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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재] 4. 이외에 인식에서 주목할 점 1)~3)

1 60 2023.12.17 21:05

[교재]


4. 이외에 인식에서 주목할 점


1) 식(識-viññāṇa)과 앎[지(知)-ñāṇa] ― 「식(識) =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


ñāṇa(냐-나)는 말 그대로 앎이고, 접두사 vi-가 붙은 viññāṇa(윈냐-나)는 ñāṇa를 몸통으로 하는 마음입니다. viññāṇa는 ‘vijānātīti tasmā ‘viññāṇan’ti vuccati 분별해서 안다고 해서 식(識)이라고 불린다.’라고 정의되는데, jānāti(알다)-vijānāti(분별해서 알다)의 결과인 ‘앎(ñāṇa)’과 ‘아는 역할을 하는 자(viññāṇa)’로 구별됩니다. 또한, ‘안(眼)과 색(色)들을 연(緣)하여 안식(眼識)이 있다.’라는 서술과 연결하면, 안식(眼識)이 앎으로 생겨나지만 단지 앎이 아니라 아는 역할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식(識-viññāṇa)는 앎[지(知)-ñāṇa]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입니다.


2) 「식(識)+근(根) = 처(處)」여서 내입처(內入處)에도 식(識)이 있고, 인식을 통해 생겨나는 외입처(外入處)에 대한 앎도 식(識)이라면, 이 두 가지 식(識)은 어떤 차이를 가집니까? ― 「누적된 것인 식온(識蘊)과 지금 삶의 식(識)」


(SN 35.146-업(業)의 소멸 경)은 내입처를 ‘purāṇakammaṃ abhisaṅkhataṃ abhisañcetayitaṃ vedaniyaṃ 이전의 업(業)이고 형성된 것, 의도된 것, 경험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SN 12.37-그대들의 것이 아님 경)은 몸도 ‘이전의 업(業)이고 형성된 것, 의도된 것, 경험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지난 삶의 과정을 통해 형성되고 쌓여있는 무더기[온(蘊)]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내입처를 구성하는 식(識)은 식온(識蘊)입니다. 반면에 안(眼)과 색(色)들을 연(緣)하여 생기는 식(識)은 지금 진행되는 삶에서 지금의 인식 대상인 외입처의 앎으로의 식(識)입니다. 지난 삶의 누적인 식온(識蘊)이 몸과 함께 처(處)가 되어 새로운 식(識)을 출산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출산 된 식(識) 또한 인식하는 자입니다.


이때, 식온(識蘊)은 몸과 함께 외입처를 인식하는 작용을 하는데, 출산 된 식(識)은 무엇을 인식하는지도 중요한 관점입니다. (MN 43-교리문답의 큰 경)은 ‘sukhantipi vijānāti, dukkhantipi vijānāti, adukkhamasukhantipi vijānāti 락(樂)이라고도 분별해 알고, 고(苦)라고도 분별해 알고, 불고불락(不苦不樂)이라고도 분별해 안다.’라고 해서 수(受)를 인식한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특히, 몸과 함께하는 처(處)로서의 역할과 다르게  근(根) 즉 몸과 함께하지 않고 식(識) 혼자서 작용한다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3)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 ― 「내입처-외입처-식의 만남」


전술한 대로 인식은 “안(眼)과 색(色)들을 연(緣)하여 안식(眼識)이 생긴다. 셋의 만남이 촉(觸)이다. 촉(觸)을 조건으로 수(受)가 있다.”라고 설명됩니다. 그런데 촉(觸)은 한역(漢譯)으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육외입처(六外入處)를 구성하는 촉(觸-phoṭṭhabba)과 셋의 만남으로의 촉(觸-phassa)입니다. 간혹 촉(觸-phoṭṭhabba)과 촉(觸-phassa)을 구분하지 않고 해석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때, 촉(觸-phassa)에도 주목해야 하는 점이 있는데, 어떤 셋의 만남인가 하는 점입니다. 보통은 근(根)-경(境)-식(識)의 삼사(三事)가 만나는 것을 촉(觸)으로 설명하지만, 니까야는 내입처(內入處)-외입처(外入處)-식(識) 삼사의 만남으로 정의합니다. 이런 차이는 내입처가 식(識)과 근(根)이 함께한 인식 주관이라는 이해에 미치지 못한 탓이라고 해야 하는데, 이런 차이는 경의 의도를 전혀 다르게 왜곡합니다.


한편, 촉(觸)은 촉처(觸處-phassāyatana)[육촉처(六觸處)-channaṃ phassāyatanā]로도 나타나는데, 내입처-외입처가 식(識)을 생겨나게 하는 토대이듯이, 촉(觸)은 수(受)를 생겨나게 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 「모든 법은 수(受)로 합류한다.(AN 8.83-뿌리 경)」


※ 그렇다고 촉(觸) 자체가 촉처(觸處)인 것은 아닙니다. 촉(觸)은 셋이 만나는 현상이고, 촉처(觸處)는 그 셋이 만나는 자리라는 별개의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다만, 촉(觸)을 조건으로 수(受)가 생기기 때문에 촉처(觸處)를 수(受)가 생겨나기 위한 토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 「‘channaṃtveva, āvuso, phassāyatanānaṃ asesavirāganirodhā phassanirodho; phassanirodhā vedanānirodho ~ 육촉처(六觸處)가 남김없이 바래어 소멸할 때, 도반이여, 촉(觸)이 소멸하고, 촉(觸)이 소멸할 때 수(受)가 소멸하고 ~」(SN 12.24-외도 경) 


이렇게 수(受)를 생겨나게 하는 토대로서의 촉(觸)이 설명되기 위해서는 만나는 세 가지가 근(根)-경(經)-식(識)이 아니라 내입처(內入處)-외입처(外入處)-식(識)이라는 정의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 정의를 놓치면 부처님이 설명하는 삶에 어긋나게 되고, 바르게 삶의 문제를 해소할 수 없습니다.


또한, 촉(觸)의 자라남과 줄어듦도 중요한 관점인데, 공동주관으로 참여하는 욕탐(欲貪)의 제어 여부에 따르는 고(苦)의 방향성과 고멸(苦滅)의 방향성의 차이입니다. 촉(觸)과 수(受)-상(想)-사(思)의 관계도 이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촉(觸)에서 수-상-사가 함께 생기는 것[촉구생수상사(觸俱生受想思)]이 아니라 촉의 자라남이 수-상-사의 자라남을 이끌고 촉의 줄어듦이 수-상-사의 줄어듦을 이끈다는 이해입니다.


※자라남-줄어듦 → 오온(五蘊)의 자라남-줄어듦 참조(SN 22.5-삼매 경)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3&wr_id=271참조

Comments

아빈뇨 2023.12.29 17:59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