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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메커니즘

지(知)와 견(見) 초고 (220731)

 

()와 견() 초고 (220731)

 

[책의 앞 순서가 삶의 메커니즘임]


1. 지(知-앎)와 견(見-봄) 특히 견(見)은 무엇인가?


삶은 행위에서 시작되는 큰 순환 고리, 작은 순환 고리, 잠재 순환 고리라는 3개의 순환 구조를 통해 1차 인식과 2차 인식의 2단계 인식으로 연결되는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이때, 행위는 상(想)의 잠재(잠재 순환 고리)와 식(識)의 머묾(큰 순환 고리)을 초래하는데, 2단계의 인식에서 1차 인식의 주관[식(識)]과 2차 인식의 공동주관[상(想)]을 누적합니다. 또한, 행위의 중간인 의업(意業)을 구성하는 관심[욕(欲)-chanda]은 작은 순환 고리의 주체인데, 지금 삶에서 행위를 인식에 전달하는 1차 인식의 공동주관입니다. 


• 1차 인식 ― 누적된 주관[내입처(內入處)] + 지금 삶의 공동주관[관심]

• 2차 인식 ― 지금 삶의 주관[출산 된 식(識)] + 누적된 공동주관[상(想)]


인식에서 주관이 삶의 흐름을 주도한다면, 공동주관은 그 흐름 위에서 질적 측면을 담당합니다. 그래서 큰 순환 고리에 의해 누적된 식(識)[연기(緣起)된 식(識)]이 몸과 함께 육내입처(六內入處) 즉 1차 인식의 주관이 되어 삶의 흐름을 주도할 때[식(識)↔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작은 순환 고리의 관심은 공동주관으로 함께하여 생겨나는 식(識)의 질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겨난 식(識)이 주관이 되어 함께 생겨난 수(受)를 인식하는 2차 인식에서는 상(想)이 공동주관으로 함께하여 수(受)에 대한 앎의 질을 결정하는데, 무명(無明)과 탐(貪)-진(嗔)입니다. 


이때, 외입처(外入處)에 대한 앎을 몸통으로 하는 식(識)이 수(受)에 대한 앎인 무명(無明)과 탐(貪)-진(嗔)으로 몸집을 부풀린 상태를 앎[지(知)]이라고 하는데, 이것이 심(心)의 몸통입니다. 그래서 「심행(心行)=상(想)-수(受)」라고 설명됩니다.


• 심행(心行)=상(想)-수(受) ― saññā ca vedanā ca cittasaṅkhāro ― 상(想)도 수(受)도 심행(心行)이다 → 상(想)과 수(受)의 과정이 심(心)을 형성하는 작용 → 주관인 출산된 식(識)이 공동주관인 상(想)의 참여하에 수(受)를 인식하여 탐(貪)으로 몸통이 부풀려지면 심(心)이 됨


• poṭṭhapādasuttaṃ, sahetukasaññuppādanirodhakathā (DN 9.3-뽓타빠다 경, 상(想)은 원인과 함께 생기고 소멸함) ― “saññā nu kho, bhante, paṭhamaṃ uppajjati, pacchā ñāṇaṃ, udāhu ñāṇaṃ paṭhamaṃ uppajjati, pacchā saññā, udāhu saññā ca ñāṇañca apubbaṃ acarimaṃ uppajjantī”ti? “saññā kho, poṭṭhapāda, paṭhamaṃ uppajjati, pacchā ñāṇaṃ, saññuppādā ca pana ñāṇuppādo hoti. so evaṃ pajānāti — ‘idappaccayā kira me ñāṇaṃ udapādī’ti. iminā kho etaṃ, poṭṭhapāda, pariyāyena veditabbaṃ — yathā saññā paṭhamaṃ uppajjati, pacchā ñāṇaṃ, saññuppādā ca pana ñāṇuppādo hotī”ti.


“대덕이시여, 상(想)이 먼저 일어나고, 앎이 나중에 생깁니까, 아니면 앎이 먼저 생기고 나중에 상(想)이 일어납니까, 아니면 상이 일어나고 앎이 생기는 데 선후가 없습니까?” “뽓타빠다여, 상(想)이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앎이 생긴다. 또한, 상(想)이 일어날 때 앎이 생긴다. 그는 ‘참으로 이것을 조건으로 나에게 앎이 생긴다.’라고 꿰뚫어 안다. ‘상(想)이 먼저 일어나고 나중에 앎이 생긴다. 또한, 상(想)이 일어날 때 앎이 생긴다.’라는 방식으로, 뽓타빠다여,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지(知)는 1차 인식의 영역에서는 식(識)이고, 2차 인식의 영역에서는 심(心)입니다.


이런 이해 위에서 인식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불교(佛敎)의 수행기법이 「사념처(四念處) → 사마타-위빳사나」(사념처로 시작하여 사마타-위빳사나로 완성되는 수행체계)로 제시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인데, 사념처(四念處)는 신(身)-수(受)-심(心)-법(法)을 대상으로 사띠를 확립하여 다섯 가지 장애를 밀어내는 것이고, 장애가 밀려난 자리에 충만 되는 칠각지를 닦아 번뇌를 부수고 깨닫는 과정은 사마타-위빳사나입니다. <수행의 중심 개념>


이때, 사념처(四念處)는 「kāye kāyānupassī 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loke abhijjhādomanassaṃ 몸을 이어보면서 몸에 머문다. 알아차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옳음의 유지-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세상에서 간탐(慳貪)과 고뇌(苦惱)를 제어한다.(신-수-심-법에 반복)」인데, 신념처에 속하는 호흡 수행의 경우, ‘몸에 머문다’는 신(身)[신식(身識)+신근(身根)]과 촉(觸)의 인식 작용을 말하고, ‘몸을 이어보면서’는 관심이 작은 순환 고리에 의한 공동주관으로 참여하여 몸 즉 호흡을 떠나지 않고 인식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이해는 (SN 35.232-꼿티까 경)을 참고해야 하는데, 「na kho, āvuso koṭṭhika, cakkhu rūpānaṃ saṃyojanaṃ, na rūpā cakkhussa saṃyojanaṃ. yañca tattha tadubhayaṃ paṭicca uppajjati chandarāgo taṃ tattha saṃyojanaṃ 도반 꼿티까여, 안(眼)이 색(色)들에게 족쇄가 아니고, 색(色)들이 안(眼)에게 족쇄가 아닙니다. 이 둘을 연(緣)하여 생기는 욕탐(欲貪)이 거기서 족쇄입니다.」라는 설명입니다. 욕탐(欲貪chandarāga) 즉 탐(貪)을 싣고 온 관심이 색(色)들 가운데 어떤 색(色)을 안(眼)에 묶어주면 이렇게 묶인 색(色)을 안(眼)이 인식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1차 인식의 구조입니다. 또한, 탐(貪)을 싣지 않고 온 관심과 더 나아가 무명(無明)의 영향에서 벗어난 관심은 안(眼)과 색(色)을 연결하기는 하지만 묶지는 않게 되는데, 이것이 인식의 향상이 완성된 것으로의 해탈된 삶입니다.


그래서 ‘몸을 이어보면서’는 관심이 호흡 즉 촉(觸)을 신(身)에 묶은 상태의 지속을 의미하고, 그렇게 묶인 촉(觸)을 인식하는 작용[작의(作意)]의 진행을 ‘몸에 머문다’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관심 즉 생각하는 행위[의업(意業)]에 속한 과정의 참여를 ‘본다(passati)’라고 말하는 것인데, 알고 봄[지(知)-견(見)]의 봄[견(見)]이 의업(意業) 즉 생각-사유를 지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각하고 사유하는 것이 세상을 보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2. takka의 안과 밖


한편, 삶은 인식과 행위로의 구분 외에 takka의 안팎으로 구분하여 말할 수도 있습니다. 


2차 인식의 영역 즉 takka의 안은 수(受)를 대상으로 상(想)이 공동주관으로 참여하면서 시작됩니다. 이때,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부정(不淨)의 사실의 상(想)과 상(常)-락(樂)-아(我)-정(淨)의 거짓 즉 전도된 상(想)의 차이가 있는데, 중생의 삶은 전도된 상(想)이 참여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상(想)의 참여는 「상(想) → 심(心) → 견해」로 이어지는데(AN 4.49-전도(顚倒) 경), 「경향 → 앎 → 봄」으로 이어지는 사실의 영역입니다.


반면에 takka의 밖은 vitakka[심(尋)]와 vicāra[사(伺)]로 출발하는 행위 그리고 관심에 의한 순환[묶음]으로 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가 대응하는 현상의 영역입니다.


이렇게 지(知)와 견(見)은 takka의 안팎에서 사실과 현상의 영역의 차이를 담아 다르게 설명되는데,


• takka 안의 지와 견은 수(受)를 대상으로 하는 심(心)과 견해이고[사실의 영역],

• takka 밖의 지와 견은 외입처(外入處)를 대상으로 하는 식(識)과 의업(意業)[현상의 영역]


입니다.


그런데 takka의 밖은 마음이 몸과 함께 인식하고 행위 하는 영역이고[의(意-mano)], 안은 몸의 참여 없이 마음 혼자 인식하고 행위 하는 영역[식(識-viññāṇa)-심(心-citta)]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몸의 제약이 현상적인 삶을 초래하고, 몸의 제약이 없는 영역에서 사실은 전도되기도 하고 전도가 해소되기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지와 견의 향상 ― 삶의 메커니즘에서 수행지도로 이어지는 매개 역할


이렇게 삶이 지(知)와 견(見)의 관점에서 설명되면, 깨달아 윤회에서 벗어남으로 완성되는 삶의 향상도 지(知)와 견(見)의 관점에서 접근하게 됩니다. 1차적으로 takka 밖의 현상의 영역에서 지(知)와 견(見)을 제어하고, 그 토대 위에서 2차적으로 takka 안의 사실의 영역에서 지(知)와 견(見)을 제어함으로 완성되는데, 1차적 제어의 완성은 여실지견(如實知見)이고, 2차적 제어의 완성은 인간을 넘어선 법인 성자에게 어울리는 차별적 지(知)와 견(見)입니다.


이런 제어의 과정을 삼매수행(samādhibhāvanā)이라고 하는데, (AN 4.41-삼매수행(三昧修行) 경)은 ①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으로 이끄는 삼매수행, ②지(知)와 견(見)의 얻음으로 이끄는 삼매수행, ③염(念)-정지(正知)로 이끄는 삼매수행, ④번뇌들의 부서짐으로 이끄는 삼매수행의 네 단계로 설명합니다. 또한, 이렇게 깨달음으로 이끄는 삼매수행을 바른 삼매[정정(正定)]이라고 하는데, 일곱 가지 필수품을 갖춘 것(AN 7.45-삼매의 필수품 경)이어서 팔정도(八正道)라는 중도(中道) 곧 고멸도(苦滅道)를 설명합니다.


• 삼매수행(三昧修行)에 의한 깨달음의 과정 = 수행지도(修行地圖) ― 필수품의 과정 → 바른 삼매 → 사선(四禪)=의업(意業)[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으로 이끄는 삼매수행 – 심(心)의 일어남] →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지와 견으로 이끄는 삼매수행 – 법의 드러남] → 법의 위빳사나[염-정지로 이끄는 삼매수행 – 무상(無常)의 관찰] → ①여실지견(如實知見) = 안과 밖의 연결 = abhiññā(실다운 지혜)/abhijānāti(실답게 알다) → 사마타-위빳사나[안 ― 염오-이탐-소멸] → ②차별적 지와 견 = pariññā(완전한 지혜)/parijānāti(실답게 알다)


• 여실지견 ― 현상의 영역[대상 = 육외입처]에서 사실 아닌 지와 견의 문제 해소

• 차별적 지와 견 ― 사실의 영역[대상 = 수(受)]에서 사실 아닌 지와 견의 문제 해소


한편, (SN 22.39-일치하는 법 경)은 「오온의 염오 → 완전한 앎 → 오온에서 해탈 → 고(苦)에서 해탈」의 과정을 설명하는데, 기뻐하고 드러내고 묶여 머물면 소망이 생겨 애(愛)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아 기뻐하지 않고 드러내지 않고 묶여 머물지 않아서[염오(厭惡) → 이탐(離貪) → 소멸(消滅)] 완전한 앎이 생겨나면 그것이 오온으로부터의 해탈이고 그것이 곧 고(苦)로부터의 해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수행은 봄에 의해서 더 높은 앎이 생기는 것을 설명하는데, ①여실지견(如實知見)과 ②차별적 지와 견에 의해 단계적으로 완성됩니다.


• 여실지견(如實知見) ― 지금여기의 행복한 머묾으로 이끄는 삼매를 성취하여 머무는 가운데 심(心)이 일어나고, 지와 견으로 이끄는 삼매수행 즉 내적인 심(心)의 사마타의 과정에서 안으로 2차적인 대상 즉 법이 드러나면, 법의 위빳사나 즉 생겨나고 유지되고 없어지는 현상을 직접 봄으로써 무상(無常)을 확인하는 것 


• 차별적 지(知)와 견(見) ― 여실지견의 토대 위에서 takka 안의 영역을 제어하여 번뇌의 부서짐[누진(漏盡)] 즉 상(想)의 전도를 해소하는 과정인데, 오온(五蘊)의 자라남-무너짐 즉 오온(五蘊)을 대상으로 고(苦)가 자라나고 소멸하는 과정을 연기적 관점으로 직접 보아서 오온(五蘊)의 실상을 완전히 아는 것 


그렇다면 일상의 삶은 아는 대로 보고[경향(想)→ 앎(心)→ 봄(견해-사유) → 앎(識) → 경험(受) → 봄(取)], 수행에 의한 향상과정은 봄의 제어에 의한 앎의 향상으로 완성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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