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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 계속해서 떠오르게 하고 계속해서 지켜본다

고요2 0 253 2018.07.22 17:10

시민명상교실에 다니던 전기수는 어느 날 다른 회원한테서 <난제 100>이라는 책을 한 권 선물 받았습니다. 그 책에는 이런 문제도 있었습니다.


문제 : 여기 김철수가 있습니다. 지금까지 김철수는 매일 나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김철수는 결심했습니다. ‘지금부터 나는 나쁜 생각을 버리고 좋은 생각을 하자.’ 하고. 과연 김철수는 나쁜 생각을 떨쳐버리고 좋은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새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은 마음이나 생각이 작동하는 과정(또는 구조)를 통해 김철수의 결심을 도와줄 수 있습니까?

 

그날부터 전기수는 도서관에서 마음에 관한 책을 빌려와서 읽기도 하고 유튜브에서 그 주제의 강의나 법문도 들었습니다. 전기수는 중요한 내용을 필기하고 용어를 익히며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른 뒤 전기수는 <난제 100>의 그 문제를 다시 펼쳤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나쁜 생각을 버리고 좋은 생각을 하며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배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문제의 풀이는 문답 형식으로 하여 원인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제시하기로 했습니다.  

 

물음 : 위의 김철수는 매일 나쁜 생각을 했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대답 : 사람이 오염된 행위를 하면 식이 머물고 상(想)이 잠재한다고 합니다. 위의 김철수는 매일 나쁜 생각을 하여 나쁜 <의업(意業)>을 지었고, 그 결과 식이 머물고 상이 잠재했습니다.

 

물음 : 상(想)이 잠재하면, 잠재한 상은 어떻게 됩니까?
대답 : 잠재한 상은 이차인식에 참여합니다. 눈을 예로 들면, 눈과 형상을 조건으로 안식이 일어나고, 삼사화합하여 촉하며, 촉을 조건으로 수(受, 경험)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생겨났던 안식이 이 수를 분별해서 아는 작용을 하는데, 여기에 상(想)이 개입(참여)합니다. 그러니까 생겨난 안식이 수를 인식할 때 잠재한 상이 개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안과 색을 조건으로 안식이 생기는 것을 일차인식이라고 부르고, 생겨난 안식이 수를 상의 개입(참여)하에 분별하여 아는 과정을 이차인식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물음 : 이차인식과정을 거치면 안식은 어떻게 됩니까?
대답 : 이차인식의 결과 무명이 생기고, 무명 위에 탐, 진이 생깁니다. 그러면 이것을 더 이상 안식이라고 부르지 않고 심(心, 찟따)이라고 부릅니다. 식과 심은 이름이 다르므로 지금부터는 하는 일도 달라집니다.

 

물음 : 심(心, 찟따)은 어떻게 형성되었습니까? 한번 더 말해주십시오. 그 다음으로 심은 어떤 활동을 합니까?
대답 : 수와 상에서 심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니까 ①일차인식 과정의 결과안 수와 ②오염된 행위를 하고 난 뒤 잠재했던 상이 → 심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심이 형성되기를, ‘무명, 탐, 진’을 내용으로 하는 심이므로 심은 오염되었습니다. 이렇게 오염된 심은 자기 내면의 대상에 대해 즐기고 환영하고 묶여있게 됩니다. 그러면 난디(즐김)가 생깁니다. 그러면 탐과 난디가 있는 마음을 이제 우리는 <갈애>라고 부릅니다.
 
물음 : 김철수의 심(心, 찟따)도 갈애의 상태이겠군요. 이 심(心, 찟따)은 이제 어떻게 합니까?, 무엇을 합니까?
대답 : 자기 내면의 활동을 다 마친 심(心, 찟따)은 이제 ‘색, 성, 향, 미, 촉, 법’에 대해 행위를 하러 갑니다. 심이 행위하러 갈 때 한면으로는 견해로 이어지고 한면으로는 위딱까로 이어집니다. 위딱까는 ‘일으킨 생각’으로 번역하신 곳도 있는데, 우리는 위딱까를 잠정적으로 ‘떠오름’ ‘떠올림’으로 번역해 보겠습니다.

 

물음 : 견해나 위딱까는 모두 의업입니까?
대답 : 견해는 의업이고 위딱까(떠오름)는 의업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겠습니다. 위딱까(떠오름)는 난디에 의해 경영되기 때문에 위딱까(떠오름)는 심의 영역이라고 보겠습니다. 위딱까(떠오름)를 거쳐 → ‘의도-기대-지향’ → ‘사유’로 이어질 때, 의도부터가 의업이라고 보겠습니다.

 

물음 : 김철수의 경우를 예로 들어 다시 말해주십시오.
대답 : 길을 가다가 갑자기 김철수의 마음에 나쁜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것은 위딱까(떠오름)이고 심의 영역이며, 아직 의업은 아닙니다. 그런데 떠오른 나쁜 생각에서 의도가 일어나고 기대가 일어나고 지향이 일어나서 그 일을 여러 가지로 사유하면 이런 것들은 모두 의업에 속하겠습니다.
김철수는 눈으로 형상을 볼 때마다 잠재했던 상이 이차인식에 참여하므로 그의 상은 빠빤짜산냐(희론과 함께 한 상, 또는 망상과 함께 한 상)입니다. 김철수는 그런 상의 영향을 받은 심이 형성되고, 그 심이 내면에서 자기활동을 마치고 외입처로 행위하러 갈 때는, 나쁘게 떠오릅니다(위딱까(떠오름)) 김철수는 이 위딱까(떠오름)를 가라앉힐 수 없으므로 거기에 휩쓸려가서 다음 과정을 진행합니다. → ‘의도-기대-지향’ → 사유. 이렇게 불선법의 의업을 지었으니 다시 상이 잠재하고, 잠재한 이 상은 다시 이차인식에 개입(참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상의 잠재순환> 고리라고 이름 붙여 보겠습니다. 
 
물음 : 사실이 이렇다면, 그럼 이제 김철수가 나쁜 생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는 건가요?
대답 : 아닙니다. 김철수는 나쁜 생각을 떨쳐버릴 수 있고 버릴 수 있습니다. 아누위딱께띠, 아누위짜레띠에 의해서 김철수는 나쁜 생각을 버리고 좋은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누위딱께띠-계속해서 떠오르게 하다, 아누위짜레띠-계속해서 지켜보다) 계속해서 떠오르게 하고 계속해서 지켜봄에 의해 심(心, 찟따)의 경향이 되기 때문입니다.

 

물음 : 김철수가 아누위딱께띠, 아누위짜레띠를 하여 나쁜 생각을 버리게 되고 좋은 생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다시 설명해 주십시오.
대답 : 김철수가 어느 날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러면 좋은 사유가 일어납니다. 좋은 사유는 의업입니다. 중생이라서 업을 지었으니 식이 머물고 상이 잠재합니다. 이때는 좋은 사유에 의한 상이었으니 좋은 상이 잠재했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작은 순환고리에 따라서, 좋은 사유는 일차인식 과정에 찬다에 실려 와 좋게 참여했을 것이므로 생겨난 식은 탐진치에 덜 오염되었을 겁니다.) 이차인식에 참여한 상은 그에 상응하는 심(心, 찟따)을 형성할 것입니다. 이 심이 내면의 활동을 거쳐 행위하러 갈 때 위딱까(떠오름)할 때, 김철수는 아누위딱께띠, 아누위짜레띠를 해야 합니다. (좋게 떠오른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계속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이 과정이 되풀이됨으로써 김철수는 조금씩 조금씩 향상된 삶을 살아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한 방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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