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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동영상(불교의 요점)

[불교의 요점 시리즈 - 아침독송(240930)] (AN 8.8-웃따라 실패 경)[별책 수행경전의 3가지 보충](근본경전연구회…

0 36 09.30 09:43

[불교의 요점 시리즈 - 아침독송(240930)] (AN 8.8-웃따라 실패 경)[별책 수행경전의 3가지 보충](근본경전연구회 해피스님)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0fsOss3p2A

 

초기불교 백일법문(독송 및 개론)에서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2_13&wr_id=395

 

2. 전체 영상은 아침 독송(240930)입니다.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8_02nn&wr_id=1199

  

아침 독송에 참여하는 방법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8_02nn&wr_id=960

 


 

【별책의 보충】 (초기불교 경전백선 별책 수행 경전)


『초기불교 경전 백선 독송집』의 별책으로 이 책을 제작하면서 세 가지 관점에서 본 책의 보충 필요성을 보게 되었는데, ①근본경전연구회의 공부 기준을 부처님이 직접 설한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②가르침의 토대, ③원초적 바른 견해입니다.


1.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


1)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인가?


한국붇다와다불교 해피법당 근본경전연구회는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의 범주로 ①율장(律藏-vinaya piṭaka)의 마하 위방가와 비구니 위방가 그리고 ②경장(經藏-sutta piṭaka)의 4부(디가-맛지마-상윳따-앙굿따라) 니까야와 쿳다까 니까야에 속한 법구경과 숫따니빠따를 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니까야 심지어 이런 범주의 가르침조차도 부처님의 원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단지, 원음에 가장 가까울 뿐이라고 말합니다. 


원음에 가장 가까운 가르침은 있어도 원음은 아니다! 그러면 불교는 어디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가장 가까운 그것이 원음입니다. 그것보다 더 가까운 것이 없다면, 그리고 2600년 전으로 찾아가 부처님의 설법 장면을 동영상으로 촬영해 올 수 없다면, 그것이 원음에 수렴하는 것이고, 그대로 원음인 것입니다. 


다만, 증명해야 합니다. 이것이 원음이고, 원음에서 부처님은 이렇게 삶을 설명하고[고(苦)-연기(緣起)], 이런 방법으로 삶의 문제의 해소를 이끈다고[고멸(苦滅)-팔정도(八正道)] 교리적 체계를 제시해야 하고, 그것이 가르침에 대한 다른 주장이 접근하지 못하는 부처님의 깨달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세상에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다만 가장 가까운 가르침이 아니라 부처님의 원음 즉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이라는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붇다와다불교 해피법당 근본경전연구회는 삶에 대한 부처님의 설명으로 「삶의 메커니즘」을, 삶의 문제의 해소를 이끄는 부처님의 방법으로 「수행지도(修行地圖)」를 교리적 체계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전통보다는 진정이라는 관점에서 니까야를 꿰어서 만든 공부의 성과입니다.


; 「삶의 메커니즘과 수행지도(修行地圖)」 참조 ☞ 191쪽


누구든, 「삶의 메커니즘」과 「수행지도(修行地圖)」가 설명하는 깨달음의 길과 다른 방법으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설명할 수 있으면 그 성과를 제시해 주기 바랍니다. 그래서 어떤 성과가 더 타당하게 부처님을 대변할 수 있는지 토론해 보면, 이 가르침이 단지 가장 가까운 가르침인지 아니면 그대로 부처님의 원음인지를 판단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든, 공부의 성과를 제시하지 못하면서 그저 아니라고 부정만 하지는 말기를 바랍니다. 공부를 통한 성과를 대안으로 드러내면서 타당성을 가지고 부정할 때, 그 부정이 의미를 가지고 불교를 더 부처님에게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공부를 대하는 이 기준은 그대로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입니다.


2) 제자들이 설한 가르침 ― (AN 8.8-웃따라 실패 경)

 

그런데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을 공부하다 보면 부처님이 직접 설하지 않은 가르침들이 종종 눈에 띕니다. 제자들이 설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설한 가르침을 부처님이 직접 설한 가르침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으로의 공부 기준 안에 신(神) 또는 제자들이 설한 경도 많으니 부처님이 직접 설했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는 지적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때, (AN 8.8-웃따라 실패 경)은 바로 이런 지적을 위해 준비된 답인 듯 이렇게 묻고 답합니다. 


질문 ― “대덕이시여, 이 말씀은 웃따라 존자 스스로의 이해입니까, 아니면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말씀입니까?”


대답 ― “예를 들면, 신들의 왕이여, 마을이나 번화가의 멀지 않은 곳에 큰 곡물 무더기가 있습니다. 그것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들통이거나 바구니거나 감는 천이거나 두 손을 모아서 곡물을 가져갈 것입니다. 신들의 왕이여, 어떤 사람이 그 많은 사람에게 가서 이렇게 물을 것입니다. ― ‘그대들은 어디에서 이 곡물을 가져갑니까?’라고. 신들의 왕이여, 어떻게 말하는 것이 그 많은 사람이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까?” 


“대덕이시여, ‘우리는 이러저러한 곡물 무더기로부터 가져갑니다.’라는 것이 그 많은 사람이 바르게 말하는 자로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들의 왕이여, 잘 말해진 모든 것은 어떤 것이든지 그분 세존-아라한-정등각의 말씀입니다. 그것으로부터 거듭 취하여 우리도, 다른 사람들도 말합니다.”


잘 말해진 모든 것 즉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옮겨 말하는 것은 신(神)이나 제자들이 해야 하는 역할입니다. 그러니 신이나 제자들이 말한 일화로서 니까야에 포함된 경들은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입니다. 다만, 잘 말해진 부처님 가르침의 무더기[무아(無我)] 안에서 거듭 옮겨 말해진 것만이 그 일화 자체로서 니까야에 포함되어 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후대의 제자들이 그 무더기 안에서라는 전제를 달고 새로운 경을 만드는 것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부여하자는 의미는 아닙니다. 오직 전승된 범주 안에 있는 옮겨 말해진 경들에 대한 이해의 측면일 뿐입니다.


; 그렇다면 우리도 그들처럼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옮겨 말해야 합니다. 다만, 다른 무더기[아(我)] 안에서 옮겨 말하면 그것은 바르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외도(外道)의 가르침을 전달하는 것이 되니 신중하게 옮겨 말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붇다와다 불교의 공부 기준은 「부처님 살아서 직접 설한 가르침」입니다. 잘 말해진 부처님 가르침의 무더기[무아(無我)] 안에서 거듭 옮겨 말해진 신(神)이나 제자들의 대화를 포함하여 1차 결집에서 결집된 공부입니다. 그래서 이 기준 안에서는 교리적 충돌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부처님의 의도에 따르는 확정적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아직 잘 이해되지 않는 것은 공부가 성숙하여 이해하게 될 때까지 미뤄 놓으면 됩니다. 섣불리 자기의 몰이해를 근거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부정하지 않아야 합니다.


2. 가르침의 토대 ‒ ①업(業)-②결실 있음-③노력


1) 부처님을 대표하는 두 가지 개념 → 업을 잇는 자


부처님은 「업(業)을 말하는 자(kammavādī)이고, 결실 있음을 말하는 자(kiriyavādī)」입니다. 


태생에 의해 결정된 수동적 삶이 아니라 행위 즉 업으로써 만들어 가는 능동적 삶을 말하는 것인데, 삶의 중심을 창조주 하나님 등 어떤 신(神)적 존재에 두지 않고 자신의 행위 즉 업(業)에 두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업(業-kamma)에 과(果)와 보(報)가 법칙성을 가지고 뒤따르는 현상을 결실 있음(kiriya)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중생은 ‘업을 잇는 자’라고 불립니다. ― 「kammassakā sattā kammadāyādā kammayonī kammabandhū kammapaṭisaraṇā 중생들은 자신의 업(業)이고, 업을 잇고, 업이 근원이고, 업을 다루고, 업의 도움을 받는다.」(MN 135-업 분석의 짧은 경)/(AN 5.57-반복 숙고해야 하는 경우 경)/(AN 10.216-기어감의 경)


2) 가르침의 토대 ‒ ①업(業)-②결실 있음-③노력 ― (AN 3.138-머리카락으로 만든 담요 경)

 

(AN 3.138-머리카락으로 만든 담요 경)에 의하면,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부처님은 공통되게 ①업(業)을 말하고, ②결실 있음을 말하고, ③노력을 말합니다. 업(業)에는 결실이 있으니 좋은 결실을 얻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농사를 짓는 행위에는 풍작이든 흉작이든 결실이 있고, 풍작을 거두기 위해서는 적절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의미인데, 부처님을 대표하는 두 가지 개념 위에서 노력을 통해 행복한 삶을 실현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 즉 불교(佛敎)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막칼리라는 사람은 이 세 가지를 부정하는 교설을 세워서 많은 사람을 괴로움으로 이끕니다. 이런 교설을 결실 없음(akiriya)이라고 하는데, ①전생의 행위가 원인, ②신(神)의 창조가 원인, ③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음[무인무연(無因無緣)]이라는 삶에 대한 잘못된 해석 세 가지 즉 삼종외도(三種外道)는 막칼리의 결실 없음(akiriya)의 아류입니다.


3) 불교의 대척점


이렇게 업(業)과 결실 있음과 노력의 세 가지로 구성된 부처님 가르침의 토대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막칼리 고살라의 교설은 결실 없음(akiriya)입니다. 이런 막칼리 고살라의 일파를 ājīvaka(아-지-와까)라고 하는데, 사명외도(邪命外道)라고 한역(漢譯)되었습니다. 특히, (MN 71-왓차 삼명 경)은 ājīvaka가 업(業)과 결실 있음의 반대편에서 교설을 설한다는 점을 직접 알려주는데, 이런 교설로는 하늘에 태어나지 못합니다.


부처님은 업(業)과 결실 있음을 설하는 자이기 때문에 업(業)과 결실 없음을 설하는 막칼리 고살라와 그 일파인 ājīvaka는 불교의 대척점이 됩니다. 불교 밖의 다른 주장은, 앞에서 말했듯이, 세 가지 근본 교리 즉 ①전생의 행위가 원인, ②신(神)의 창조가 원인, ③원인도 없고 조건도 없음의 삼종외도(三種外道)로 대표되는데, 이 세 가지는 모두 결실 없음 위에서 펼쳐진 교설들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세 가지 교설보다도 불교의 대척점에 있는 것은 결실 없음을 직접 설하는 막칼리 고살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부처님은 막칼리 고살라를 부처님과 가장 반대되는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AN 1.308-321-세 번째 품)에 의하면, 업(業)과 결실 있음과 노력을 말하는 부처님은 바른 견해를 가지고 올바로 보는 자여서 신과 인간들을 행복으로 이끌고, 업도 없고 결실도 없고 노력도 없다고 말하는 막칼리는 삿된 견해를 가지고 거꾸로 보는 자여서 신과 인간들을 괴로움으로 이끕니다. 경은 이런 이해 위에서 더 구체적으로 비교하는데, 업(業)과 결실 있음과 노력을 말하는 부처님 가르침의 성과와 업(業)과 결실 있음과 노력을 부정하는 막칼리의 가르침의 성과입니다.


• 부처님 가르침의 성과 ― 「①부추기는 자도 부추기는 것을 사실대로 실천하는 부추겨진 사람도 그들 모두는 많은 복(福)을 쌓는다, ②받는 사람에 의해서 양이 알려져야 한다. 주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다, ③게으른 자는 괴롭게 머문다, ④노력을 시작한 자는 행복하게 머문다.」


• 막칼리의 가르침의 성과 ― 「①부추기는 자도 부추기는 것을 사실대로 실천하는 부추겨진 사람도 그들 모두는 많은 비복(非福)을 쌓는다, ②주는 사람에 의해서 양이 알려져야 한다. 받는 사람에 의해서가 아니다, ③노력을 시작한 자는 괴롭게 머문다, ④게으른 자는 행복하게 머문다.」


3. 원초적인 바른 견해 ― 스승의 영역에 속하는 것 ― (DN 23-빠야시 경)


불교에서 삶을 보는 바른 시각 즉 정견(正見)은 공부의 진행에 따라 다양하게 제시되는데, 향상된 삶을 위한 출발점에서 가져야 하는 원초적 바른 견해는 (DN 23-빠야시 경)이 말하는 ①저세상 있음, ②화생(化生)하는 중생 있음, ③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름이라는 세 가지로 구성됩니다. ― 「itipi atthi paro loko, atthi sattā opapātikā, atthi sukat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 이렇게도 저세상은 있다. 화생하는 중생은 있다. 선악(善惡)으로 지어진 업(業)들의 과(果)와 보(報)는 있다.」


이 세 가지는 십선업(十善業)의 정견(正見)에 속한 여섯 가지에서 발췌한 것인데, ①저세상 있음은 윤회(輪廻)한다는 선언이고, ②화생(化生)하는 중생 있음은 윤회해서 다시 태어나는 세상이 지옥-축생-아귀-인간-천상의 다섯 갈래로 구성된다는 가르침이며[오도윤회(五道輪廻)], ③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름은 원하는 세상 즉 하늘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하늘로 이끄는 업(業)을 실천해야 한다는 방법의 제시 즉 태어남의 선택입니다.


그런데 저세상이 있다는 것은 보통의 사람에게는 확인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해피스님은 죽어봤는지, 그래서 죽은 뒤에 저세상이 있어서 윤회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였는지?’ 묻기도 합니다. 물론 해피스님은 이 몸으로의 삶에서 죽어보지 못했고, 저세상이 있다고 직접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역으로 ‘그대는 죽어봤는지, 죽은 뒤에 저세상이 없어서 단멸(斷滅) 한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였는지?’ 물으면 그 또한 확인하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없지만 반드시 알아야 하는 주제들은, 말하자면, 스승에 대한 믿음의 영역에 있는 것들(스승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이라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주제들에 대한 스승의 가르침을 공감과 동의 그리고 신뢰로써 뒤따르는 사람을 신자(信者)라고 하고, 이런 방법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뒤따르는 사람들이 불교 신자입니다.


주목해야 합니다. 스승에 대한 믿음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받아들이고 뒤따르는 사람이 불교 신자입니다. 다른 스승의 가르침을 뒤따르면서 불교 신자의 허울을 쓰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음이고, 삶은 바르게 향상으로 이끌리지 못합니다.


한편, 원초적인 바른 견해의 세 가지에는 각각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1) ‘저세상 있음[윤회(輪廻)]’ ― 이 주제에는 세 가지의 주장이 있는데 단견(斷見)-상견(常見)-연기(緣起)이고,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緣起)입니다. → 「연기(緣起)된 식(識)의 윤회(輪廻)」


2) ‘화생(化生)하는 중생 있음[오도윤회(五道輪廻)]’ ― 이 주제에 대해 (MN 12-사자후의 큰 경)은 각각의 태어남에서 어떤 느낌을 경험하는지 알려줍니다. → 「지옥 – 오로지 고통스럽고 가혹하고 혹독한 느낌, 축생 - 고통스럽고 가혹하고 혹독한 느낌, 아귀 – 고통 많은 느낌, 인간 – 행복 많은 느낌, 천상 - (제한된) 오로지 행복한 느낌」 & 「깨달은 자리 - (제한 없는) 오로지 행복한 느낌」


3) ‘업(業)에는 과(果)와 보(報)가 따름[태어남의 선택]’ ― 이 주제는 「행위가 가지는 과(果)와 보(報)의 법칙성」의 측면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 과(果)도 보(報)도 괴로움이어서 지옥으로 이끄는 힘을 가지는 십악업(十惡業)은 피하고, 과도 보도 행복이어서 하늘로 이끄는 힘을 가지는 십선업(十善業)은 적극 실천해야 함.


(DN 23-빠야시 경)에서 빠야시 대신은 「“itipi natthi paro loko, natthi sattā opapātikā, natthi sukat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ti 이렇게도 저세상은 없다. 화생하는 중생은 없다. 선악(善惡)의 업(業)들에게 과(果)와 보(報)가 없다.」라는 악하고 치우친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itipi atthi paro loko, atthi sattā opapātikā, atthi sukatadukkaṭānaṃ kammānaṃ phalaṃ vipāko’ti ‘이렇게도 저세상은 있다. 화생하는 중생은 있다. 선악(善惡)의 업(業)들에는 과(果)와 보(報)가 있다.」라고 말하는 꾸마라깟사빠 존자에게 반발하고, 꾸마라깟사빠 존자는 다양한 비유로써 빠야시 대신을 설득합니다. 


꾸마라깟사빠 존자의 이런 설득에도 불구하고 악하고 치우친 견해를 버리지 못하는 빠야시 대신에게 삼꾸러미의 비유를 통해 이런 견해를 버려야 하는 당위성을 설득하는 장면은 바른 가르침을 만나고서도 가지고 있던 공부를 버리지 못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교훈이 됩니다.


4. 이런 세 가지 관점의 중요도를 고려해서 다섯 개의 경을 책의 본 내용에 앞서 독송의 형태로 수록하였습니다. 다만, (DN 23-빠야시 경)은 긴 경이어서 이 관점에서 필요한 내용만 발췌하여 수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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