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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1) 소유

불교는 고행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가 - [차별적 지와 견(SN 42.12-라시야 경)](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30601)

불교는 고행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가 - [차별적 지와 견(SN 42.12-라시야 경)](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230601)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uXGJyXO6O8c

 

(SN 42.12-라시야 경)(SN 56.11-전법륜 경)과 같이 출가자가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두 끝과 중도가 주제입니다. 이때, 이 경은 비난할 측면과 칭찬할 측면을 분별하는 부처님의 대답을 통해 불교가 고행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합니다. 그러나 고행에 의해서도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들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와 견()을 실현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일으키게 합니다. 여기에 답하기 위해 차별적 지와 견을 삼명(숙주명-천안명-누진명)이라고 이해하였는데, (DN 25-우둠바리까 경)은 고행자의 완성을 천안명으로 알려줍니다. 결국, 고행자는 차별적 지와 견의 실현에 속하기는 하지만 제한적이어서 누진명에 의한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SN 42.12-라시야 경)(SN 56.11-전법륜 경)과 같이 출가자가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두 가지 끝과 중도(中道)가 주제입니다. (SN 56.11-전법륜 경)이 고행의 과정을 함께했던 다섯 비구에 대한 이어지는 깨달음의 과정으로 중도(中道)와 사성제(四聖諦)를 설명한다면, (SN 42.12-라시야 경)은 부처님이 모든 고행자를 일방적으로 비난하는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어서 두 끝에 대한 비난과 칭찬의 분석을 말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중도(中道)를 탐()-()-()에 의한 퇴보로부터의 벗어남이라고 설명하는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SN 42.12-라시야 경)은 세 가지 고행자를 말합니다. 힘든 삶을 사는 고행자, 유익한 법, 차별적 지()와 견()의 실현에서의 비난(×)과 칭찬()에 대한 세 사람입니다. ― ①(×)-(×)-(×), (×)-()-(×), (×)-()-()

 

이때, 세 번째 고행자인 (×)-()-()의 경우는 고행에 의해서도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들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와 견()’을 실현할 수 있느냐는 의문을 일으키게 하는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수업입니다.

 

이 경은 불교입문(1-소유 201229) ㅡ 소유하고자 하는 자의 용례 4)[칭찬-비난받는 소유의 삶 & 중도(中道)의 의미](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에서 강의한 적이 있는데, 이 주제에 대한 부족한 부분을 이번 수업에서 보충하였습니다.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2&wr_id=21

 

우리 법회에서는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들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와 견()의 실현을 해탈지견(解脫知見) 즉 아라한의 경지로 이해하고 있어서 자칫 고행에 의해서도 이 경지가 실현된다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이 이 질문의 요점입니다.

 

또한, 여러 경이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들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와 견()의 실현을 깨달음의 경지로 제시하기 때문에 고행자가 실현할 수 있는 경지라는 이 경의 설명 때문에 이 경지가 해탈지견 즉 아라한을 지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양면의 문제 때문에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들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와 견()’이 무엇인지 살펴보았는데, 사선(四禪)-삼명(三明)으로 대표되는 부처님의 깨달음에서 삼명(三明) 즉 숙주명(宿住明)-천안명(天眼明)-누진명(漏盡明)을 의미한다는 판단입니다. 특히, 부처님은 당신의 삼명(三明) 실현을 어둠이 부서지고 빛이 생긴 것이고, 병아리가 달걀껍데기로부터 나오듯이 세상에 대한 염오라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들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와 견()’을 최소한 삼명(三明)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숙주명(宿住明) 이전의 존재 상태에 대한 기억의 앎 여러 이전의 존재 상태[전생]를 기억

천안명(天眼明) 죽고 다시 태어남의 앎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앎

누진명(漏盡明) 번뇌들의 부서짐의 앎 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知見)

 

한편, (DN 25-우둠바리까 경)은 고행자의 최상이고 정수는 ‘업에 따라서 가는 중생들을 분명히 앎’입니다. 고행자가 ①(×)-②(○)-③(○)의 경우를 으뜸으로 하는 것은 자신에게 고통을 주고 괴롭히는 실천에 의해 몸이 진정되지 못하고 파괴되기 때문인데, 이런 이유로 누진명(漏盡明)에 닿지 못합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실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국, 고행자는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들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知)와 견(見)’을 실현하기는 하지만 깨달음을 위한 마지막 관문인 누진명(漏盡明)을 실현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이 경이 설명하는 고행자의 으뜸의 경지가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들에게 적합한 차별적 지(知)와 견(見)의 실현’에 속하기는 하지만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세 번째 고행자인 ①(×)-②(○)-③(○)의 경우도 깨달음의 성취는 아니어서 오직 불교만이 일체의 괴로움을 소멸하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완전한 깨달음을 실현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는 결론을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경은 불교가 고행을 일방적으로 비난하는지의 질문으로 시작되는데, 이렇게 비난할 측면과 칭찬할 측면을 분별한다는 부처님의 대답으로 일방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합니다. 


Comments

아빈뇨 2023.06.06 21:52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