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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입문(2) 사실

무아(無我) ‒ 아(我)가 전제된 관찰

[7] 무아(無我) ‒ 아(我)가 전제된 관찰


무아(無我)의 주제에서 살펴볼 중요한 주제는 배우지 못한 범부(assutavā puthujjano)와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sutavā ariyasāvako)가 쌍으로 나타나는 용례인데, ①아(我)가 전제된 관찰의 용례와 ②기타 용례로 구성됩니다.


[Ⅰ] 아(我)가 전제된 관찰 ― 배우지 못한 범부와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함께 비교되는 경들


1. 개요


배우지 못한 범부는 아(我)가 전제된 관찰을 하고,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아(我)가 전제된 관찰을 하지 않습니다.


• 아(我)가 전제된 관찰 ― 아(我)로부터 관찰(attato samanupassati) → 아(我)라는 전도된 상(想)-심(心)-견해에 토대한 삶 → 사실에 괴리(乖離)된 삶 = 거짓 → 고(苦)


• 아(我)가 전제된 관찰을 하지 않음 ― 아(我)로부터 관찰하지 않음(na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 아(我)라는 전도된 상(想)-심(心)-견해에 토대하지 않은 삶 → 무아(無我)라는 전도되지 않은 상(想)-심(心)-견해에 토대한 삶 → 사실에 부합(符合)한 삶 = 참 → 고멸(苦滅) = 락(樂)


배우지 못한 범부의 아(我)가 전제된 관찰은 오온(五蘊)에 대해 이루어지는데, ①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②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거나, ③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하는 것입니다.(오온에 반복) ―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rūpaṃ, rūpasmiṃ vā attānaṃ[색(色)을 아(我)로부터 관찰합니다.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거나,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합니다.(오온에 반복)」


배우지 못한 범부의 아(我)를 전제한 관찰①.jpg

그런데 아(我)가 전제된 관찰에 대한 이런 이해는 그대로 (SN 22.59-무아상(無我相) 경) 등이 말하는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는 정형구와 같습니다. ‘색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는 것은 그대로 ‘색(色)은 나의 것이다.’라고 관찰하는 것이고,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는 것은 그대로 ‘색(色)이 나다.’라고 관찰하는 것이며,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하는 것은 그대로 ‘색(色)은 나의 아(我)’라고 관찰하는 것입니다.


배우지 못한 범부의 아(我)를 전제한 관찰②.jpg

 

그래서 (SN 22.59-무아상(無我相) 경)이 말하는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의 부당함과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가 아니다.’라고 관찰하는 것」의 당위성은 그대로 ‘아(我)가 전제된 관찰’의 부당함과 ‘아(我)가 전제된 관찰을 하지 않음’의 당위성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2. 용례① ― 유신견(有身見)


이 용례의 첫 번째 주제는 유신견(有身見)의 유무(有無)에 대한 조건 관계입니다. ― 「유신견(有身見-sakkāyadiṭṭhi)은 유신(有身) 즉 오취온(五取蘊)인 나에 대한 유위(有爲)의 견해인데, 오온(五蘊)에 대해 ①[아(我)가 전제된 관찰]을 할 때 생기고, ①[아(我)가 전제된 관찰]을 하지 않을 때 없어짐」


아(我)가 전제된 관찰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을 아(我)로부터 즉 아(我)라는 관점을 전제하고서 세 가지로 관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간의 해석은 ‘아(我)로부터’를 전제된 관점으로 이해하지 않고 뒤의 세 가지에 더해 모두 네 가지로 관찰한다고 설명하는데,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각각에 대한 네 가지의 관찰이어서 ‘5×4=20’개의 삿된 견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의 빠알리 원전은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rūpaṃ, rūpasmiṃ vā attānaṃ 인데, 빠알리 문법에서 vā가 세 번이면 ‘또는(or)’으로 연결되는 숫자가 셋이기 때문에 이 경우는 5×3=15개의 경우로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4를 3으로 수정하면 4의 이해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게 되는데, 무아(無我)를 선언하는 다른 경들과의 연결입니다. (SN 22.59-무아상(無我相) 경) 등은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인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한가?’라고 묻는데, 아(我) 아닌 것에 대해 아(我)를 전제한 이런 관찰이 타당한지의 질문입니다. 


경은 다시 모든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에 대해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바른 지혜로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한다고 관찰의 기준을 제시합니다.


상(常)하고 락(樂)이고 영원한 것 즉 아(我)라면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모두 무아(無我)이기 때문에[제법무아(諸法無我)] 어떠한 것이든 아(我)라고 설정된 것[거짓]에게 부여된 성질인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설명입니다.


즉 무상(無常)하고 고(苦)이고 변하는 것인 오온(五蘊)을 아(我)라고 잘못 보면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하게 되는데, 아(我)라는 관점의 전제 위에서 관찰되는 세 가지 방법입니다. 이런 점에서 관찰 방법과 관련한 두 가지 용례는 ①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는 ‘이것은 나의 것이다.’와, ②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는 것은 ‘이것은 나다.’와, ③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하는 것은 ‘이것은 나의 아(我)다.’와 동치(同値)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관찰하는 자는 배우지 못한 범부이고, 이렇게 관찰하지 않는 자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라고 경들은 말하는 것입니다.


아(我)라는 설정[사견(邪見)] 위에서 세상을 보는 배우지 못한 범부는 이런 세 가지 방법으로 관찰합니다. 그러나 아(我)라는 설정을 가지지 않은[정견(正見)]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이런 세 가지 방법으로 세상을 관찰하지 않습니다. 여실지견(如實知見)이고 깨달음에 의해 얻어지는 해탈(解脫)된 삶입니다.


• 용례 ― 「ev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diṭṭhi hotī. 이렇게, 도반 위사카여, 유신견(有身見)이 있습니다.」 ― cūḷavedallasuttaṃ (MN 44-교리문답의 작은 경)/mahāpuṇṇamasuttaṃ (MN 109-보름달 큰 경)/puṇṇamasuttaṃ (SN 22.82-보름달 경)/dutiyaisidattasuttaṃ (SN 41.3-이시닷따 경2)


“kathaṃ panāyye, sakkāyadiṭṭhi hotī”ti? “idhāvuso visākha, assutavā puthujjano, ariyānaṃ adassāvī ariyadhammassa akovido ariyadhamme avinīto, sappurisānaṃ adassāvī sappurisadhammassa akovido sappurisadhamme avinīto,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rūpaṃ, rūpasmiṃ vā attānaṃ. vedanaṃ ... pe ... saññaṃ... saṅkhāre... viññāṇaṃ attato samanupassati, viññāṇavantaṃ vā attānaṃ, attani vā viññāṇaṃ, viññāṇasmiṃ vā attānaṃ. ev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diṭṭhi hotī”ti.


“그러면 스님, 어떻게 유신견(有身見)이 있습니까?” “도반 위사카여, 여기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 대해 능숙하지 못하고, 성스러운 법에서 훈련되지 못하고, 고결한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고결한 법에 대해 능숙하지 못하고, 고결한 법에서 훈련되지 못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색(色)을 아(我)로부터 관찰합니다.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거나,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합니다. 수(受)를 … 상(想)을 … 행(行)들을 … 식(識)을 아(我)로부터 관찰합니다. 식(識)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식(識)을 관찰하거나, 식(識)에서 아(我)를 관찰합니다. 도반 위사카여, 이렇게 유신견(有身見)이 있습니다.”


[초기불전연구원] 물질을 자아라고 관찰하고, 물질을 가진 것이 자아라고 관찰하고, 자아 안에 물질이 있다고 관찰하고, 물질 안에 자아가 있다고 관찰합니다.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물질을 자아로 여기고, 물질을 가진 것을 자아로 여기고, 자아 가운데 물질이 있다고 여기고, 물질 가운데 자아가 있다고 여깁니다.


[PTS] regards material shape as self or self as having material shape or material shape as in self or self as in material shape


[Thanissaro Bhikkhu] assumes form (the body) to be the self, or the self as possessing form, or form as in the self, or the self as in form.


[Sister Upalavanna] reflects matter in self, or a material self, or in self matter, or in matter self.


[Lord Chalmers] he views material Form as Self, or Self as having Form, or Form as in Self, or Self as in Form.


[Bhikkhu Bodhi] regards material form as self, or self as possessed of material form, or material form as in self, or self as in material form


“kathaṃ panāyye, sakkāyadiṭṭhi na hotī”ti?


“그러면 스님, 어떻게 유신견(有身見)이 없습니까?”


“idhāvuso visākha, sutavā ariyasāvako, ariyānaṃ dassāvī ariyadhammassa kovido ariyadhamme suvinīto, sappurisānaṃ dassāvī sappurisadhammassa kovido sappurisadhamme suvinīto, na rūpaṃ attato samanupassati, na rūpavantaṃ vā attānaṃ, na attani vā rūpaṃ, na rūpasmiṃ vā attānaṃ. na vedanaṃ ... pe ... na saññaṃ... na saṅkhāre ... pe ... na viññāṇaṃ attato samanupassati, na viññāṇavantaṃ vā attānaṃ, na attani vā viññāṇaṃ, na viññāṇasmiṃ vā attānaṃ. evaṃ kho, āvuso visākha, sakkāyadiṭṭhi na hotī”ti.


“도반 위사카여, 여기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고, 성스러운 법에 대해 능숙하고, 성스러운 법에서 훈련되고, 고결한 사람을 만나고, 고결한 법에 대해 능숙하고, 고결한 법에서 훈련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색(色)을 아(我)로부터 관찰하지 않습니다.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거나,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하지 않습니다. 수(受)를 … 상(想)을 … 행(行)들을 … 식(識)을 아(我)로부터 관찰하지 않습니다. 식(識)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식(識)을 관찰하거나, 식(識)에서 아(我)를 관찰하지 않습니다. 도반 위사카여, 이렇게 유신견(有身見)이 없습니다.”


3. 용례② ― 현재의 법에 끌려감


(MN 131-상서로운 하룻밤 경)/(MN 132-아난다의 상서로운 하룻밤 경)은


과거에 대해 돌아오길 바라지 말고, 미래를 동경하지 말라.

과거는 버려졌고, 미래는 얻지 못했다.


현재의 법을 거기서 거듭 통찰하라.

현명한 자는 끌려가지 않고, 안정됨 위에서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바로 오늘 노력해야 한다. 내일 죽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 큰 죽음의 군대에게 동의하지 말라.


이렇게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게 노력하며 머무는 자

참으로 그를 상서로운 하룻밤을 가진 자, 평화로운 성자라고 말한다.


라는 게송에 이어 ‘어떻게 현재의 법에 끌려가는가?’라는 설명에서 아(我)가 전제된 관찰에 의한 끌려감을 말합니다.


이외에 (MN 133-마하깟짜나의 상서로운 하룻밤 경)/(MN 134-로마사깡기야의 상서로운 하룻밤 경)도 이 게송을 반복합니다. 그리고 (SN 22-온(蘊) 상윳따)와 (SN 35-육처(六處) 상윳따)의 몇 개의 경들은 오온(五蘊)-육내외입처(六內外入處)에 대해 과거의 것들은 원하지 않고(anapekkho hoti), 미래의 것들은 기뻐하지 않으며(nābhinandati), 현재의 것들의 염오(厭惡)-이탐(離貪)-소멸(消滅)을 위해 실천한다(nibbidāya virāgāya nirodhāya paṭipanno hoti)고 하여 현재[지금여기-here and now]에 집중된 삶을 강조합니다.


4. 용례③ ― 어떻게 몸도 병들고 심(心)도 병듭니까?


(SN 22.1-나꿀라삐따 경)은 몸은 병들어도 심(心)은 병들지 말 것이 주제입니다. 경은 ‘어떻게 몸도 병들고 심(心)도 병듭니까?’의 질문에 아(我)가 전제된 관찰로써 답하고, ‘어떻게 몸은 병들어도 심(心)은 병들지 않습니까?’의 질문에 아(我)가 전제된 관찰을 하지 않음으로 답합니다. 


그런데 이 경은 한 가지 특징을 보여줍니다. 아(我)가 전제된 관찰은 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아(我)에서 색(色)을 관찰하거나, 색(色)에서 아(我)를 관찰하는 세 가지 방식이 그대로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는 세 가지와 동치되어 무아(無我)를 설명하는데, 이 경은 아(我)를 관찰하는 세 가지 방식 위에서 ‘나는 색(色)이다. 색(色)은 나의 것이다.’라는 두 가지만을 대비하면서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의 생김과 연결합니다.


여기에서 ‘나의 아(我)다.’라는 관찰은 생(生)-노사(老死)의 윤회하는 근본 괴로움과 대응하고, ‘나는 색(色)이다. 색(色)은 나의 것이다.’라는 관찰은 윤회하는 삶 위에 수반되는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의 괴로움과 대응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5. 용례④ ― 집착과 동요의 자리


(MN 138-대강의 분석 경)과 (SN 22.7-집착에 따르는 동요 경)은 집착[취(取)-upādāna-연기의 9번 지분]과 동요(paritassanā)에 대한 연결된 상황을 설명합니다.


(MN 138-대강의 분석 경)은 집착하지 않으면서 동요함과 집착하지 않으면서 동요하지 않음을 설명하고, (SN 22.7-집착에 따르는 동요 경)은 집착하여 동요함과 집착하지 않으면서 동요하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집착

동요

(MN 138-대강의 분석 경)

×

×

×

(SN 22.7-집착에 따르는 동요 경)

×

×


이때, 두 경을 함께 정리하면 「①집착하여 동요함 → ②집착하지 않으면서 동요함 → ③집착하지 않으면서 동요하지 않음」의 3단계로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집착은 표면의 법(takka의 밖)이고, 동요는 내면의 법(takka의 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6. 용례⑤ ― 대상의 끊어짐


(SN 22.55-감흥 경)은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라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나의 것도 없을 것이다.’라고 이렇게 기우는 비구는 오하분결(五下分結)을 끊을 것이다.”라는 부처님의 감흥을 주제로 하는데,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 가운데 아(我)에 대한 관점이 배제된 두 가지로 심(心)이 기울면 오하분결(五下分結)을 끊고 불환자에 이른다는 의미로 이해하였습니다. 물론, 세 가지 모두로 심(心)이 기울면 아라한에 이른다고 할 것입니다.


경은 어떻게 이런 방법으로 오하분결을 끊느냐는 문답이 이어진 뒤에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는 자에게 이어서 번뇌들의 부서짐이 있는지의 문답으로 이어집니다. 


경은 다시 ‘나는 색(色)으로부터 다른 곳, 수(受)로부터 다른 곳, 상(想)으로부터 다른 곳, 행(行)들로부터 다른 곳에서 식(識)이 오거나 가거나 죽거나 다시 태어나거나 늘어나거나 자라거나 충만 하는 것을 선언할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라는 경우는 없다고 하는데, 세상의 법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오온(五蘊)이므로 식(識)은 색(色)-수(受)-상(想)-행(行) 외 다른 곳에서 유래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합니다. 형이상학의 영역을 부정하는 불교의 입장이라고 하겠습니다.


한편, 경은 만약 비구에게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요소에 대한 탐(貪)이 버려지면, 탐(貪)의 버려짐 때문에 대상의 끊어짐이 있고, 식(識)의 머묾은 없다고 하는데, 대상의 끊어짐에 대해서 (SN 35.185-꼿티까 경)은 욕탐(欲貪)의 해소를 말합니다. 내입처와 외입처가 직접 묶여 있지 않고 제3의 묶는 자(공동주관)인 욕탐이 묶기 때문에 욕탐이 해소되면 대상 즉 외입처는 내입처로부터 끊어진다는 해석입니다. 또한, (SN 36.10-촉(觸)을 뿌리로 함 경)도 두 개의 나무토막을 맞대어 마찰할 때 열이 생기고 불이 붙고, 나무토막을 떼어놓으면 열이 식는 비유를 통해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을 욕탐(欲貪)의 측면에서 설명해줍니다. 그래서 육촉처(六觸處)의 단속의 의미가 욕탐(欲貪)의 제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7. 용례⑥ ― 오온(五蘊)의 주위를 달리고 맴 돔


(SN 22.99-가죽끈 경)은 「윤회(輪迴)는 시작이 알려지지 않는 것이다.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愛)에 묶여서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들에게 처음 시작점은 알려지지 않는다.」라는 정형된 문구 위에서 이런 중생들에게 괴로움은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여러 비유를 통해 알려줍니다. 


예를 들면, 튼튼한 말뚝이나 기둥에 묶여 있는 가죽끈에 묶인 개는 오직 그 말뚝이나 기둥의 주위를 달리고, 맴도는 것처럼, 아(我)를 전제한 관찰을 하는 배우지 못한 범부는 오온(五蘊)의 주위를 달리고 맴돌 뿐 오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움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我)를 전제한 관찰을 하지 않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오온의 주위를 맴돌지 않아서 오온에서 벗어나고, 괴로움의 영역에서 벗어납니다. 


8. 용례⑦ ― 오온(五蘊)의 주위를 달리고 맴 돔


(SN 22.117-속박 경)은 아(我)를 전제한 관찰을 하는 배우지 못한 범부는 오온(五蘊)의 속박에 묶인 자, 안팎의 속박에 묶인 자, 기슭을 보지 못한 자, 저편을 보지 못한 자라고 불리는데, 묶인 자는 늙고, 죽고,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간다고 알려줍니다.


그러나 아(我)를 전제한 관찰을 하지 않는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오온(五蘊)의 속박에 묶이지 않은 자, 안팎의 속박에 묶이지 않은 자, 기슭을 본 자, 저편을 본 자라고 불리는데, ‘그는 괴로움의 영역에서 벗어났다.’라고 부처님은 말합니다.


여기까지가 오온(五蘊)의 관찰에서 ①[배우지 못한 범부]와 ②[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함께 비교되는 경들의 모든 용례입니다.


[Ⅱ] 아(我)가 전제된 관찰 ― 배우지 못한 범부의 경우만 나타나는 경들


아(我)를 전제한 관찰에 있어 배우지 못한 범부의 경우만 나타나고,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직접 나타나는 대신 설명으로 대체된 경은 세 개가 있습니다.


1. 용례① ― 스스로 섬이 됨 & 섬=열반


(SN 22.43-스스로 섬이 됨 경)은 자주법주(自洲法洲) 즉 스스로 섬이 되고, 법을 섬으로 삼는 자는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는 무엇에서 생기고 무엇에서 발생하는가?’라고 근원을 조사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오온(五蘊)에 대해 아(我)를 전제한 관찰을 하는 자에게 오온(五蘊)이 변하고 다른 것이 되기 때문이라고 알려줍니다. 


이때, 자주법주(自洲法洲) 하는 자에게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의 근원을 관찰하라고 하는 이유는 자주법주(自洲法洲)의 방법이 사념처(四念處)이기 때문입니다.


• 사마타-위빳사나 ― 삶의 근원 즉 생노병사(生老病死)의 문제를 해소하고 윤회에서 벗어나는 수행


• 사념처(四念處) ― 생노병사(生老病死) 즉 윤회하는 삶의 과정에 수반되는 수비고우뇌(愁悲苦憂惱)[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의 해소


한편, 자주법주(自洲法洲) 즉 스스로 섬이 되고, 법을 섬으로 삼으라고 하는데, 섬[주(洲)]은 무엇입니까?


(KN 5.65-젊은 바라문 깝빠의 질문)은 「akiñcanaṃ anādānaṃ, nibbānaṃ, jarāmaccuparikkhayaṃ 곤란이 없고 집착이 없는 것, 늙음과 죽음이 완전히 부서진 열반(涅槃)」이라고 하여 열반이 섬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2. 용례② ―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질까?


(SN 22.81-빠릴레이야 경)은 ‘어떻게 알고 어떻게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질까?’라는 의문에 대해 부처님이 검증한 뒤 설한 사념처(四念處)-사정근(四正勤)-사여의족(四如意足)-오근(五根)-오력(五力)-칠각지(七覺支)-팔정도(八正道)의 일곱 가지 보리분법(菩提分法)이 그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경은 아(我)를 전제한 관찰을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함 → 아(我)로부터 색(色)을 관찰하지 않지만 ①색(色)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 → ②아(我)에서 색(色)을 관찰 → ③색(色)에서 아(我)를 관찰 → 아(我)로부터 수(受)를 관찰함 → 아(我)로부터 수(受)를 관찰하지 않지만 ①수(受)를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 → ②아(我)에서 수(受)를 관찰 → ③수(受)에서 아(我)를 관찰 → 아(我)로부터 상(想)을 관찰함 → 아(我)로부터 상(想)을 관찰하지 않지만 ①상(想)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 → ②아(我)에서 상(想)을 관찰 → ③상(想)에서 아(我)를 관찰 → 아(我)로부터 행(行)들을 관찰함 → 아(我)로부터 행(行)들을 관찰하지 않지만 ①행(行)들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 → ②아(我)에서 행(行)들을 관찰 → ③행(行)들에서 아(我)를 관찰 → 아(我)로부터 식(識)을 관찰 → 영원하다는 견해[상견(常見)] → 끊어진다는 견해[아라한의 사후(死後) 단견(斷見)] → 회의하고, 의심하고, 정법(正法)에 대해 의지하지 않음」의 순서로 아(我)를 전제한 관찰로부터의 벗어남을 단계적으로 설명합니다.


또한, 각각의 단계에 대해 행(行)이라고 말하며, 그 행(行)은 무명(無明)의 촉(觸)에서 생긴 경험된 것에 의해 닿아진 배우지 못한 범부에게 생겨난 애(愛)로부터 생긴 것이어서, 그 행(行)-애(愛)-수(受)-촉(觸)-무명(無明)도 무상(無常)하고 유위(有爲)이고 연기(緣起)된 것이라고 알고 보는 자에게 뒤따라 번뇌들이 부서진다고 설명합니다.


이때, 「색(色)→수(受)→상(想)→행(行)들→식(識)」의 순서로 아(我)를 전제한 관찰이 해소되고, 각각의 위에서 다시 구체적으로 ①→②→③의 순서로 내면의 상태가 해소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MN 1-근본 법문 경)을 응용한 해석입니다.


3. 용례③ ― 아(我)가 전제된 관찰을 해도 오온은 무너지고 그것으로 인해 불행과 고통을 겪음


(SN 22.93-강 경)은 아(我)가 전제된 관찰에 이어 (SN 22.59-무아상경)의 가르침을 직접 연결해 줍니다.


「아(我)로부터 오온을 관찰한다. ①오온을 가진 자로서의 아(我)를 관찰하거나, ②아(我)에서 오온을 관찰하거나, ③오온에서 아(我)를 관찰한다. → 오온은 무너짐 → 불행과 고통을 겪음 → 무아(無我)의 선언. ①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②이것은 내가 아니다, ③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 → 염오-이탐-해탈-해탈지견」


[Ⅲ] 기타 용례


①[배우지 못한 범부]와 ②[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의 용례는 아(我)를 전제한 관찰의 용례로 주로 나타나지만 몇 개의 경은 그 외의 용례를 보여줍니다. 


1. ①[배우지 못한 범부]와 ②[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가 함께 비교되는 경들


1) sabbāsavasuttaṃ (MN 2-모든 번뇌 경) ― “katame ca, bhikkhave, āsavā dassanā pahātabbā? 그러면 비구들이여, 무엇이 봄을 원인으로 버려져야 하는 번뇌들인가?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 고결한 법에서 훈련되지 못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작의(作意) 해야 하는 법들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작의(作意) 하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 작의(作意) 해야 하는 법들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작의(作意) 하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그는 작의 하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사고(思考)하고, 작의 해야 하는 법들을 사고하지 않는다.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고 … 고결한 법에서 훈련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작의(作意) 해야 하는 법들을 분명히 알고, 작의(作意) 하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분명히 안다. 작의(作意) 해야 하는 법들을 분명히 알고, 작의(作意) 하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분명히 아는 그는 작의 하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사고하지 않고, 작의 해야 하는 법들을 사고한다.


2) alagaddūpamasuttaṃ (MN 22-뱀의 비유 경) ― 여섯 가지 견해의 토대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 고결한 법에서 훈련되지 못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색(色)을 … 수(受)를 … 상(想)을 … 행(行)들을 … 본 것-들은 것-닿아 안 것-인식한 것-성취된 것-조사된 것-의(意)로 접근된 것도 …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아(我)다. 그 나는 죽음 뒤에도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일 것이다. 심지어 영원히 그렇게 서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의 토대에 대해서도 ‘이것은 나의 것이다. 이것은 나다. 이것은 나의 아(我)다.’라고 관찰한다.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고 … 고결한 법에서 훈련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색(色)을 … 수(受)를 … 상(想)을 … 행(行)들을 … 본 것-들은 것-닿아 안 것-인식한 것-성취된 것-조사된 것-의(意)로 접근된 것도 …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아(我)다. 그 나는 죽음 뒤에도 상(常)하고, 안정되고,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존재일 것이다. 심지어 영원히 그렇게 서 있을 것이다.’라는 견해의 토대에 대해서도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아(我)가 아니다.’라고 관찰한다. 이렇게 관찰하는 그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동요하지 않는다.


3) mahādhammasamādānasuttaṃ (MN 46-법의 획득의 큰 경) ― 실천과 따름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 고결한 법에서 훈련되지 못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실천해야 하는 법들을 알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알지 못한다. 따라야 하는 법들을 알지 못하고 따르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알지 못한다. → 알지 못하는 대로 실천하고 따름 → 원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은 늘어나고,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것들은 줄어든다.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고 … 고결한 법에서 훈련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실천해야 하는 법들을 알고,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안다. 따라야 하는 법들을 알고 따르지 않아야 하는 법들을 안다. → 아는 대로 실천하고 따름 → 원하지 않고 좋아하지 않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은 줄어들고, 원하고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것들은 늘어난다.


4) mahāmālukyasuttaṃ (MN 64-말루꺄 큰 경) ― 오하분결(五下分結)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 고결한 법에서 훈련되지 못한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유신견(有身見)-의심-계금취(戒禁取)-욕탐(慾貪)-진에(瞋恚)가 스며들고 유신견(有身見)-의심-계금취(戒禁取)-욕탐(慾貪)-진에(瞋恚)에 시달린 심(心)으로 머문다. 생겨난 유신견(有身見)-의심-계금취(戒禁取)-욕탐(慾貪)-진에(瞋恚)의 해방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에게 강해지고 제거되지 않은 그 유신견(有身見)-의심-계금취(戒禁取)-욕탐(慾貪)-진에(瞋恚)가 하분결(下分結)이다.


성스러운 사람을 만나고 … 고결한 법에서 훈련된 잘 배운 성스러운 제자는 유신견(有身見)-의심-계금취(戒禁取)-욕탐(慾貪)-진에(瞋恚)가 스며들지 않고 유신견(有身見)-의심-계금취(戒禁取)-욕탐(慾貪)-진에(瞋恚)에 시달리지 않는 심(心)으로 머문다. 생겨난 유신견(有身見)-의심-계금취(戒禁取)-욕탐(慾貪)-진에(瞋恚)의 해방을 있는 그대로 꿰뚫어 안다. 그에게 잠재성향과 함께 그 유신견(有身見)-의심-계금취(戒禁取)-욕탐(慾貪)-진에(瞋恚)는 버려진다.


2. ①[배우지 못한 범부]가 단독으로 나타나는 경들


• mūlapariyāyasuttaṃ (MN 1-근본 법문 경) ― 배우지 못한 범부(凡夫)의 삶 → 유학(有學) → 아라한 → 여래의 인식 구조


Comments

대원행 2023.10.08 22:04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1_09&wr_id=3 참조 (맛지마 니까야 관통 법회 ― 109. 보름달 큰 경[오취온-자기화 & 처=식+근]
대원행 01.05 21:51
http://www.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9_06&wr_id=127 참조 (나는 불교를 믿는다(240102) ― 제3장 가르침 - 핵심경전 - 5)무아상경[아(我)와 무아(無我)-비아(非我) & 무상의 가라앉음(깨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