 누구는 문장을 100번 외워야 하는데 99번을 외우고 그만 두었고, 또 다른 누구는 달리기를 100번 연습해야 하는데 99번을 하고는 그만 두었습니다. 그래서 99 마을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했습니다. 이장이 말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 늘 한번을 못 채워 99번째에 머물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완성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도 100번을 채워 어떤 일이든지 마무리를 지읍시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씀해 주십시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생각을 말했는데, 최종적으로 ‘100번 완성’이라는 부적(符籍)을 써서 몸에 부치자는 의견이 채택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 중에서 학식이나 높은 사람이 있다면 그분에게 부적을 써 달라고 부탁하자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날 이후 많은 사람들이 99 마을을 지나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중에서 학자나 수행자나 종교인이 지나가면 ‘100번 완성’이라는 부적을 써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부적 종이의 앞뒤로 어떤 유학자는 ‘敬’을 100번 써 주었고, 어떤 수행자는 ‘精神一到何事不成’을 100번 써주었고, 종교인들은 ‘인내’, ‘사랑’, ‘감사’, ‘정진’ 등의 말을 100번 써 주었습니다.     
 
마을 사람들 중에서 대표로 이장 아들이 그분들이 써 준 부적 하나를 몸에 차고 자신이 목표로 삼은 과업을 해보았습니다. 90번을 넘어 97번, 98번, 99번을 했습니다. 마지막 한번이 남았습니다. 이장 아들은 부적의 힘을 믿고 혼신의 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로 100번을 해내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와!”하고 함성을 질렀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각각 필요한 만큼 부적을 가지고 가서 몸에 부치고 자신들의 과업을 했고 모두 100번을 해냈습니다.
 
그렇게 일 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동안 사람들은 모두 부적을 몸에 부치고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부적이 마치 자신의 몸의 일부인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부적 없이는 못 사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몸에서 부적을 떼어내면 무슨 화가 미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 왔습니다. 이제는 부적의 도움을 받아 과업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이 부적의 부림을 받는 셈이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근심이 깊어가던 어느 날 아침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오고 있었습니다. 이장이 반갑게 맞이했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장은 빙청 선인 일행을 환영한다며 자신의 집에 초대하여 아침 식사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이장이 물을 일이 있는데 시간이 나느냐면서 자리를 마련하겠다고 했습니다. 빙청 선인이 이장에게 식사를 제공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아는 것이 있다면 물음에 따라 대답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장이 자리를 마련하여 앉기를 권했고 마을 사람들이 이장 댁으로 몰려왔습니다.
 
이장이 그간의 부적 이야기를 들려주며 말했습니다. “우리가 부적의 부림에서 벗어나 부적 없이 우리의 과업을 해낼 수 있겠습니까?”
빙청 선인이 대답했습니다. “부적 없이도 해낼 수 있습니다.”
 
이 말에 이장이 잠시 근심을 잊고 다소 밝은 표정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지금부터는 각자의 근심을 말씀드려 보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의 질문과 빙청 선인의 대답에서 제 걱정과 근심을 풀어보겠습니다.”
 
마을 사람1이 말했습니다. “이제 부적 없이는 어떤 일도 못 해내는 제가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빙청 선인이 대답했습니다. “사실을 바르게 아는 일에서 시작하면 됩니다.”
 
마을 사람1이 다시 말했습니다. “어떻게 사실을 바르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미 부적이 없다면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납니다.”
빙청 선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대는 1년 동안 부적을 의지해왔습니다. 그래서 부적이 있어야만 된다는 그런 앎과 지식과 기억이 죽 머물렀고, 그런 경향이 그대에게 죽 드러나지 않고 속에 잠겨 있거나 숨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적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 그대에게 두려움과 공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선 이런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마을 사람2가 말했습니다. “선인께서는 ‘탐, 진, 치에 오염된 행위를 하면 그 결과 식(識)이 머물고 상(想)이 잠재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1년 동안 제가 그릇된 인식과 행위에 물들었는데 어떻게 이런 나의 인식에서 우선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빙청 선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대가 부적이 없으면 일을 못해낸다는 것은 지난 일입니다. 그런데 삶이란 지난 일의 연속인 것만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현재의 그대 마음이 어떤가에 따라 달라지기도 합니다. 즉 현재 그대가 지혜로윤 마음이라면 어제와는 다르게 부적을 볼 수 있습니다. 1년 동안 누적된 그대 삶의 앎과 지식과 기억은 과거입니다. 그러나 현재 그대의 마음이 어느 만큼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지혜로운가에 따라 부적을 알고 보는 일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어제와는 달리 부적 없이도 업무를 완성해 낼 수 있습니다.”
 
마을 사람3이 말했습니다. “선인께서는 ‘지난 1년 동안 누적된 내 마음(意)이 부적을 잘못 알고 보아 부적에 부림을 받아도 + 현재 내 마음(心)이 어느 만큼 욕탐을 제어하느냐에 따라 현상을 바르게 볼 수 있’으므로, 어제까지는 부적을 몸에 지니지 않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있었지만 오늘은 그런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빙청 선인이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제까지 잘못 알고 잘못 보았더라도 오늘 지금 그대의 마음(心)이 지혜롭다면 현실을 바르게 알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나날이 삶을 향상시킬 수 있습니다.”
 
다성은 여기서 하나를 배웠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그런 훌륭한 일을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은 착한 사람이나 할 수 있을 거야.’ 또는 ‘세상에는 선한 일과 악한 일의 구분은 없어, 죽으면 끝이지.’하는 식으로 종종 자포자기하곤 하는데,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앎이란 과거의 기반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내 마음(心)의 지혜 여부도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내 마음이 지혜로우면 앎도 바뀌고 행위도 바뀌어 마침내 삶도 향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동영상 법문에서 일부를 요약 : 우리가 인식한다고 할 때는 주관이 두 개가 있습니다. 한면으로는 누적된 마노가 대상을 붙잡고, 다른 한면으로는 지금 삶의 행위인 심(心)이 욕탐의 형태로 대상에 집중함으로써 입니다. 그러니까 지난 삶이 누적된 식(識)이 몸과 함께 있으니까 의(意)로써 인식의 한 주관이 되고, 욕탐의 형태로 작용하고 있는 마음(心)이 또 인식의 한 주관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식할 때는 하나의 대상에 대해 주관은 두 개가 있습니다. 마노와 찟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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