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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2) 사실

māna의 개념과 번역어 선택(자만 → 자기화)

3 163 2023.10.08 12:58

māna의 개념과 번역어 선택(자만 → 자기화)

 

māna는 주로 자만(自慢)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근본경전연구회는 그 의미를 추적하여 ‘자기화’라고 해석하였습니다.


1. 번역어의 선택 과정


• 자만(自慢)[명사]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 있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며 뽐냄.

  유의어 : 현능, 과시

 

māna라는 용어에 대한 검토입니다. 자만(自慢)-교만-거만-오만-자부심 등으로 번역되었고, pride, conceit, arrogance 등으로 영역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번역이 이 용어에 대한 적절한 해석은 아닌 것 같습니다. māna는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이라고 정의되기 때문입니다. ― 「ahaṅkāramamaṅkāramāna (ahaṅ-kāra)-(mamaṅ-kāra)-(māna)」


그래서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해석해야 그것을 부르는 용어로의 māna를 설명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때, (AN 4.49-전도 경)은 상(常)-락(樂)-아(我)-정(淨)의 전도된 상(想)-심(心)-견해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의 전도되지 않은 상(想)-심(心)-견해를 말합니다. 또한, 물리침의 법(paṭivinītā) 또는 질의응답으로 설명한 부처님의 가르침(paṭipucchāvinītā)은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는 아(我)로부터의 관찰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는 무아(無我)로부터의 관찰을 말합니다. ⇒ 그림 참조


그렇다면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은 아(我)로부터의 관찰자 즉 중생이고, māna는 아(我)로부터의 관찰자의 관찰 작용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 「아(我)라는 전도된 상(想)-심(心)-견해에 의해서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라고 관찰하는 작용 = māna」


배우지 못한 범부의 아(我)를 전제한 관찰②.jpg

 

•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는 관찰 유예

 

한편, (AN 6.76-아라한의 경지 경)은 아라한의 경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māna-omāna(열등의 māna)-atimāna(우월의 māna)-adhimāna(뽐냄의 māna)-thambha(완고)-atinipāta(비열)의 여섯 가지를 끊어야 한다고 합니다. māna를 포함하여 조성된 단어 세 가지(omāna-atimāna-adhimāna)가 함께 나타나는데, māna에 의해 나와 남을 만든 뒤 남들과의 관계로 확장된 개념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만이라고 번역되는 빠알리 단어가 하나 더 있습니다. vidha인데, 「세 가지 자만(vidha) ― ‘내가 더 뛰어나다.’라는 자만(seyyohamasmīti vidhā), ‘나와 동등하다.’라는 자만(sadisohamasmīti vidhā), ‘내가 더 못하다.’라는 자만(hīnohamasmīti vidhā)」으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두 단어[māna - vidhā]를 동의어로 보지는 않아야 합니다. (SN 18.22-제거 경)은

 

“kathaṃ nu kho, bhante, jānato kathaṃ passato imasmiṃ ca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hā ca sabbanimittesu ahaṅkāramamaṅkāramānāpagataṃ mānasaṃ hoti vidhā samatikkantaṃ santaṃ suvimuttan”ti?


라고 묻는 데, 이때 (ahaṅ-kāra)-(mamaṅ-kāra)-(māna)-(apagataṃ)의 māna와 vidhā가 함께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라고 자신을 만드는 작용인 māna에서 더 나아가 세상을 만나면서 남들과의 관계에서 [더 뛰어나다-동등하다-더 못하다]라는 비교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vidha인 것 같습니다. 또한, (AN 6.76-아라한의 경지 경)이 말하는 omāna-atimāna-adhimāna는 māna라는 기본 의미의 용어가 남들과의 관계로 확장된 개념의 용어들이라는 점에서 vidha와 유사성이 발견되기 때문에 māna와 vidha는 함께 검토되어야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접근을 통해 māna는 기존의 번역과 다르게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자기화’로, vidhā는 자기화된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으로의 ‘자만’이라고 기존의 번역과 같이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면 (AN 6.76-아라한의 경지 경)의 네 가지는 자기화-열등의 자기화-우월의 자기화-뽐냄의 자기화가 되고, (SN 18.22-제거 경)의 문장은 


“대덕이시여,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는 자에게 의(意)는 식(識)과 함께한 이 몸과 밖의 모든 상(相)에서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자기화를 제거하고, 자만을 넘어섭니까, 평화롭게 잘 해탈합니까?” 


라고 번역됩니다.


2.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 asmimāna & asmīti māna


한편, māna는 asmi와 연결됩니다. asmimāna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asmi는 atthi[to be, to exist]의 1인칭 현재형이어서 [I am - 나는 있다]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입니다. 이런 형태로는 avijjamāna도 있는데 이 단어는 avijjā-māna가 아니라 a vijjamāna여서 not existing. (adj.)의 의미를 가집니다. 아마도 이런 의미로 쓰이는 이런 형태의 단어는 asmimāna뿐인 것 같습니다.

 

이때 asmimāna는 asmi에 의해 수식되는 māna거나 아니면 asmi와 동격인 māna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DN 33-합송경)과 (DN 34-십상경)에서 asmimānasamugghāto로 나타나는 문구가 (AN 6.13-해방되어야 함 경)에서는 asmīti mānasamugghāto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동일한 내용을 설하는 경전들이 asmimāna를 asmīti māna 즉 'asmī라는 māna[asmī=māna]'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 아(我)를 전제한 관찰 → ‘나는 있다’라는 māna →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듦

 

그렇다면 māna를, 앞에서 검토하였듯이, asmī 즉 '나는 있다.'라는 존재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또한, vidha는 이 존재로서의 나를 남들과 비교하여 그 우열을 따지는 것이어서, māna와 동의어가 아니라 māna 이후에 비교의 과정을 지시하는 다른 의미로 이해하는 것도 역시 타당합니다[māna → vidhā]. 그래서 māna는 ‘자기화’이고, vidhā는 자기화된 이후 다른 존재와의 비교를 지시하는 ‘자만’으로 번역하는 것은 타당합니다.

 

그런데 māna는 높은 단계의 족쇄에 속합니다. 열 가지 족쇄 중 불환자 성취 이후에 끊어지는 족쇄[오상분결(五上分結) ― 색탐(色貪)-무색탐(無色貪)-자기화-들뜸-무명(無明)] 중 세 번째입니다. 말하자면, 무명에 의해 존재화 되고[식(識)], 들뜸에 의해 흔들리면[심(心)] 자기화되어 ‘나는 있다!’라고 자신의 존재를 선언함으로써[의(意)] 나와 나의 것을 만들어 윤회하는 삶을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3. 「takka → 애(愛), chanda → 자기화」의 대응 관계

 

(AN 6.106-애(愛) 경)은 「어떤 세 가지 자기화를 버려야 하는가? 자기화, 열등의 자기화, 우월의 자기화이다. 이러한 세 가지 자기화를 버려야 한다[katame tayo mānā pahātabbā? māno, omāno, atimāno — ime tayo mānā pahātabbā].」라고 하여 māno, omāno, atimāno를 버릴 것을 지시합니다. 


특히, 이 경은 애(愛)와 자기화를 함께 버릴 것을 말하는데, 고집(苦集)인 애(愛)와 자기화의 연결된 관계를 유추케 합니다.


“tisso imā, bhikkhave, taṇhā pahātabbā, tayo ca mānā. katamā tisso taṇhā pahātabbā? kāmataṇhā, bhavataṇhā, vibhavataṇhā — imā tisso taṇhā pahātabbā. katame tayo mānā pahātabbā? māno, omāno, atimāno — ime tayo mānā pahātabbā. yato kho, bhikkhave, bhikkhuno imā tisso taṇhā pahīnā honti, ime ca tayo mānā; ayaṃ vuccati, bhikkhave, bhikkhu acchecchi taṇhaṃ, vivattayi saṃyojanaṃ, sammā mānābhisamayā antamakāsi dukkhassā”ti.


비구들이여, 이런 세 가지 애(愛)와 세 가지 자기화를 버려야 한다. 어떤 세 가지 애(愛)를 버려야 하는가? 욕애(欲愛), 유애(有愛), 무유애(無有愛) ― 이런 세 가지 애(愛)를 버려야 한다. 어떤 세 가지 자기화를 버려야 하는가? 자기화, 열등의 자기화, 우월의 자기화― 이런 세 가지 자기화를 버려야 한다. 비구들이여, 비구에게 이런 세 가지 애(愛)와 세 가지 자기화가 버려질 때, 비구들이여, 비구는 애(愛)를 잘랐고, 족쇄를 끊었고, 바른 자기화의 관통을 통해 괴로움을 끝냈다.’라고 불린다. 


이때, (SN 22.89-케마까 경)은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나는 있다’라는 관심,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asmīti māno, asmīti chando, asmīti anusayo)의 전개를 말합니다.


“kiñcāpi, āvuso, ariyasāvakassa pañcorambhāgiyāni saṃyojanāni pahīnāni bhavanti, atha khvassa hoti — ‘yo c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nusahagato asmīti māno, asmīti chando, asmīti anusayo asamūhato. so aparena samayena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ī viharati — iti rūpaṃ, iti rūpassa samudayo, iti rūpassa atthaṅgamo; iti vedanā... iti saññā... iti saṅkhārā... iti viññāṇaṃ, iti viññāṇassa samudayo, iti viññāṇassa atthaṅgamo’ti. tassimesu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udayabbayānupassino viharato yopissa hoti pañcasu upādānakkhandhesu anusahagato ‘asmī’ti, māno ‘asmī’ti, chando ‘asmī’ti anusayo asamūhato, sopi samugghātaṃ gacchati.


도반들이여, 성스러운 제자에게 오하분결(五下分結)이 버려진다 해도 오취온(五取蘊)에 대한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나는 있다’라는 관심,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은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습니다. 그는 나중에 오취온에서 생겨남과 무너짐을 이어보면서 머뭅니다. — ‘이렇게 색(色)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색(色)의 줄어듦이 있다. 이렇게 수(受)가 있고 … 이렇게 상(想)이 있고 … 이렇게 행(行)들이 있고 … 이렇게 식(識)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자라남이 있고, 이렇게 식(識)의 줄어듦이 있다.’라고. 오취온에서 생겨남과 무너짐을 이어보면서 그에게 오취온(五取蘊)에 대해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은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 ‘나는 있다’라는 관심,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도 뿌리뽑힙니다.


‘나는 있다’라는 하나의 상태를 자기화와 관심과 잠재성향의 자리에 함께 적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유위(有爲)에서의 행위[행(行)]의 결과로 잠재하는 상(想)이 행위의 재현을 위한 경향성이므로 잠재성향은 생겨남의 측면에서 상(想)을 지시하는 용어이고, 같은 맥락에서 번뇌[루(漏)]는 2차 인식에 공동주관으로 참여하는 상(想)의 작용성입니다.


• 행(行) = 유위에서의 행위 → 잠재성향 = 상(想) → 번뇌[루(漏)]라는 작용성으로 2차 인식에 공동주관으로 참여


그러면 ‘나는 있다’의 세 자리에서 잠재성향은 전도된 상(想)이고, takka의 영역의 출발점이고, 그 결과로 애(愛)를 형성합니다. 이 자리의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 번뇌의 부서짐[누진(漏盡)]이고, 애멸(愛滅)인데, 수행의 완성 즉 깨달음입니다. 이때, 누진(漏盡)과 더불어 수행의 완성으로 제시되는 것이 욕탐(欲貪-chandarāga)의 제어인데, 번뇌의 영향 위에 있는 유위의 행위 상태를 싣고 인식에 전달하는 관심(chanda)입니다.


• 수행의 두 중심 자리 ― ①번뇌의 부서짐[누진(漏盡)], ②욕탐(欲貪)의 제어


이렇게 수행은 takka에서 번뇌를 부숨으로써 애멸(愛滅)을 성취하여 행위의 문제를 해소하는 자리와 욕탐(欲貪)을 제어하여 인식의 문제를 해소[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 → 여리작의(如理作意), 상(相-nimitta) → 무상(無常-animitta)하는 두 개의 관점으로 설명됩니다. 그래서 관심과 잠재성향은 「행위의 영역(takka) : 잠재성향-상(想)-번뇌 → 인식의 영역 : 관심(chanda)」의 방향성을 가집니다. 물론, 순환의 구조에 의해서 인식의 영역은 다시 행위의 영역으로 이어집니다.


• 인식과 행위의 출발과 결과① ― 「takkāvacaro → 애(愛), 관심 → ?」

• 인식과 행위의 출발과 결과② ― 「atakkāvacaro → 애멸(愛滅), 관심 → ?」


그런데 관심이 탐(貪)을 싣고 온 상태 즉 욕탐(欲貪)은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와 상(相-nimitta)입니다. 비여리작의는 내입처가 외입처를 인식할 때 욕탐 때문에 내입처를 구성하는 의(意)의 작용이 사실에 괴리된 경우이고, 상(相-nimitta)은 욕탐 때문에 외입처가 왜곡된 상태입니다. 그리고 이런 괴리와 왜곡의 과정 때문에 ‘나의 것이 아니고, 내가 아니고,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사실 그대로 알고 보지 못하고 ‘나의 것이고, 나고, 나의 아(我)다.’라고 잘못 알고 보게 합니다. 이때, 아(我)가 전제된 관찰 위에서 ‘나의 아(我)’라는 관찰에 이어 ‘나의 것’과 ‘나’라고 관찰하는 것이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작용’이라고 할 텐데, 경은 이런 작용을 māna(자기화)라고 지시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takka → 애(愛), 관심 → ?」에서 관심의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 māna(자기화)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응 관계는 


• 인식과 행위의 출발과 결과① ― 「takkāvacaro → 애(愛), 관심 → 자기화」

• 인식과 행위의 출발과 결과② ― 「atakkāvacaro → 애멸(愛滅), 관심 → 자기화의 해소」


로 완성되는데, 


• 「잠재성향-상(想)-번뇌 → 애(愛), chanda → 자기화」


의 구조로 요약됩니다.

 

‘나는 있다’의 세 자리 ‒ 「잠재성향 → 관심 → 자기화」.jpg

 

4. māna(자기화)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삶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愛)에 묶여서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은 몸이 무너진 뒤에 몸으로 갑니다(SN 12.19-우현(愚賢) 경). 그래서 몸이 있는 상태 즉 유신(有身-sakkāya)입니다. 반면에, 무명과 애가 해소되면 몸이 무너진 뒤 몸으로 가지 않아 태어나지 않게 되는데, 몸의 제약을 해소하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생(生)-노(老)-사(死)의 문제 해소]으로의 깨달음입니다.


이때, 유신(有身)은 오취온(五取蘊)인데(SN 22.105-유신 경), 지난 삶의 과정의 누적인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오온(五蘊)이 루(漏-번뇌)와 함께하고 집착하기 마련인 상태(sāsavaṃ upādāniyaṃ)를 의미합니다(SN 22.48-온(蘊) 경). 이렇게 단지 쌓여있는 것인 오온(五蘊)을 루(漏-번뇌) 때문에 아(我-attan)가 전제된 관찰[→나의 아(我)]의 연장선에서 욕탐(欲貪)이 붙잡으면 오취온(五取蘊)이 되는데, 오취온과 밖의 색을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로 펼친 뒤에 이어지는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작용을 māna(자기화)라고 정의합니다. ― 「식(識)과 함께한 이 몸과 밖의 모든 상(相)에서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자기화(imasmiṃ ca saviññāṇake kāye bahiddhā ca sabbanimittesu ahaṅkāramamaṅkāramānā)(별첨 용례 참조).」 


아(我-attan)를 전제한 관찰은 오취온(五取蘊)에 대한 ‘나는 있다(asmi)’라는 자기화(māna), ‘나는 있다’라는 관심(chanda), ‘나는 있다’라는 잠재성향(anusaya)을 함께 이끄는데, 이 세 가지는 오하분결(五下分結)이 버려진다 해도 계속 함께하고 뿌리 뽑히지 않다가 오취온(五取蘊)의 생겨남-무너짐의 관찰을 통해 제거됩니다(SN 22.89-케마까 경). 


특히, 아(我-attan)를 전제한 관찰은 ‘나는 있다(asmi)’를 사라지지 않게 하는데, 이때, 안근(眼根)~신근(身根)의 다섯 가지 기능이 참여하여 인식 작용이 진행됩니다(SN 22.47-관찰 경). 또한,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무상(無常)의 상(想)을 닦아야 합니다. 무상(無常)의 상(想)을 가진 자에게 무아(無我)의 상(想)이 확립되고, 무아(無我)의 상(想)을 가진 자는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를 뿌리 뽑고(asmimānasamugghāta)(용례 참조), 지금여기에서 열반을 성취합니다(AN 9.1-깨달음 경). 그래서 (SN 22.102-무상(無常)의 상(想) 경)은 「닦고 많이 행한 무상(無常)의 상(想)은 모든 욕탐(慾貪)을 파괴한다. 모든 색탐(色貪)을 파괴한다. 모든 유탐(有貪)을 파괴한다. 모든 무명(無明)을 파괴한다. 모든 ‘나는 있다’라는 자기화를 뿌리 뽑는다.」라고 합니다. 탐(貪)이 파괴되면 애(愛)가 파괴되고 무명(無明)마저 파괴되면 takka 내부의 모든 문제가 해소되고, 그 연장선 위에서 삶은 더 이상 자기화하지 않게 됩니다.


또한, 애(愛)를 자르고 족쇄를 끊고 자기화를 관통하는 것은 정형된 형태로 함께하여 괴로움의 끝을 말합니다. ― 「acchecchi taṇhaṃ, vivattayi saṃyojanaṃ, sammā mānābhisamayā antamakāsi dukkhassā 애(愛)를 잘랐고, 족쇄를 끊었고, 바른 자기화의 관통을 통해 괴로움을 끝냈다.(용례 참조)」


애(愛)는 탐(貪)과 소망이 함께한 것이어서 무명(無明) 이후의 요소이면서 takka의 결과입니다. (AN 10.13-족쇄 경)은 다섯 가지 낮은 단계의 족쇄[오하분결(五下分結)]로 유신견(有身見), 의심, 계금취(戒禁取), 소유의 관심, 진에(瞋恚)을 말하고, 다섯 가지 높은 단계의 족쇄[오상분결(五上分結)]로 색탐(色貪), 무색탐(無色貪), 자기화, 들뜸, 무명(無明)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애(愛)를 기준으로 애(愛)의 형성 과정 즉 takka의 안과 밖으로 분류된 족쇄들인데, 무명(無明) 이후 애(愛)에 이르는 과정 즉 takka의 안의 영역에는 들뜸과 색탐(色貪)-무색탐(無色貪)이 있고, 그 연장선 위에서 인식의 자리에 자기화가 있습니다. 이때, 색탐(色貪)-무색탐(無色貪)은 애(愛)를 구성하는 탐(貪)입니다. 그래서 takka의 영역은 「무명(無明) → 들뜸 → 애(愛)」로 구성되고, 그 연장선 위에서 인식으로 연결되어 자기화한 뒤 비여리작의(非如理作意)와 상(相-nimitta)에 의한 유위(有爲)의 인식 과정을 이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잠재성향이 작용하는 takka에서 결과된 애(愛)는 관심(chanda)으로써 인식에 연결되어 나를 만들고 나의 것을 만드는 것인 자기화를 이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별첨】 자기화(māna)의 중요 용례 → 답글 참조

Comments

대원행 2023.10.08 22:04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1_09&wr_id=3 참조 (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109. 보름달 큰 경[오취온-자기화 & 처=식+근]
대원행 2023.10.16 22:20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6_01_01&wr_id=64 참조 ((SN 1.9-자기화를 즐기는 자 경)[자기화와 방일-불방일 & 죽음의 땅을 건넘]
대원행 04.14 20:55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2&wr_id=268 참조 (앙굿따라 니까야 관통 법회 4-(66~70)[자기화 - 자애를 펼침(두루 미치게 함) - 지도자의 역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