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커뮤니티 > 자유게시판

자유게시판

빠빤짜산냐상카 : 예비단계를 조금 녹취

고요2 0 354 2018.07.08 18:30

 (24분 40초 ~ 46분 10초)
자, 여기서 필요한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세상에서 누구와도 다투지 않고 머무는 것, 부처님은 무엇을 말하는 분이기에 그렇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바라문에게 상들이 잠재하지 않습니까?’ 라고 질문한 데 대해서. 부처님의 답변에는 어떤 원인이 있다는 거지요. 그 원인에 의해서 원인에 의해서 사람한테 읽어나는 것(papañcasaññāsaṅkhā[희론(戱論)-상(想)-헤아림])이 있다고 합니다. 답변의 중심에 ‘빠빤짜산냐상카’를 놓고 ‘빠빤짜산냐상카’에 대해서 이러이러하다, 그런데 이것이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빠빤쨔산냐상카’라는 말이 나왔어요. ‘빠빤쨔’와 ‘산냐’와 ‘상카’라는 세 단어가 복합되어 있는 말입니다.
(1) 빠빤쨔는 행위의 영역에서 일단 갈애가 형성되고 자기화되면, 한 측면에서는 세상을 보는 안경을 쓰는 견해가 나오고 또 한 측면에서는 구체적 행위의 시작인 위딱까가 있는 거지요. 그 위딱까는 딱까 안에 있는 난다기 운영한다고 해서 사실은 행위 주체가 되는 자기화된 것으로의 갈애, 이 입장에서 보면 위딱까는 자기가 직접 하는 것은 아니지요. 물론 갈애를 구성하는 요소이지만 어쨌든 난디라고 하는 갈애를 형성하는 갈애 과정 안에 있는 것(난디)이 운영하는 것이 위딱까이지요.

 

그러면 자기화된 갈애의 구체적인 행위는 어디부터 인가요? 위딱가에 이어지는 ‘의도-기대-지향’에서 부터이지요. 그래서 ‘의도가 업이다’고 말해지는 거지요. 그러니 의도부터가 자기화된 갈애, 자기화된 것으로의 오염된 내 마음, 나의 의도적 행위부터 업이다고 말하는 경우이지요. 그래서 의도 앞에 위딱까가 있는 거지요.


그래서 위딱까로 출발해서 (위딱까는 업이 아니라고 봄) 의도부터는 자기화된 갈애가 ‘나야, 나는 이렇게 할 거야.’라는 의도를 작용하여 행위가 진행되지요. 그런데 그 행위가 ‘의도-기대-지향’이라고 하는 일차적인 단계는, 우리가 이해하기로는 그냥 하나의 상황에서 하나의 의도-기대-지향으로 온 것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사유라고 하는 자리에 오면 어떤가요? ‘사유한다, 생각한다, 머리를 굴린다’라고 하여 이것은 확산되지요. 그 확산되는 과정에 ‘빠빤짜’라는 말이 나오지요. 빠빤짜라는 말을 보통 설명하기를 (이렇게 하지요). 몸에서 팔이 연결되어 나오지요. 이럴 때 어깨부터 팔목까지는 표현하자면 ‘의도-기대-지향’이라고 하여 외길로 오지요. 그리고는 사유의 과정에서는 5개로 펼쳐지지요. 몸과 함께 하는, 즉 뇌와 함께 하는 의업의 과정이 이렇게 하나의 의도-기대-지향으로 와서, 사유한다는 영역에서 확산되는 이런 개념으로 빠빤짜를 설명하고 있지요. 빠빤짜, 사실 굉장히 어려운 용어이지만 그렇게 설명되고 있어서, 이것이 보통은 ‘희론’이라고도 ‘망상’이라고도 번역이 되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설명한 개념으로 보면, 위딱까에서 의도-기대-지향을 거쳐서 확산된 영역이고 의(意)의 행위(의업)에 속하는 개념으로 빠빤짜를 이해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빠빤짜에는 확산한다는 개념이 있어요. 어느 것이 좋을까?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는 것이지요.

 

(2) 산냐는 상(想), 우리가 잘 아는 것이지요.

 

(3) ‘상카’라는 말 혹시 좀 아세요? 상카는 2가지로 용례를 볼 수 있어요. 하나는 경전에 보면 이런 표현이 많이 나와요. ‘상캉 갓차띠’ : 상캉으로 가다. 이때 상카는 ‘이름’입니다. (그래서 상캉 갓차띠는 ‘어떤 이름을 갖다, 이름붙이다, 명명하다’입니다.) 그런가 하면 상카의 또 하나의 의미는 ‘헤아린다’의 의미입니다. 무엇인가를 헤아린다, 무엇인가가 헤아려진다의 용례로 쓰입니다.

 

우리끼리 법회한 겁니다만 어제께 케마 경(S44:1)에서 십사무기라고 이야기했을 때 ‘여래의 사후에 존재합니까? 존재하지 않습니까? ...’ 이런 질문에 대해서 부처님이 설명하지 않는 그 이유를, 케마 비구니가 어떻게 말을 하나요? 이렇게 비유를 들지요. 
빠세나디 꼬살라왕이 질문을 했을 때 케마 비구니가 대답하기를, ‘왕이시여, 왕한테는 많은 보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갠지스 강가의 모래를, 이 만큼의 모래 • 이 만큼의 백배의 모래 • 천 배의 • 십만 배의 모래 ... 이런 식으로 헤아려가지고 갠지스 강의 모래 양을 헤아릴 수 있는 그런 회계 관리가 있습니까?’ 하니까 왕이 ‘없습니다.’고 했지요.

케마 비구니가 다시 묻기를, ‘마찬가지로 바닷물을, 이 만큼의 바닷물, 이 만큼의 백배의 물, 천 배의 물, 십만 배의 물, ... 이런 식으로 저 큰 바다의 물의 양을 헤아릴 수 있는 관리가 있습니까?’ 하니 빠세나디 꼬살라 왕이 ‘없습니다. 큰 바다는 그렇게 헤아려지지 않게끔 큽니다.’고 했는데, ‘헤아린다’는 개념에서 이 ‘상카’라는 말이 쓰여요.

 

그런데 상카의 두 번째 의미인 이 ‘헤아린다’는 것으로 쓰이는 것 중에서도 또 두 가지로 쓰이는 것 같아요. 이런 부분이 명확하게 정의되어 있지 않지만 우리가 경전을 만나는 가운데 보아야 하는데, 헤아린다는 이것이 어쨌든 무엇인가 ‘산수하듯이 한다’거나 아니면 무엇인가 ‘이것저것 이런 것이다 저런 것이다’ 하는 것이지요. 어찌보면 헤아린다는 것은 인식한다는 말과 유사해요.

 

지금 이 내 앞에 있는 이것이 어떤 것인지 헤아려보자는 말은, ‘분별해보자, 인식해보자’일 수도 있어요. 사실은 이것이 비슷하지요. 그래서 보면 ‘상카’라는 이 단어가 글쎄요. 의업, 즉 행위의 영역이나 아니면 일차인식의 영역에서도 헤아림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것 같아요. 이것을 제가 아직 구체적으로 다루어보지는 못했는데, 그동안 공부하면서 이 ‘상카’가 이런 면이 있다는 것이 제 눈에 최근에 들어왔어요.

 

그런가 하면 또 하나는 헤아리는 것은 헤아리는 것인데 그 헤아라는 자리가 이차인식의 자리에서의 헤아림까지도 포함하는 것 같아요. 그런데 사실은요. 헤아린다는 이 말이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보면, 헤아린다는 ‘상카’가 ‘산냐’와 같이 쓰여 있잖아요. 산냐는 어떤 일을 하나요? 새끼 쳐진 식이 수를 대상으로 분별하는 일을 할 때 상(想)이 참여합니다. 그것이 이차인식이잖아요. 그래서보면 이차인식의 자리에서 분별하는 그 개념도 상카가 포함한다, 저는 이렇게 좀 이해를 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것이 좀 타당성이 있는 것이 이차인식, 즉 위자나띠 하지요. 새끼 쳐진 식이 촉해서 생겨나는 수를 위자나띠 할 때 상(想)이 참여한다, 그러면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 무엇이지요? 이 상이 일단 병들었을까? 치유되었을까? 에 따라, 병들어 있으면 번뇌라고 부르고 사실 이것은 행위의 과정에서 잠재된 잠재성향이기도 하지요. 이런 개념을 알지요.

 

중생들의 삶에서는 어떤가요? ‘상이 병들어있다, 번뇌다, 잠재성향이다’ 하는 이것이 이차인식에 참여하지요. 그럼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 무명, 그리고 탐과 진이 생겨나지요. 이때 무명과 번뇌를 합쳐서 치(癡)라고 하지요. 이렇게 탐진치가 생겨나지요. 탐진치와 함께 하는 삶을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유위(有爲)라고 하지요. 탐진치와 함께 하는 삶은 유위입니다. 이 유위가 빨리어로 ‘상카따’ 입니다.

 

‘상카따’라고 할 때 ‘따’는 추상명사를 만드는 접미사입니다. 상카따에서 따를 빼고 앞에 무엇인가 있어요. ‘상카’가 있어요. 그럼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의미상으로 유위(有爲)는 ‘상카를 헤아림’이라고 하면 (빨리어에서) 장음 단음 이 있지만 연결되어 있으니까. 추상명사를 만들었다는 것에서, 상카따는 ‘헤아려진 것’으로 봐도 되어요.


헤아려졌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일차인식에서 식과 수가 함께 생겼어요. 외입처가 무엇인지 알고 외입처를 경험한 거잖아요. 그런 상태에서 나의 내면에서 이렇게 생겨난 식(새끼 쳐진 식)이, 생겨난 수(느낌, 경험)를 상이 참여하는 가운데 분별합니다. 분별한다는 말 자체가 헤아린다로 이해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분명히 이 자리(위자나띠)가 분별하는 거잖아요. 사실은 내면의 영역을 이해하는 과정이라서 우리가 이것을 잘 접목시키지 않아서 그렇지, 이렇게 지금 내용을 맞추어보면 타당해요. ‘헤아린다’와 ‘내가 잘 분별해서 안다’는 것은 같은 거지요.

 

그런데 결정적으로 이렇게 ‘위자나띠’한, 달리 말하여 ‘상카’한, 인식했다•분별해서 알았다, 달리 말하면 헤아렸다 라고 하는 결과로 탐진치가 생겨납니다. 상이 중생의 상이었기에. 그런데 그런 상태를 상카따, 말하자면 헤아려 진 것입니다. 이것을 중국 사람들이 노자를 빌어서 ‘유위’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이것(유위)의 반대말은 무엇이지요? 상이 치유된 상이 참여를 하면 어떻게 되어요? 무명은 명(明)이 되지요. 탐은 무탐(無貪)이 되고, 진은 무진(無瞋)이 되잖아요. 마찬가지로 치유된 것은 번뇌 아닌 상태이지요. 번뇌 아닌 것과 명이 더해지면 무치(無癡)가 되지요. ‘무탐 무진 무치’를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무위(無爲)라고 하지요.

 

무위라고 하는 이 단어는 원어가 ‘아상카따’이지요. 그러면 이 아상카따는 이 말의 의미가 ‘상카따 안했다, 헤아리지 않았다’ 이렇게만 보면 될까요? 의미에 따라서는 그 말도 통하지만 ‘아’가 붙었으니, ‘헤아림을 넘어섰다’ 이렇게 말하는 거지요. 헤아림이라는 말차제가 번뇌가 참여한 인식과정이라고 이해를 하면, 번뇌 대신에 ‘번뇌 아님, 치유된 상이 참여했다’, 이것에 의해서 아상까따는 헤아림을 넘어 선 것, 이렇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헤아림이라는 말 차제가 번뇌가 전제된 이차인식이다(는 영역을 말하므로) 그러면 (아상카따를) 헤아리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맞는 거예요. 이런 경우가 어디에서 나와요? 니밋따-아니밋따, 빠릿따-아빠릿따, 다 그렇게 쓰이는 거지요.

 

결국은 부처님이 이런 메커니즘에서 소멸의 의미를 어떻게 쓰는 건가요? 번뇌를 부숨으로써 무명이 버려지고 명이 생겨난, 이것이 소멸이기 때문에 소멸된 니밋따를 아니밋따(라고 하지요). 니밋따가 없다가 아니지요. 니밋따를 넘어섰다. 그래서 대상을 왜곡없이 본다와 같은 개념이지요. 그래서 무탐무진무치 이것은 ‘아상카따’라고 해서 유위 아닌 것으로의 무위라고 표현됩니다. 그런데 구체적 의미로는 ‘번뇌가 함께 하는 이차인식, 번뇌가 전제된 것으로의 헤아림, 헤아려진 것’(이 유위라면), 그런데 ‘번뇌가 극복된, 소멸된 삶의 과정으로 그 과정을 거쳐 : 헤아림을 넘어섰다, 중생들의 삶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무위이지요.

 

이런 이해로 보면 ‘상카’라는 말이 단독으로 ‘상카갓차띠’ 라고 하여 ‘그런 이름을 가지다’로도 많이 나오지만, 헤아린다고 말할 때는 그냥 표면의 영역에서 헤아리는, 의업으로 희론(또는 망상) 이전에도 헤아림이 되겠지요. 그래서 일차인식의 자리에도 분별하는 것이니까 역시 헤아림이 되겠지요. 그렇게도(일차인식의 자리에서도) 쓰이지만 지금까지 본 것처럼 이차인식의 자리에도 쓰여요.
 
이차인식의 자리에서 우리가 정말 놓치면 안 되는 것이 불교 안에서 중요한 개념, 열반의 동의어로 쓰인 무위입니다. 이 말의 의미(를 잘 보아야 합니다.) 열반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는 상카따인데, 상카따가 바로 ‘헤아려 진 것’입니다. ‘헤아림에 의해서 결과된 것’(입니다). ‘-따’라고 하는 추상명사를 만드는 접미사(어미)가 붙어 상카따, 의미가 명확하게 나오지요. 아상카따는 바로 그런 헤아림을 넘은, 헤아려지는 중생의 삶을 넘어선 것으로의 무탐 무진 무치, 이렇게 나와요.

 

이렇게 되면 경이 설명하는, 누가 부처님께 ‘대덕이시여, 당신의 가르침의 근본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을 때, 이런 내용으로 대답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빠빤짜산냐상카’ 라고 하는 것을 중심에 두고 가르침을 대표하는 어떤 요약된 말씀을 주신 것은 타당하죠. 여기서 빠빤쨔산냐상카는 이차인식의 자리를 말했다고 보면 되겠지요.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