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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도(道)를 말씀하십니까?

고요2 0 244 2018.06.10 20:13

 어느 날 하루 자유 시간을 가졌습니다. 빙청 선인과 제자들은 숲 속에서 참선(參禪)을 했습니다. 다성과 사람들은 시내에 필요한 물건을 사러 갔습니다. 칠지는 그 지역의 한 대학교에서 ‘도(道)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학술발표회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그곳으로 갔습니다. 칠지가 도착하니 벌써 많은 사람들이 대강당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주최 측에서 나누어준 소책자를 보며 진지한 자세로 앉아 있었습니다.

 

이윽고 ‘도란 무엇인가?’에 대한 주제 발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발표자가 참석해주신 내외빈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나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도(道)는 어렵지 않습니다. 일상이 바로 도이고 지금 자신의 마음이 도입니다. 밥 먹고 일하고 잠자고 생활하는 것, 그리고 기뻐하고 슬퍼하고 즐거워하고 괴로워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도이지 이것을 벗어난 상상 속의 관념은 도가 아닙니다. 성자의 가르침만 외워서 말로만 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직 도를 모르고 있는 셈입니다. 도는 여기 현실의 삶을 떠난 저 옛날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생활이 도이고, 우리는 모두 하루하루 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첫 번째 강사가 발표를 끝내자 큰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도가 어찌 책 속에 있겠는가! 바로 여기 일상에 있는 것이 당연하고말고.’ 하면서 이제야 진짜 도를 만난 것처럼 좋아했습니다. 그때 한 청중이 질문했습니다. “발표를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강사님께서는 ‘일상(日常)이 도(道)’라고 하셨지만,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경전을 읽고 계를 지키고 수행을 하면서 도를 닦고 있습니다. 이 점은 어떻게 이해하면 되는지요?”

 

첫 번째 강사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모두 욕망에서 나온 것이고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 욕망과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속이면서 경전을 읽고 계를 지키며 수행을 하지요. 그래서 무엇인가를 성취했다는 욕망도 충족시키고 두려움도 감추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는 그런 욕망과 두려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면 그것으로 충분한데도, 일부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행복을 찾아 헤맵니다. 그런 것들은 욕망과 두려움을 다른 것으로 포장한 속임수일 뿐입니다.”

 

질문한 청중은 무엇인가 애매하고 아리송했지만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첫 번째 강사의 말에 마음이 매우 불쾌해졌습니다. 도를 배우고 수행하는 것을 단지 욕망과 두려움 때문이라고 몰아붙이는 그의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한편, 칠지는 첫 번째 강사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칠지가 보기에, ‘저 강사 분은 범부와 성인을, 악한 행위와 선한 행위를, 일상과 특별함을, 어리석음과 지혜를 구분하지 못하는구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윽고 두 번째 강사가 청중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면서 발표했습니다. “여러분, 논어에 나오는 ‘조문도(면) 석사(라도) 가의(니라)(朝聞道 夕死可矣)’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바로 이것이 도입니다. 도는 사물의 당연한 이치이니, 살아서는 도(道)라는 이치에 따라 순리대로 살고, 죽어서도 순리대로 편안합니다. 도는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남편과 아내 사이에, 직장에서 상사와 동료와의 사이에, 사회와 개인과의 사이에서, 국가와 국민과의 사이에서 이치대로 순리대로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도입니다. 그래서 위로는 하늘에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는 땅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칠지는 생각했습니다. ‘이분의 말씀은 한편으로는 그럴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족하구나. 사물의 이치를 도와 같은 개념으로 보는데, 이것은 부족하구나. 사람에게는 사물과도 다르고 동물과도 다른 특별한 점이 있는데 그것을 언급하지 않는구나. 사물의 이치가 <태어남, 늙음, 죽음>을 순리대로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사람에게 특별한 점은 그런 태어남, 늙음, 죽음의 원인을 궁구해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인데, 여기에 대한 언급은 없으시구나.’ 하고.

 

세 번째 강사가 청중에게 인사를 하고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도는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임(수용)입니다. 나에게 순경(順境)이 와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역경(逆境)이 와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좋다고 하여 붙잡아서 쫓아가지 않고 싫다고 하여 내쳐서 떨어뜨리지도 않습니다. 도는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도 악에 물들지 않습니다. 선한 요소들이 끊임없이 솟아나서 고갈되는 법이 없고 악한 요소들은 저절로 힘을 잃어 사라지고 맙니다. 도는 기쁨이며 환희이며 축복이며 행복입니다. 내가 도를 알면 모든 존재들이 도를 안 것이 되고, 내가 도를 모르면 모든 존재들이 도를 모르게 되는 것이 바로 도입니다.” 

 

청중들은 ‘와, 멋진 말씀이다.’ 하면서 박수를 쳤습니다. 그러나 칠지는 세 번째 강사의 말에도 동의할 수 없었습니다. 칠지는, 진리가 있다면 그 진리대로 실천하여 사는 것이 도이거나, 아니면 그런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이 도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칠지는 도란 살아있는 생명들이 겪는 ‘슬픔-비탄-괴로움-근심-절망’ 등의 모든 괴로움을 없애서 행복에 이르게 해주는 실천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세상의 이치는 지혜로운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알려지는 것이지, 여기 어떤 한 사람이 안다고 해서 모든 사람에게 일률적으로 알려지는 것이거나 한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인류 전체가 모르게 되는, 그런 법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강사가 청중들에게 인사를 드리고 발표를 시작했습니다. “도(道)는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입니다.’ 또한 ‘도는 그 길을 직접 걸어가는 길 걸음입니다.’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길이 도이고, 그 도를 직접 걸어가면서 실천하는 실천행이 바로 도입니다. 그래서 도의 실천행을, 소유적 사유를 넘어섰고 고행의 몰두에도 빠지지 않는다고 하여 중도(中道)라고 합니다. 그런 실천행은 여덟 가지로 대표되는데 팔정도(八正道)라고 합니다. (바른 견해, 바른 사유, 바른 말, 바른 행위, 바른 생활, 바른 정진, 바른 사띠, 바른 삼매) 이 여덟 가지의 바른 실천은 사람들을 괴로움의 끝으로 최상의 행복으로 삶의 완성으로 이끕니다.”

 

네 번째 강사의 말이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배우고 들었던 도와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칠지는 아주 크게 만족하고 기뻐했습니다. ‘저분이 말씀하신 팔정도, 그것이 바로 위없는 도이구나.’하고 감탄했습니다.  
세상에는 ‘도란 어느 곳에나 있다. 여기 사람에게도 저기 자연에도 저기 짐승에게도 도가 있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른 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세상에서 간혹 인용되곤 하는 저 말처럼 도가 어디에나 편재해 있는 것이라면 사람들도 짐승들도 이미 모두 괴로움에서 벗어났을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괴로움에서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칠지는, 바른 도는 번뇌를 부수게 해주고 위없는 행복으로 이끄는 실천행, 바로 팔정도라고 제대로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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