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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2) 사실

5. 지(知)와 견(見) ― ñāṇa-dassana(앎과 봄)

5. 지(知)와 견(見) ― ñāṇa-dassana(앎과 봄)


한편, 메커니즘으로 해석한 삶은 인식의 영역과 행위의 영역으로 구분됩니다. 행위를 시작점으로 하는 세 개의 순환구조 위에서 1차 인식과 2차 인식의 과정으로 인식이 진행됩니다. 이때, 작은 순환구조에 의해 관심(chanda)이 1차 인식에, 잠재 순환구조에 의해 상(想)이 2차 인식에 공동 주관으로 참여하는데, 2차 인식의 경우 1차 인식의 결과인 수(受)를 가공하여 행위에 전달하고, 이 가공의 과정을 takka[애(愛)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이라고 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하였습니다. 


인식은 아는 것입니다. jānāti(알다-동사) 또는 ñāṇa(앎-지(知)-명사) 그리고 jānanta(아는 자-현재분사) 등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이 단어들은 많은 경에서 passati(보다) 또는 dassana(봄-견(見)) 그리고 passanta(보는 자)와 짝을 이루어 나타납니다. 


ñāṇa-dassana(앎과 봄-지(知)와 견(見)-지견(知見))의 짝은 yathābhūtañāṇadassana[여실지견(如實知見) -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 또는 ñāṇadassanavisuddhi[앎과 봄의 청정(淸淨)] 등의 형태로 나타나는데, 특히, (SN 56.11-전법륜(轉法輪) 경)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yāvakīvañca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na suvisuddhaṃ ahosi, neva tāvāhaṃ,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ti paccaññāsiṃ.


비구들이여, 나에게 3회전한 12형태[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의 이런 방법으로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의 아주 청정함이 없었던 때까지는,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를 위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았다.’라고 선언하지 않았다.


“yato ca kho me, bhikkhave, imesu catūsu ariyasaccesu evaṃ tiparivaṭṭaṃ dvādasākāraṃ yathābhūtaṃ ñāṇadassanaṃ suvisuddhaṃ ahosi, athāhaṃ, bhikkhave, sadevake loke samārake sabrahmake sassamaṇabrāhmaṇiyā pajāya sadevamanussāya ‘anuttaraṃ sammāsambodhiṃ abhisambuddho’ti paccaññāsiṃ. ñāṇañca pana me dassanaṃ udapādi — ‘akuppā me vimutti,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ti. idamavoca bhagavā. attamanā pañcavaggiyā bhikkhū bhagavato bhāsitaṃ abhinandunti.


비구들이여, 나에게 3회전한 12형태[삼전십이행(三轉十二行)]의 이런 방법으로 이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의 아주 청정함이 있었기 때문에, 비구들이여, 나는 신과 마라와 범천과 함께하는 세상에서, 사문-바라문과 신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를 위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깨달았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나에게 ‘나의 해탈은 흔들리지 않는다[부동(不動)의 심해탈(心解脫)]. 이것이 태어남의 끝이다. 이제 다시 존재로 이끌리지 않는다.’라는 앎과 봄이 생겼다.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의 아주 청정함이 생겼을 때 비로소 깨달음을 선언했다는 것인데, 앞뒤의 수식이 있기는 하지만, 앎과 봄[지(知)와 견(見)]의 측면에서 깨달음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알다-앎-아는 자’ 또는 ‘보다-봄-보는 자’는 경에 아주 많이 나타나는데, 삶의 설명을 위해 배제할 수 없는 두 가지 역할이기 때문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경은 이 두 가지를 짝으로 함께 나타내기도 하는데, 많은 경우 완성된 삶의 입장을 제시합니다. ⇒ 별첨 「‘알다-앎-아는 자’와 ‘보다-봄-보는 자’가 짝으로 함께 나타나는 용례」 참조


이때, ‘알다-앎-아는 자’는 인식의 자리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다-봄-보는 자’의 자리는 어디입니까?


앞에서 제시한 삶의 메커니즘에 의하면, takka[애(愛)의 형성 또는 자기화 과정]에서 가공된 결과는 두 갈래로 나와서 행위의 출발점을 구성하는데, 견해(diṭṭhi)와 생각 떠오름(vitakka-위딱까)입니다. 이때, vitakka는 [의도-기대-지향]의 과정으로 사유에 연결되는 구체적 행위의 출발점입니다. 반면에, diṭṭhi는 view, belief, dogma, theory, speculation으로 영역(英譯)되며 dassana와 비교되는 용어인데, vitakka로부터 출발하는 구체적 행위의 이면에서, 마치 색을 넣은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색을 덧씌워서 보이듯이, 세상을 보는 ‘어떻게?’의 관점입니다. 그래서 ‘보다-봄-보는 자’의 자리가 삶의 메커니즘 위에서는 견해(diṭṭhi)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dassana – 봄

• 견해(diṭṭhi) - 보는 자의 바탕에서 작용하는 관점의 기준

               <표준국어대사전>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


특히, (AN 5.114-안다까윈다 경)은 「‘etha tumhe, āvuso, sammādiṭṭhikā hotha sammādassanena samannāgatā’ti — iti sammādassane samādapetabbā nivesetabbā patiṭṭhāpetabbā ‘오시오, 도반들이여, 그대들은 바른 견해를 가진 자, 바르게 봄을 갖춘 자가 되시오.’라고 바르게 봄에 대해 격려해야 하고 안정되도록 해야 하고 확립하도록 해야 한다.」라고 말하는데,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라고 직접 알려줍니다. ― 「바른 견해-정견(正見) = 바른 봄」


삶은 인식과 행위입니다. 행위는 관심을 통해 인식에 전달되고, 인식은 takka의 가공을 통해 행위로 전달되는데, takka의 가공은 이렇게 ①구체적 행위의 출발점인 vitakka와 함께 ②세상을 보는 관점인 견해의 두 가지 갈래로 행위에 전달되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을 보는 관점인 견해는 이렇게 다른 갈래로 출발하여 구체적 행위의 아래에서 작용하며 행위의 질을 결정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식과 행위로 구성되는 삶은 앎과 봄에 의해 그 질적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고, 부처님은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있는 그대로의 앎과 봄의 아주 청정함이 생겼을 때 비로소 깨달음을 선언하게 되는 것입니다. → 그림① 「지(知-ñāṇa-jānanta)와 견(見-dassana-passanta)」


이때, (AN 4.49-전도(顚倒) 경)은 봄에 대한 특별한 시각을 제시합니다. 무상(無常)에 대해 상(常)이라는 전도(轉倒), 고(苦)에 대해 락(樂)이라는 전도, 무아(無我)에 대해 아(我)라는 전도, 부정(不淨)에 대해 정(淨)이라는 전도가 상(想-saññā)과 심(心-citta)과 견해(diṭṭhi)로 이어지는 세 단계의 자리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하고, 역으로, 무상(無常)에 대해 무상(無常)이라는 전도되지 않음, 고(苦)에 대해 고(苦)라는 전도되지 않음, 무아(無我)에 대해 무아(無我)라는 전도되지 않음, 부정(不淨)에 대해 부정(不淨)이라는 전도되지 않음도 상(想)과 심(心)과 견해로 이어지는 세 단계의 자리에서 완성된다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takka의 가공을 위한 출발 자리에 상(想)이 있고, 과정의 중심에서 심(心)이 생겨난 뒤에[심행(心行)=상(想)-수(受)] 행위로 전달되는 자리에 견해로 작용한다는 순서적인 설명입니다. 그래서 견해는 「상(想) → 심(心) → 견해」의 과정으로 가공된 것이라고 알 수 있습니다. → 그림② 「지(知-ñāṇa-jānanta)와 견(見-dassana-passanta)」


이 과정은 중요합니다. 인식에 공동 주관으로 참여하여 인식의 질을 결정하는 관심(chanda)은 관심 자체를 제어하면 인식의 질을 향상할 수 있지만, 인식을 행위에 전달하는 과정은 견해의 직접 제어에 이어 그 가공 과정에 해당하는 심(心)과 상(想)에 대한 근원적인 제어가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vitakka로부터 출발하는 구체적 행위 과정이 상(常)-락(樂)-아(我)-정(淨)의 전도된 견해 위에서 진행될 때 집착[취(取)]이라고 부르는데, 연기(緣起)의 아홉 번째 지분입니다.


연기(緣起)는 중간에서 「⑦수(受) → ⑧애(愛) → ⑨취(取)」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이 과정이 「상(想) → 심(心) → 견해」의 과정과 병행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실제로 ①무명(無明)과 ②행(行)[심행(心行)=상(想)-수(受)]이고, 유위(有爲)의 행(行)으로 진행되어 ③식(識)-④명색(名色)으로 이어집니다. 삶의 메커니즘 위에서 「⑦수(受) → ⑧애(愛)」의 과정을 구성하는 takka 안에 「①무명(無明) → ②행(行)」이 자리하는 시각적 이해의 내용입니다.


한편, (SN 23.1-마라 경)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마라-죽이는 자-죽는 자-아픔-종기-화살-실망-실망스럽게 누적된 것이라고 보아야 바르게 보는 것이라고 말한 뒤에, 바르게 보는 것은 염오(厭惡)를 위한 것이고, 이어서 이탐(離貪)-해탈(解脫)-열반(涅槃)으로 완성되는 목적성을 함께 제시하는데, 견해에 이어서 심(心)과 상(想)의 순차적 접근에 의한 근원적 제어와 역순으로 연결됩니다.


이런 메커니즘적 설명 위에서 수행은 이렇게 개괄됩니다. ― 「사념처(四念處) → 사마타-위빳사나」 ― [견해를 직접 제어하는 수행 - 사념처(四念處), 심(心)을 직접 제어하는 수행 - 사마타, 상(想)을 직접 제어하는 수행 – 위빳사나] → 그림③ 「삶의 메커니즘과 지(知)-견(見)과 수행(修行)」


이렇게 지(知)와 견(見)은 수행(修行)으로 이어지는데, 이 책에서는 수행지도(修行地圖)로써 개괄하였습니다.

Comments

sukhavasa 2020.12.04 12:23
스님, 그림 1,2,3 을 찾을 수가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