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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iN] 기독교의 기도로 번뇌를 없애도 누진통을 얻은 것입니까?

[질문] 기독교의 기도로 번뇌를 없애도 누진통을 얻은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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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에서 번뇌[()]는 욕루(慾漏-소유의 번뇌)-유루(有漏-존재의 번뇌)-무명루(無明漏-무명의 번뇌)의 세 가지로 설명됩니다. 이때, 번뇌가 부서져 번뇌 없는 심해탈(心解脫)-혜해탈(慧解脫)을 성취하는 과정을 누진통(漏盡通)이라고 합니다.

 

이 과정이 사념처(四念處) 사마타-위빳사나의 체계를 가지는 불교 수행인데, 포괄적 의미로는 고멸(苦滅)로 이끄는 길과 실천인 팔정도(八正道) 즉 정견(正見)-정사유(正思惟)-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입니다.

 

이때, 팔정도의 시작인 정견(正見) 즉 바른 견해는 고(-괴로움)-고집(苦集-괴로움의 자라남)-고멸(苦滅-괴로움의 소멸)-고멸도(苦滅道-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실천)로 구성되는 사성제(四聖諦-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아는 것이라고 정의됩니다. 이런 네 가지 진리 또는 사실에 대해 바르게 알 때 일상의 삶을 제어하면서 사념처(四念處) 사마타-위빳사나의 체계를 가지는 수행으로 삶을 향상하고 그 끝에 누진(漏盡)하여 깨닫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의 기도로는 누진통(漏盡通)이 의미하는 번뇌를 부수지 못합니다. 유일신인 하나님에 의한 창조라는 견해는 삶[나와 세상]에 대한 바른 견해가 아니어서 이런 견해 즉 사견(邪見)으로는 팔정도(八正道)의 실천을 이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기독교의 기도도 삶을 향상으로 이끄는 방법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향상의 끝이 어디인지에 대해 주목하면 누진(漏盡)으로 성취되는 완전한 깨달음에 의해 윤회에서 벗어나는 불교 수행과는 괘를 달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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