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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법인(三法印)

무아(無我)에 대한 소고(召誥) - 2. 앎과 식 & 무아윤회 & 삼사화합 촉(해피스님 181114)

4 973 2018.11.16 08:44

무아(無我)에 대한 소고(小考) - 2. 앎과 식 & 무아윤회 & 삼사화합 촉(해피스님 181114)

[동영상] https://youtu.be/l2afMzHJlJg


 

1. [앎과 식(識)] 혜민 스님은 강연에서 앎 즉 아는 그것이 바로 나라고 설명하였는데, 앎 즉 지(知)는 ñāṇa입니다. 이때, 식(識)은 ñāṇa와 구분되는 것으로의 viññāṇa입니다. ñāṇa 즉 앎을 몸통으로 하는 마음인 식(識)이 viññāṇa라는 점에서 바라문교의 존재관과 불교의 존재관의 차이를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닌지 연구가 필요하다는 점을 다시 말하였습니다.


2. [무아윤회(無我輪廻)] 이런 식(識)은 「심(心)이라고도 의(意)라고도 식(識)」이라고도 불리는 바로 그 마음인데, 부처님은 심(心)과 의(意)와 식(識)이 각각 어떻게 생겨나는 것인지 그 조건관계를 설명함으로써 마음의 정체를 드러내 줍니다. 


식(識)은 지난 삶의 누적이면서 지금 몸과 함께 세상을 만나 새로운 식(識)을 출산합니다. 출산된 식(識)은 지금 삶을 산 뒤에 중생세상에 머물고 다시 이전의 누적에 더해져 누적된 삶을 바꿉니다. 그래서 [식(識)-명색(名色)]으로 정의되는 나는 매 순간의 삶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삶의 순간순간 나는 삶의 과정을 누적하며 변화하는 것! ㅡ 무아(無我)의 존재」


그런데 식(識)과 명색(名色)은 생존기간이 다릅니다. 그리고 이런 생존기간의 불균형 때문에 때때로 식(識)은 한동안 함께한 명색(名色)을 잃고 새로운 명색(名色)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이때에도 식(識)은 변화의 연장선 위에 있습니다. 또한, 식(識)과 명색(名色)은 서로 조건 되는 것이어서 식(識)은 명색(名色)없이 혼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명색(名色)을 잃는 순간 동시에 새로운 명색(名色)을 만납니다. 바로 죽고 태어남 즉 윤회(輪廻)의 설명이고, 죽는 순간 태어나는 현상의 설명입니다[중유(中有) 없음].


한편, 불교(佛敎) 안에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논의가 있는데, 무아(無我)와 윤회(輪廻)의 양립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이런 이해는 이 논의를 종식시킵니다. 무아(無我)의 존재인 나의 삶의 과정이 식(識)과 명색(名色)의 생존기간의 불균형 때문에 윤회(輪廻)를 수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계에는 무아윤회(無我輪廻)라는 표현과 그 타당성에 대한 논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삶에 대한 이런 이해에 의하면, 이것은 더 이상 논쟁거리가 아닙니다. 무아(無我)의 존재인 나의 삶의 과정으로의 윤회(輪廻)를 설명하는 적절한 표현인 것입니다.


3.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 삶에 대한 이런 이해는 누적된 삶 그리고 누적된 삶이 지금 세상을 만나는 과정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합니다. ①[식(識)-명색(名色)]인 내가 세상을 만나기 위해 세상의 구성에 맞춰 배분된 설명이 육입(六入)이고, ②육입(六入)의 인식과정[육내입처(六內入處)와 육외입처(六外入處)의 대응과 작의(作意)]에서 외입처(外入處)에 대한 앎을 몸통으로 생겨나는 출산된 식(識), 그리고 ③이 세 가지의 만남[삼사화합(三事和合)]으로 정의 되는 촉(觸)과 촉(觸)의 조건으로부터 생겨나는 수(受)입니다.


이때, 내입처(內入處)는 식(識)과 근(根)이 함께한 것입니다(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4_05&wr_id=31참조). 마음과 몸이 함께함 즉 마음이 몸을 접점으로 세상을 만나는 과정의 설명입니다. 그런데 그간의 공부에서는 삼사화합(三事和合)을 근(根)-경(境)-식(識) 삼사(三事)의 화합(和合)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아함(阿含)의 정의(?)]. 그러나 니까야는 어디에서도 삼사화합(三事和合)을 근(根)-경(境)-식(識) 삼사(三事)의 화합(和合)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식(識)과 근(根)이 함께한 것으로의 내입처(內入處)와 외입처(外入處) 그리고 출산된 식(識)의 삼사화합(三事和合)입니다.


촉(觸)은 내입처(內入處)-외입처(外入處)에 이어 삶의 두 번째 토대입니다(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4_05&wr_id=30참조).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그래서 십이연기(十二緣起)를 구성하는 열두 지분의 하나인 것입니다. 


삶의 토대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삶에 대한 오해를 야기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에 의해 설명된 무아(無我)적인 윤회(輪廻)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삼사화합(三事和合) 촉(觸)은 육내입처(六內入處)-육외입처(六外入處)-육식(六識)[출산된 것]의 만남이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Comments

rnehwk 2018.11.18 13:13
안녕하세요? 스님!
식과 명색은 서로 조건되는 것이어서 식은 명색없이 혼자 존재할 수 없다고 하시는데,
다른 법회에서 종종 출산된 식과 이후 과정에서 생겨나는 심은 몸과 함께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니 혼동이 되네요.
그렇다보니 1차 인식에서 몸과 함께 하기 전의 육식(안식 내지 의식)은 어떻게 있는지와 의식은 의근을 포함한다는 것도 잘 이해가 안됩니다.
법회에 참석해서 공부할 때는 이해되는 것 같기도 했는데....!
2018.11.18 16:42
출산된 식과 이후 과정에서 생겨나는 심은 몸과 함께하지 않는 마음 ㅡ> 작용의 측면에서 몸과 함께 하지 않는

네, 법우님. 이것이 예민한 주제라 저도 정확히 표현하려고 하는데, 이전에 때때로 그렇게 말해진 경우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몸과 함께하는 것(몸 안에 있는 것)은 벗어날 수 없는 특징입니다. 다만, 마음의 작용 중 깊은 영역 즉 작용의 측면에서 몸과 함께하지 않는 독자적 작용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rnehwk 2018.11.26 13:18
그간 공부하면서 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나 봅니다.
23일 스님과 함께한  "차담회" 자리에서 '근'이 뇌를 포함하는 몸 전체라는 설명과 '식'은 물질이 아니어서 위치를 특정할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
귀가하는 중에 모든 의문이 사라지고 비로소 1차 인식에 대한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스님께 감사할 따름입니다.
24일 입소한 제따와나 선원 중도수행 초심자 과정은 춘천에 첫눈이 10센티 이상 내려서 눈에 길이 막혀 대중교통이  운행되지 않아 고생했지만 잘 마치고 25일 늦게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대원행 2022.09.17 22:18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09&wr_id=12&&#c_50 참조 (혜민스님의 오류 지적 & 불설(佛說)의 판단기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