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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iN] 황인숙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에 불교적 윤회사상이 드러나나요?

[질문] 황인숙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에 불교적 윤회사상이 드러나나요?

https://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0401&docId=364301245&page=1#answer2

 

 

양면성을 가진 질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우선, ‘태어나리라라는 의지는 그런 실천에 의해 그런 태어남으로 이끈다는 점에서는 불교적 윤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MN 120-()에 의한 태어남 경)에서는 여기, 비구들이여, 믿음을 갖추고, ()를 갖추고, 배움을 갖추고, 보시(報施)를 갖추고, 지혜를 갖춘 비구가 있다. 그는 ! 나는 몸이 무너져 죽은 뒤에 큰 부자인 끄샤뜨리야들의 일원으로 태어나야겠다!’라고 생각한다. 그는 그 심()을 북돋우고, 그 심()을 확고히 하고, 그 심()을 닦는다. 그에게 이렇게 닦고 이렇게 많이 행한 그 행()들과 머묾들은 거기에 태어남으로 이끈다. 비구들이여, 이런 길, 이런 실천이 거기에 태어남으로 이끈다.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에 태어남으로 이끈다. 번뇌들의 부서짐으로부터 번뇌가 없는 심해탈(心解脫)과 혜해탈(慧解脫)을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실답게 안 뒤에 실현하고 성취하여 머문다. 비구들이여, 이 비구는 어디에도 태어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데, ‘태어나리라라는 의지가 바로 이런 길, 이런 실천을 유발하여 태어남을 이끈다는 한 측면이라고 하겠습니다.

 

반면에, (MN 57-개의 습성 경)나는 이런 계()나 의무나 고행이나 범행으로 신()이나 어떤 신()이 될 것이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오랫동안 개의 습성을 온전하게 실천한 나체 수행자 세니야에게 부처님은 어떤 사람이 완전하게 중단 없이 소의 습성을 닦고, 완전하게 중단 없이 소의 계행(戒行)을 닦고, 완전하게 중단 없이 소의 심()을 닦고, 완전하게 중단 없이 소의 처신을 닦습니다. 그는 완전하게 중단 없이 소의 습성을 닦고, 완전하게 중단 없이 소의 계행(戒行)을 닦고, 완전하게 중단 없이 소의 심()을 닦고, 완전하게 중단 없이 소의 처신을 닦았기 때문에 몸이 무너져 죽은 뒤 소들의 일원으로 태어납니다. 만약 그가 나는 이런 계()나 의무나 고행이나 범행으로 신()이나 어떤 신()이 될 것이다.’라는 견해를 가지면, 그것은 삿된 견해입니다. 세니야여, 삿된 견해를 가진 자에게 지옥이나 축생의 두 군데 갈 곳가운데 어떤 갈 곳을 나는 말합니다. 이렇게, 세니야여, 소의 습성이 성취되면 소들의 일원으로 이끌리고, 성취되지 않으면 지옥으로 이끌립니다.라고 대답하는데, 오랫동안 개의 습성을 온전하게 실천한 꼴리야의 후손인 뿐나에게도 동일하게 반복됩니다.

 

불교의 윤회는 분명히 태어나리라라는 의지에 의해 태어남을 결정할 수 있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질문의 한 측면은 불교적 윤회 사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적 윤회 사상은 삶에 대한 바른 이해[정견(正見)] 위에서 삶의 향상을 이끄는 가르침이기 때문에 개나 소가 되기를 희망하는 것은 (MN 57-개의 습성 경)의 가르침에서 보듯이 옳지 않습니다. 불교는 개나 소로 태어나는 윤회를 안내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황인숙의 "나는 고양이로 태어나리라"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면 불교적 윤회와는 지향이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물론, 고양이의 자유로운 모습을 보고 화자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삶을 주제로 한 시라고 설명하셨듯이, 자유 즉 해탈(解脫)을 지향하는 이상적인 삶을 고양이에 비유하였다는 점에서 고양이라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서 본다면 이 시는 불교적 윤회 사상을 담고 있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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