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 > 사회참여/외부특강 > 불교상담

불교상담

[지식iN] 불교에 살생 & 세균도 죽이면 살생인가요?

[질문] 불교에 살생 & 세균도 죽이면 살생인가요?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3&docId=361550204&page=1#answer3

 

 

[세균도 죽이면 살생인가요?]의 질문에 대해 적었는데 마감되어서 올리지 못한 글입니다. 이 질문에 적절할 것 같아서 올려드리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살생(殺生)으로 번역된 빠알리 원어는 pāṇātipāta인데, pāṇa-atipāta입니다. 이때, pāṇalife; breath; a living being. (m.)이어서 생명이라고 번역되었고, atipātaattack; slaying; killing. (m.)이어서 공격[해침]-죽임이어서 해치거나 죽이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pāṇātipāta는 생명을 해침 또는 죽임인데, 살생(殺生)으로 한역(漢譯)되었습니다.

 

불교에서 이 용어는 십업(十業)[십악업(十惡業)-십선업(十善業)]과 오계(五戒) 등 계목(戒目)의 설명에서 첫머리에 주로 나타납니다. [살생(殺生)] idha, gahapatayo, ekacco pāṇātipātī hoti, luddo lohitapāṇi hatappahate niviṭṭho adayāpanno pāṇabhūtesu. 장자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생명을 해치는 자입니다. 난폭하고, 손에 피를 묻히고, 해침과 죽임에 대해 열심이고, 생명들에 대해 연민하지 않습니다. ~ [불살생(不殺生)] idha, gahapatayo, ekacco pāṇātipātaṃ pahāya pāṇātipātā paṭivirato hoti, nihitadaṇḍo nihitasattho lajjī dayāpanno sabbapāṇabhūtahitānukampī viharati. 장자들이여, 여기 어떤 사람은 생명을 해치는 행위를 버렸기 때문에 생명을 해치는 행위로부터 피한 자입니다. 몽둥이를 내려놓았고, 칼을 내려놓았고, 겸손하고, 연민하고, 모든 생명에게 우정과 동정으로 머뭅니다.

 

이렇게 살()로 번역된 atipāta는 공격[해침]-죽임의 뜻이어서 이해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생()으로 번역된 pāṇa가 어떤 범위에 속하는 생명을 지시하는지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을 살아있는 모든 것으로 이해하면 식물도, 또는 질문자의 질문처럼 세균까지도 포함한다고 해야 할 것인데, 그런 경우에는 인간의 삶이 유지될 수 없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해석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한 답은 두 가지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후대의 이론서인 청정도론(淸淨道論)의 설명이고, 하나는 앙굿따라 니까야의 설명입니다.

 

청정도론은 pāṇanatāya pāṇā, assāsapassāsāyattavuttitāyāti attho. ‘생명은 숨을 쉬기 때문이고, 들숨과 날숨에 의존하여 생활을 하는 것을 뜻한다.(Vism 1, 9. brahmavihāraniddeso, mettābhāvanākathā, para. 151 / 한국빠알리성전협회 번역)라고 설명하는데, 들숨-날숨의 호흡의 영역이 어디까지인지는 생물 과목의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앙굿따라 니까야는 “imāni cattāri ariyasaccānīti, bhikkhave, mayā dhammo desito aniggahito asaṃkiliṭṭho anupavajjo appaṭikuṭṭho samaṇehi brāhmaṇehi viññūhīti. iti kho panetaṃ vuttaṃ. kiñcetaṃ paṭicca vuttaṃ? channaṃ, bhikkhave, dhātūnaṃ upādāya gabbhassāvakkanti hoti; okkantiyā sati nāmarūpaṃ, nāmarūpapaccayā saḷāyatanaṃ, saḷāyatanapaccayā phasso, phassapaccayā vedanā. vediyamānassa kho panāhaṃ, bhikkhave, idaṃ dukkhanti paññapemi, ayaṃ dukkhasamudayoti paññapemi, ayaṃ dukkhanirodhoti paññapemi, ayaṃ dukkhanirodhagāminī paṭipadāti paññapemi. ‘비구들이여, ‘이런 사성제(四聖諦)가 있다.’라고 나에 의해 설해진 법은 현명한 사문-바라문들에 의해 질책받지 않고 더럽혀지지 않고 비난받지 않고 책망받지 않는다.’라고 이렇게 이것을 말했다. 무엇을 연()하여 이것을 말했는가? 비구들이여, 육계(六界)의 붙잡음을 원인으로 모태에 듦이 있다. 듦이 있을 때 명색(名色)이 있다. 명색(名色)의 조건으로부터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六入)의 조건으로부터 촉()이 있고, ()의 조건으로부터 수()가 있다. 비구들이여, 나는 경험하고 있는 자에게 이것은 고().’라고 선언하고, ‘이것은 고집(苦集)이다.’라고 선언하고, ‘이것은 고멸(苦滅)이다.’라고 선언하고, ‘이것은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다.’라고 선언한다.(AN 3.62-근본 교리 등 경)라고 말합니다. 사성제로써 설명되는 윤회하는 중생의 삶의 영역[()와 고멸(苦滅)]을 말하는데, 여기서 경험하고 있는 자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자입니다. 이때,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영역이 어디까지인지는 역시 생물 과목의 도움이 필요할 것입니다.

 

특히, 이 질문에 대해서는 단세포생물도 아픔을 느낄까요?’라는 문답을 참고할 수 있는데,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6&docId=101137396&qb=64uo7IS47Y+s7IOd66y864+EIOyVhO2UlOydhCDripDrgoTquYzsmpQ=&enc=utf8&section=kin&rank=1&search_sort=0&spq=0입니다.

 

이 문답은 아픔을 느끼기 위해서는 신경계가 있어야 합니다. 신경계는 강장동물부터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강장동물보다 하등한 해면동물이나 단세포 생물인 세균이나 식물성플랑크톤 및 식물 등은 신경계가 없기 때문에 아픔을 느낄 수 없습니다.라고 생물 과목의 입장에서 답을 줍니다.

 

그렇다면 청정도론의 설명보다는 앙굿따라 니까야의 설명이 더 폭넓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설명이 불교에서 살생(殺生)의 영역으로 이해되어야 하겠습니다.

 

생물 과목에 대한 지식이 짧아 연결된 문답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질문자의 질문으로 한정해서는 직접적인 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세균은 신경계가 없어서 아픔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사성제로써 설명되는 윤회하는 중생의 삶의 영역[()와 고멸(苦滅)]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균을 죽이는 것은 살생의 업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대답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주제는 어렵고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한 주제입니다. 개략의 접근만 해 본 것이니 그 정도로만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