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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상담

[지식iN] 석가모니는 모든 현상이 서로 의존하여 생겨나며 일시적이라고 하였는데 ㄹ이 왜 틀리나요.....??

[질문] 석가모니는 모든 현상이 서로 의존하여 생겨나며 일시적이라고 하였는데 ㄹ이 왜 틀리나요.....??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3&docId=363612264&page=1#answer5

 

 

이런 문제도 출제되는군요? 일단 이 내용을 좀 더 확장해서 인용하면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실천하지 않아야 하는 이런 두 끝이 있다. 무엇이 둘인가? 소유의 삶에서 소유의 즐거움에 묶인 이런 실천은 저열하고 천박하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다. 스스로를 지치게 하는 이런 실천은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가져오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런 양 끝을 가까이 하지 않은 뒤에 여래에 의해 깨달아진 것인 중도(中道)는 안()을 만드는 것이고 지()를 만드는 것이고,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끈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무엇이 안()을 만드는 것이고 지()를 만드는 것이고,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여래에 의해 깨달아진 것인 중도(中道)인가? 오직 이 여덟 요소로 구성된 성스러운 길[팔정도(八正道)]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안()을 만드는 것이고 지()를 만드는 것이고, 가라앉음으로 실다운 지혜로 깨달음으로 열반으로 이끄는, 여래에 의해 깨달아진 것인 중도(中道)이다.(SN 56.11-전법륜(轉法輪) )입니다.

 

이때, 중도(中道)majjhimā paṭipadā인데, 중도(中道)라고 한역(漢譯) 되었지만 교리적 의미는 고멸(苦滅)로 이끄는 실천이고, 바른 견해[정견(正見)] ~ 바른 삼매[정정(正定)]팔정도(八正道)의 실천입니다.

 

불교는 윤회에서 벗어남 즉 불사(不死)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가르침이므로 <보기> 가운데 ㄷ.은 일단 틀립니다. 표현은 좀 애매하지만, .자비(慈悲)의 실천이고, .무아(無我)의 깨달음, .무상(無常)의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자비(慈悲)는 자비희사(慈悲喜捨) 사무량심(四無量心)의 앞의 두 항목인데, 사무량심은 부처님의 깨달음을 대표하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DN 19-마하고윈다 경) 등 부처님의 전생을 설명하는 경들에 의하면, 사무량심은 부처님의 전생 즉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했던 시절에 제자들을 높은 하늘로 이끌던 수행입니다. 반면에 깨달아 부처가 된 지금은 열반(涅槃)으로 직접 이끄는 팔정도를 설하는데, 무상(無常)-()-무아(無我)의 삼법인(三法印)에 부합한 삶의 실현입니다.

 

(AN 3.137-출현 경)비구들이여, ‘모든 조건적인 것[()]들은 무상(無常)하다[제행무상(諸行無常-sabbe saṅkhārā aniccā)].’라는 것은 여래들의 출현이나 출현하지 않음을 원인으로 움직이지 않는 원리이고, 법으로 확립된 사실이고, 법으로 제한된 것이다. 여래는 이것을 깨닫고 실현하였다. 깨닫고 실현한 뒤 모든 조건적인 것들은 무상(無常)하다[제행무상(諸行無常)].’라고 공표하고, 전달하고, 선언하고, 시작하고, 드러내고, 분석하고, 해설한다.라고 하는데, ‘모든 조건적인 것들은 고()[제행개고(諸行皆苦-sabbe saṅkhārā dukkhā)]’모든 있는 것[()]들은 무아(無我)[제법무아(諸法無我-sabbe dhammā anattā)].’에 반복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주제로 설해진 (SN 56.11-전법륜(轉法輪) )을 인용한 이 문제는 사무량심(四無量心)에 속한 자비의 실천을 말하는 ㄱ.보다는 삼법인(三法印)에 속한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를 말하는 ㄴ.과 ㄹ. 가 정답이어야 하겠습니다.

 

물론, 출제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의 저의 해석이니 그렇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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