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발견, 모든 것의 시작 ― 「takka(딱까)」
(2천 년 넘게 감춰져 있던 깨달음의 근본 자리)
(SN 6.1-범천의 요청 경) 등에서 부처님은 깨달음의 소회를 드러내는데, ‘내가 성취한 법은 딱까의 영역을 넘어선 것(atakkāvacaro)’이라고 말합니다.
vitakka(위딱까)는 vi-takka여서 takka에서 분리됨인데, 생각의 떠오름입니다. 그래서 생각 이전의 것이고, 영역을 가지는 것이 takka인 것을 알 수 있는데, 애(愛)의 형성 과정입니다. 특히, 마음이 몸을 떠날 수는 없지만,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작용하는 영역(*)이고, 몸과 함께하는 작용의 영역이 이성(理性)의 영역이라면 이성 이전에 작용하는 감성(感性)의 영역입니다.
(*) 물질의 영역 특히 뇌과학이나 인공지능 등 과학적 시도로써 접근할 수 없는 존재[유(有)-bhava] 고유의 특성을 제공하는 영역
분석적으로는 ①「상(想) → 심(心) → 견해」의 과정이면서 동시에 ②「번뇌[루(漏)] → 무명(無明) → 탐(貪)-진(嗔) → 소망 → 애(愛)」의 과정인데, 소망과 탐이 함께한 것이라는 애(愛)의 정의에 따르면, 「번뇌[루(漏)] → 무명(無明) → 애(愛)」입니다.
그래서 ‘딱까의 영역(takkāvacaro)’을 넘어서지 못한 중생(*)의 삶은
• 전도된 「상(想) → 심(心) → 견해」의 과정 ⇒ 「번뇌[루(漏)] → 무명(無明) → 애(愛)」
이고, 딱까의 영역을 넘어선(atakkāvacaro) 깨달은 자의 삶은
• 전도되지 않은 「상(想) → 심(心) → 견해」의 과정 ⇒ 「번뇌 없음[누진(漏盡)] → 명(明) → 애멸(愛滅)」
입니다. 이때, 애(愛)는 붙잡는 성질을 가지는데 ālaya(잡기-잡음)입니다. 그래서 애멸(愛滅)은 놓음(paṭinissagga) 또는 쉼(vossagga)으로 묘사됩니다.
(*) 무명(無明)에 덮이고 애(愛)에 묶여서 옮겨가고 윤회하는 중생(avijjānīvaraṇā sattā taṇhāsaṃyojanā sandhāvantā saṃsarantā)
그런데 상(想)은 행위의 재현을 위해 잠재하는 경향입니다. 태어날 때, 전생에서 찾아오는 식(識)을 맞이하는 명색(名色)에 담긴 몸의 경향으로 시작되고, 삶의 과정에서는 매 순간 행위의 결과로 잠재하는 경향이 더해지면서 행위의 재현을 이끕니다.
그래서 상(想)은 생겨나는 과정의 측면에서는 잠재성향(anusaya)이고, 쌓여있는 몸통으로는 상(想)인데, 재현을 위한 작용성의 측면으로는 루(漏-번뇌-āsava)입니다.
번뇌가 상(想)이라는 것은 (MN 121-공(空)의 작은 경)이 말해주는데,
입니다. ☞ http://sutta.kr/bbs/board.php?bo_table=nikaya05_13_01&wr_id=16
이제, 불교 안에서 중생의 삶의 모든 것은 takka 그리고 takka의 출발점에 있는 루(漏-번뇌-āsava)로부터 시작하고, 중생의 삶을 극복한 깨달은 자의 삶은 그 출발의 문제를 해소함 즉 누진(漏盡-번뇌의 부서짐-āsavakkhaya)에 의한 번뇌 없음(anāsava)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완성이 번뇌 다한 아라한입니다.
번뇌들이 부서졌기 때문에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뭅니다.
번뇌 다한 아라한 ― 번뇌가 다했고 삶을 완성했으며 해야 할 바를 했고 짐을 내려놓았으며 최고의 선(善)을 성취했고 존재의 족쇄를 완전히 부수었으며 바른 무위의 앎으로 해탈한 아라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