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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iN] 전생과 윤회를 믿는 사람 근거를 알고 싶어요

[질문] 전생과 윤회를 믿는 사람 근거를 알고 싶어요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3&dirId=316&docId=346474096&page=1#answer4

 

 

저도 전생과 윤회를 믿는 사람입니다. 제가 믿는 근거를 설명할 텐데, 공감 여부는 질문자의 몫일 것 같네요.


저는 불교 신자입니다. 부처님 가르침을 사실-진리라고 믿어서, 배워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윤회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죽은 뒤에 다시 태어나는지의 문제이기 때문에 죽어보지 않고는 누구도 죽은 뒤에 삶이 계속 이어지는지를 확인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물론, 같은 이유로 죽은 뒤에 삶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윤회는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확인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깨달음이라는 특별한 경지에서 보아낸 삶을 설명합니다. 연기(緣起)라고 부르는 불교 교리인데 구체적으로는 십이연기(十二緣起) 즉 삶을 설명하는 열두 과정입니다.


십이연기는 내가 세상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몸과 함께 함께 세상을 만나는 과정의 어디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괴로움이 생겨나는지를 설명하는 교리인데, 열두 단계에 걸친 100% 조건 관계입니다. ㅡ 「무명(無明) → 행(行) → 식(識) → 명색(名色) → 육입(六入) → 촉(觸) → 수(受) → 애(愛) → 취(取) → 유(有) → 생(生) → 노사(老死)」


이런 열두 단계의 조건 관계는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①식(識)~유(有), ②무명(無明)~행(行), ③생(生)~노사(老死)입니다. 이때, 식(識)~유(有)의 부분은 매 순간의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한 상태로의 새로운 존재[유(有)]가 다음 순간의 삶의 주체[식(識)-명색(名色)의 서로 조건 됨]가 되어 지금을 사는 순환 구조로 설명되는데, 이런 방법으로 나는 매 순간의 삶의 결과를 쌓으며 변화하는 가운데 지금 세상을 만나는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은 존재들에게서 질적인 차별[삶의 질]을 가집니다. 그 질적 차별을 초래하는 부분이 무명(無明)-행(行)인데, 삶의 과정 특히 행위를 통해 잠재하는 경향[상(想)]의 차이 때문입니다. 경향[상(想)]은 중생에게서 병들어 있는데, 번뇌[루(漏)]라고 불립니다. 번뇌는 탐(貪)-진(嗔)-치(癡)의 조건이 되는데, 이것이 각각의 존재에게 삶의 질적 차별을 유발하게 됩니다. 그래서 무명(無明)~유(有)의 열 단계는 매 순간을 누적하며 변화하여 다음 순간의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는 순환 구조 위에서의 존재들에게 적용되는 삶의 질적 차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識)과 명색(名色)은 서로 조건 됩니다. 따로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늘 함께하여 하나의 존재 상태를 구성하는데, 오취온(五取蘊)[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 오온(五蘊)의 집착 상태]인 나입니다. 이때, 식(識)은 마음이고 명색(名色)의 색(色)은 몸입니다. 그래서 이 관계는 몸과 마음의 서로 조건 됨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는데, 몸과 마음에게는 생존 기간의 불균형이라는 특성이 있습니다. 백 년 안팎을 사는 몸에 비해 마음은 윤회에서 벗어날 때까지 죽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중생이라고 부르는 번뇌의 영향 위[유위(有爲)]에서 살아가는 존재들의 차별적인 삶의 과정을 무명(無明)~유(有)의 순환 구조로 나타내는 이 설명은, 말하자면, 백 년 안팎의 몸의 생존 기간 안에서 설명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몸의 생존 기간이 끝나면 몸 없이 존재할 수 없는 마음은 새로운 몸을 만나야 하는데, 태어남[생(生)]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몸과 함께 새로운 존재 상태로 태어나면 다시 무명(無明)~유(有)의 순환 구조를 반복하게 되는데, 깨달음을 통해 윤회에서 벗어날 때까지 이어집니다.


경은 무명(無明)과 애(愛)[갈애]가 남아 있으면 죽은 뒤에 몸으로 가고, 남아 있지 않으면 몸으로 가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다시 태어남의 여부입니다. ㅡ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어리석은 자에게 이 몸이 일어난다. 그 어리석은 자에게 무명은 버려지지 않고 갈애는 부수어지지 않는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어리석은 자는 괴로움의 부서짐을 위해 바르게 범행을 닦지 않는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몸이 무너진 뒤 몸을 받게 된다[몸으로 가게 된다]. 몸을 받아 있은 그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무명에 덮이고 갈애에 묶인 현명한 자에게 이 몸이 일어난다. 그 현명한 자에게 무명은 버려지고 갈애는 부서진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현명한 자는 괴로움의 부서짐을 위해 바르게 범행을 닦는다. 그래서 현명한 자는 몸이 무너진 뒤 몸을 받지 않게 된다[몸으로 가지 않게 된다]. 몸을 받지 않은 그는 태어남과 늙음-죽음과 슬픔-비탄-고통-고뇌-절망에서 벗어나고, 괴로움에서 벗어난다고 나는 말한다. 비구들이여, 범행의 실천, 어리석은 자에 비해 현명한 자에게 이것이 차이이고, 이것이 특별함이고, 이것이 다름이다.」(SN 12.19-우현(愚賢) 경)


부처님의 가르침 즉 연기(緣起)는 이렇게 중생들의 삶을 설명합니다.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몸으로 가서 다시 중생의 삶을 반복하는 구조인데, 이런 구조를 윤회(輪迴)라고 부릅니다. 특히,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식(識)이 중심이 되는 윤회여서 「연기(緣起)된 식(識)의 윤회(輪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윤회에 대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에 대한 공감과 동의 위에서 신뢰를 가지고 뒤따르면 불교 신자라고 불립니다. 


저는 부처님에 의해 설해진 이런 가르침에 공감과 동의 그리고 신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을 뒤따라 실천하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에 불교 신자입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윤회가 있습니다. 그것도 「연기(緣起)된 식(識)의 윤회(輪迴)」입니다. 이렇게 인류 역사상 최고의 깨달음을 성취한 부처님이란 스승에 의해 설명된 삶의 이야기가 저에게는 윤회를 믿는 최선의 근거입니다. 많은 공부가 필요한 어려운 주제입니다마는 삶에 대한 진지함으로 접근할 때 삶의 문제는 해소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공부에 시간을 투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질문자께서도 확실한 근거 위에서 윤회를 믿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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