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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악마)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작업1 1 74 2023.12.09 22:37
스님께 합장 드립니다  _()_

여러 법우님들께도 합장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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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고기 경(S12:63)에서 "큰 힘을 가진 두 사람이 와서 어떤 사람을 여러 개의 팔로 붙잡고 시뻘겋게 불타고 있는 불구덩이로 그 사람을 던져넣기 위해서 끌고간다"는 비유가 있습니다.

그 비유가 무슨 말이냐면 "마라나 원수"가 와서 "도저히 화를 안낼 수 없고", "어쩔 수 없고, 이유가 있고, 사정이 있다고 말할 정도"로 절박한 상황으로 여러분을 몰아 넣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 여러분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과 친근한 이들에게까지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시뻘겋게 불타고 있는 불구덩이로 그 사람을 던져넣기 위해서 끌고간다"는 상황에서 "그 사람"이 느끼는 "육체적 고통과 불구덩이에 빠져 죽거나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고통을 느낄 것이라는 생각 및 감정(feeling)" 때문에 갈애가 생기고, 그 갈애에 의해서 취착이 생기고, 그 취착에 의해서 존재가 생기고, 그 존재에 의해서 태어남이 생기고, 그 태어남에 의해서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고뇌, 절망, 등이 생겨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라와 여러분들의 원수怨讐들"은 여러분들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고 "여러분들"이 "여덟 가지 바른 도"를 버리게 하고 "여덟 가지 잘못된 도"을 행하기를 바라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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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악마)는 실제로 존재합니다.

제가 격어본 마라는 신통(?) 같은 어떤 권능을 행사하는 자였습니다. 예를 들자면 마라가 명령하는 말을 듣는 자의 "몸과 말과 마음"을 지배할려는 능력 같은 것입니다


만약 You가 그러한 일을 격는다면 "석가모니 부처님"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마라가 능력을 행사해서 몸과 말과 마음을 지배할려고 드는 상황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누군가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마라가 지배할려고 드는 상황을 격더라도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고 나가 아니고 나의 자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냥 두어야지" 라고 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12연기적으로 갈애는 "육체적 느낌 및 감정(feeling)"으로부터 생겨납니다.
Vedanā (f.) [fr. ved°: see vedeti; cp. Epic Sk. vedanā] feeling, sensation


이 말은 "You가 아라한 정등각이 아니라면" (12연기적 원리로써) 괴롭거나 즐겁거나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은 "육체적 느낌 및 감정"을 느낀다면 You가 원하던 원치 않던 갈애는 생겨납니다.

그리고 feeling은 (12연기적으로) 어떻게 생겨나나요?

"접촉"에 의해서 feeling은 생겨납니다.

저것은 "접촉"한다면 You가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안, 이, 비, 설, 신, 의)가  있는 살아있는 존재라면  feeling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접촉"은 어떻게 생겨나나요?

"접촉"은 "육입처"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보통 "육입처"라고 하면 "해피스님의 법문"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눈 기능, 코 기능, 귀 기능, 혀 기능, 몸(피부) 기능, 정신적 지각 기능"에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깐 앞에서 필자가 언급한 (12연기적인 원리)에 의하면 이 "접촉"은 정신이 깨어 있고 "(눈, 귀,  코, 혀, 몸, 정신적 지각 기능에 마음이 함께 있는)" 살아있는 존재"는 피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러한 "접촉"에 의해서 생긴 feeling도 피할 수 없고 느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접촉이 일어날 때 육체적 정신적 feeling을 느껴야만 한다면 이 feeling에 대해서 잘 제어하고 통제해서 그 상황에서 괴로움을 면하고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야 하는 중요한 이유는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 지음에는 상응하는 과와 보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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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불교는 갈애만 제거하면 다 되는거 아니였습니까?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8_04nn&wr_id=313&page=2
*갈애가 생기는 것은 괴로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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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악한 업을 짓는 것이 어쩔 수 없고, 이유가 있고, 사정이 있다고"말 할지도 모르지만 그러한 "개개인의 사정"으로 인해서 악한 업을 짓는다면 그 악한 업을 지은 사람은 기나긴 세월 눈물 흘려야 하고 남에게 원망해야 하고 고통받아야 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고, 이유가 있고, 사정이 있다"는 그러한 상황 때문에 악업을 짓지 않기 위해서

우선 현재나 가까운 미래에 있을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알아차리면서

괴로움, 화남, 슬픔, 원망, 불만, 자만自慢, 아만我慢, 완고하게 악을 행하려고 하는 상태, 등이 있을 때, (공포를 알아차림과 동시에) 자무량심 내지 사무량심을 행하면서 (괴로움, 화남, 원망, 불만, 자만自慢, 아만我慢, 완고하게 악을 행하려고 하는 상태, 등등)을 (자무량심 내지 사무량심)으로 제거하면서 참고 견디면서 마음의 치유하면서 마음을 보호하면서 (몸, 입, 마음의 악한 행위를 멈추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이고

(자무량심이나 사무량심을 수행할 때 "자무량심 또는 사무량심"과 칠각지를 닦아서 다섯가지 장애를 제거하는 것입니다)
(칠각지는 자무량심이나 사무량심을 계속해서 수행하고 있을 때 시작되고 닦아지고 성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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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공포를 알아차리면서 공포를 제거하는데 어느 정도 공포가 사라졌을 때)

현재나 가까운 미래에 <존재할 수도 있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알아차리면서

칭찬받을 때, 명성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자만自慢 및 아만我慢이 있을 때, 감각적 즐거움에 대한 욕망이 생길 때 그것들에 의해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흔들리지 않도록 (색, 수, 상, 행, 식)에 대한 무상, 고, 무아,를 관찰, 생각하면서 신념처에서 "몸에 대한 32가지 부정한 것들에 대한 관찰"을 행하면서 (몸, 입, 마음의 악한 행위를 멈추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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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공포를 알아차리면서 공포를 제거하는데 어느 정도 공포가 사라졌을 때)

현재나 가까운 미래에 <존재할 수도 있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알아차리면서

무명으로 인해 행위가 일어나서 "결국"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의 상태일 때 저것들에 대한 즉 (오온과 오취온에 대한) 매력과 그 위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오온에 대한) "충동과 흥분"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오취온이란 오온에 대해서 충동과 흥분으로 집착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자신의 지금 상태를 잘 모르겠다 하는 분은 십이연기적인 것인지 오취온에 관계된 것인지를 확인하고 여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색, 수, 상, 행, 식"에 대해서 무상, 고, 무아를 생각하거나 "색, 수, 상, 행, 식"에 대한 충동과 흥분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눈, 귀, 코, 혀, 몸[피부]로 감각하는 것인데 <= 즉 오감五感의 즐거움이나 만족, 등 오감五感으로 느끼는 것에 대한 희망, 기대감, 욕망, 등에 대한 충동과 흥분을 제거하고), 십이 연기와 (색, 수, 상, 행, 식에 집착된 상태)에 해당된다면 (색, 수, 상, 행, 식)에 대한 충동과 흥분을 제거하기 위해서 열심히 도를 닦으면 됩니다.

공포를 알아차리면서 동시에 (<= 이 부분에서 : 경우에 따라서는 공포를 알아차리면서 공포를 제거하고 있는 것에 몰두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온 = (색, 수, 상, 행, 식)

([감각의 즐거움에 대한 기대감 및 희망, 즐길만하다고 생각되는 느낌의 매력과 그 위험에 대해서] 및 [오온에 대한 매력과 위험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에 [감각의 즐거움, 등에 대해서] [마라의 미끼고 덫이고 함정이다, 과거의 삶의 경험을 통해서 결국 슬픔, 비탄, 고통, 고뇌, 절망이 있을 뿐이다 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오감에 관련된 즐거움, 기쁨, 만족감, 등에 대해서 염오하고 희망希望을 가지지 않고], 동시에 공포를 알아차리면서 동시에 자무량심 내지 사무량심으로 "분노, 증오, 폭력 또는 슬픔", 등의 감정들과 의도가 사라질 때까지 자무량심 내지 사무량심을 행하면서 마음을 치유하고 "분노, 증오, 폭력 또는 슬픔", 등으로부터 마음을 지키고 마음을 보호할 수 있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인가? 라고 한다면, 삶은 선업이나 악업의 업 지음의 연속이고 "선업이든 악업이든 업 지음에는 과와 보가 따른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같이 하는 동시에 자만自慢과 아만我慢을 주의해야 합니다. (네이버 국어 사전 - 아만我慢 1. 번 의미)

"오계五戒를 하나 하나씩 번갈아가면서 반복적으로 입으로 암송하고 동시에 마음속으로도 암송하면서" (몸, 입, 마음의 악한 행위를 멈추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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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darāga: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8_04nn&wr_id=272&page=2
*오계를 잘 지키기 위한 도닦음: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8_04nn&wr_id=271&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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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자(마라)"가 "대답하지 않으면 허락한 것이라고 간주된다는 것"을 이용하여 대답하지 않을 수 없는 말로 교묘하게 여러분이 여러분 스스로 잘못되도록 유도하는 말을 할 때 "니까야를 아주 많이 반복해서 읽고 듣고 배워 알고 있기 때문에" 경전의 말씀으로 대답하는 것을 잘 합니다. (예: "말하는 자의 입에서 도끼가 나와서 그 말하는 자를 찍는다는 말씀이 있다." 와 같이)

위의 설명대로 잘 하기 위해서 "니까야"를 전체적으로 많이 반복해서 읽거나 듣거나 배워야 하는 것이고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것들을 잘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서 "보시"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명의 소멸에 의해서 행의 소멸이 있고
행의 소멸에 의해서 식의 소멸이 있고
식의 소멸에 의해서 명색의 소멸이 있고
명색의 소멸에 의해서 육입처의 소멸이 있고
육입처의 소멸에 의해서 접촉의 소멸이 있고
접촉의 소멸에 의해서 feeling의 소멸이 있고
feeling의 소멸에 의해서 갈애의 소멸이 있고
갈애의 소멸에 의해서 집착의 소멸이 있고
집착의 소멸에 의해서 존재의 소멸이 있고
존재의 소멸에 의해서 태어남의 소멸이 있고
태어남의 소멸에 의해서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고뇌, 절망, 등의 모든 괴로움이 소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단은 아래의 두 링크를 읽기 바랍니다.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8_04nn&wr_id=312&page=2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8_04nn&wr_id=313&page=1


이 글은 필자가 직접 격어본 것을 토대로 해피 스님의 법문을 듣거나 니까야를 읽거나 듣거나 해서 알게 된 부분을 설명하였습니다. 참조되시기 바랍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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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까야에서 "색, 수, 상, 행, 식"에 대해서 (안의 것, 밖의 것, 거친 것, 미세한 것, 큰 것, 작은 것, 긴 것, 짧은 것, 아름다운 것, 추한 것, 저열한 것, 뛰어난 것,  과거-미래-현재의 어떤 색, 수, 상, 행, 식이든) 이런 형식으로 설해지는 경전을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틀린 내용이 있다면 그건 필자의 공부의 부족입니다)

하여튼 그래서 저 "색, 수, 상, 행, 식"은 자신이 아니니깐 신경 끊어야 되고 무시해야 하고 잊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일까요?

니까야에서 "나의 것이고, 나고, 나의 자아"라고 보는 대상은 "색, 수, 상, 행, 식"인데요.

법우님들이 삶을 살다보면 "법우님들 <지금 이 순간>의 삶을 살고 있는 법우님들의 현재 몸"에 뭔가 닿지 않았는데 어떠한 접촉으로 인해서 감각을 느껴야 될 수도 있고,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고, 그 어떠한 접촉으로 생긴 행이 있을 수도 있고, 위기감을 느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모여서 "나의 것이고, 나고, 나의 자아"라고 불리는 것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꽃의 줄기가 있고, 꽃잎이 있고, 수술(雄蕊)이 있고, 암술(雌蕊)이 있고, 꽃가루가 있고, 꿀이 있고, 꽃향기, 등등이 있는데 이러한 요소들이 모여서 있기 때문에 꽃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나의 것이고, 나고, 나의 자아"라고 불리는 것 또한 여러 요소들이 모여 있기 때문에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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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 연기의 명색은 "수, 상, 사, 촉, 작의"로 불리는데 저것들은 육입처를 범위로 하는 "행들"을 조건으로 생깁니다.

명색은 식에 의해서 있는 것이지만 식 또한 명색에 의해서 있는 것이고 식과 명색은 서로가 의존하는 관계로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행에 의해서 식이 있다는 말은 행에 의해서 식이 생겨남과 동시에 명색 또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행에 의해서 식이 있다고 하고 식과 명색은 동시 존재하는 것이므로 행에 의해서 식과 명색이 동시 존재하더라도 행에 의해서 식이 시작하도록 하는 지점이 있는 것입니다.

행에 의해서 식이 시작하도록 하는 것 그것을 명색에서 <작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작의에 대해서 바로 아래 글에서 비유하자면.

예를들어, 만약에 어떤 (의식이 깨어있는 사람)이 대학교에서 어떤 교수님의 강의를 듣는다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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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그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귀로 집중시키고 동시에 교수 님의 강의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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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마음이 집에 있는 (재미난 게임, 돈, 맛있는 음식, 이쁜 아내)에게로 향하고 있다고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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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는 비록 귀가 있고 <그 사람의 귀>에 교수 님의 강의 <소리가 닿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교수 님의 강의 소리를 듣지 못하거나 듣기 싫은 소음 정도로만 들리거나 들리긴 하지만 그 강의의 내용을 제대로 들어서 알거나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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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사람의 정신이 깨어있는 상태에서 <사람의 마음>이 "눈, 귀, 코, 혀, 몸(피부), 정신적 지각 기능"에 집중하고 동시에 그 대상인 "형상, 소리, 냄새, 맛, 촉감觸感, 정신적 지각 대상"에 집중을 해야만 그 대상을 제대로 지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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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쪽의 비유에서 그 마음의 작용을 작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행에 의해서 식이 있다는 말은 바로 아래의 내입처와 외입처를 조건으로 식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안, 이, 비, 설, 신, 의
색, 성, 향, 미, 촉, 법

그래서 행에 의해서 명색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행에 의해서 명색이 있다는 것은 행에 의해서 명색이 존재하는 순간 <동시에> 식 또한 존재함을 의미합니다.

누군가 말하겠죠.

십이 연기에서 행 다음의 식은 무엇이고 삼사화합촉할 때 생기는 식은 무엇인가? 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과거 생에도 육입처(여섯 기능에 마음이 함께 있는 상태)가 있던 존재로서 그 육입처를 조건으로 새로운 식이 생기고 그 세 가지가 화합하여 "삼사화합촉"하게 되는데

이와같이 "삼사화합촉"할 때 새로운 식이 생깁니다.

여기서 새로운 식이 생긴다는 것은 눈으로 대상을 볼 때 그 대상을 아는 식이 새로 생긴다는 것입니다. 과거 생에 그 대상에 집착하였고 그 집착하는 대상에 식이 머물고 증장하여 이번 생에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 생에서 대상에 집착하여 그 집착한 대상에 식이 머물고 증장하여 이번 생에 다시 태어나게 되어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식>이 바로 "행에 의해서 식이 있다고 할 때의 식"이고,

현재 삶에서 내입처(안, 이, 비, 설, 신, 의)와 외입처(색, 성, 향, 미, 촉, 법)를 조건으로 "새로운 식 =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이 생기는데 "이 식"을 "삼사화합촉"할 때의 식이라고 합니다.

현재삶의 그 새로운 식이 지각하는 대상 즉 (색, 성, 향, 미, 촉, 법)에 <집착이 있을 때> 그 집착하는 대상에 식이 머물고 증장하여 미래에도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십이 연기는 그러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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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연기적으로 그러한 다시 태어남을 끝내기 위해서는 니까야를 전체적으로 많이 반복해서 읽고, 듣고, 공부해야 합니다.

니까야를 전체적으로 많이 반복해서 읽고, 듣고, 공부하는 것을 잘하기 위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과 율" 즉 니까야의 기준에서 "스님, 또는 비구 승가"에 보시해야 하고, 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탑"에 보시해야 합니다.

이렇게 보시하면서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갖추기 위해서, 니까야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보시합니다" 하는 마음가짐으로 그러한 생각으로 보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갖추기 위해서> "니까야를 전체적으로 많이 반복해서 읽고, 듣고, 공부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까야를 전체적으로 많이 반복해서 읽고, 듣고, 공부하는 것으로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과 율에 일치하는 완전한 바른 견해를 갖춤"으로서 <바로 아래>의 십이연기적인 원리에 의해서, 무명과 갈애의 소멸에 의해서 "태어나고 늙고 죽어야 하는 문제"를 끝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명의 남김 없는 소멸에 의해서 행의 소멸
행의 소멸에 의해서 식의 소멸
식의 소멸에 의해서 명색의 소멸
명색의 소멸에 의해서 육입의 소멸
육입의 소멸에 의해서 촉의 소멸
촉의 소멸에 의해서 수(feeling)의 소멸
수(feeling)의 소멸에 의해서 갈애의 소멸
갈애의 소멸에 의해서 취의 소멸
취의 소멸에 의해서 존재의 소멸
존재의 소멸에 의해서 생의 소멸
생의 소멸에 의해서 늙음,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고뇌, 절망, 등의 괴로움의 소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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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설명을 이어가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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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과 갈애가 있는 자가  탐, 진, 치로 <안, 이, 비, 설, 신, 의>에서 <색, 성, 향, 미, 촉, 법> 쪽으로 마음으로 "욕망, 기대감, 분노" 같은 것을 일으키는 행위를 하고 말과 몸으로도 행위한다는 것이죠.

"안, 이, 비, 설, 신, 의"과 "색, 성, 향, 미, 촉, 법"을 조건으로 <새로운 식>(아래의 6종류)이 생겨나고

안, 이, 비, 설, 신, 의
색, 성, 향, 미, 촉, 법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


바로 위의 세 가지를 조건으로 "삼사화합촉"이 생겨나고 그 "촉" 상태에서 "식"이 경험하는 "색, 성, 향, 미, 촉, 법"에 집착이 있으면 그 식이 그 대상에 머물고 증장하고 미래에 다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죠.

이러한 원리가 있다는 것이죠.

저 위의 글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여러분들이 아라한 정등각이 아닌 이상 여러분에게 접촉이 생긴다면 feeling이 생기고 그 feeling에 의해서 갈애가 생겨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단 현재의 삶에서 접촉되어 있기 때문에 원하던 원하지 않는 것에 상관없이 "feeling(수)"해야만 하는 상황에 있고 "상"해야하는 상황에 있고 "행"해야하는 상황에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일단 위에서 설명한 저 "삼사화합촉"을 어떤 방식으로든 멈춰야 feeling"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원하던지 원하지 않던지 "육입처"가 있기 때문에 "접촉당해 있는 상황"에 있는데 어떤 것을 느끼던 무시하고 코 끝에 마을을 두고 호흡념처, 신념처, 등등을 행하고만 있으면 되는 것일까요?

안 될 겁니다.

왜냐하면 아라한 정등각이 아닌 자로서 이미 접촉되어 있는데 그 상태를 어떻게 무시합니까?

*일단 (현재 일어나는 또는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알아차리면서) 또한 ( 자만自慢, 아만我慢1.을 주의하면서)

그래서 오히려 "삼사화합촉"되어 있는 상태를 분명히 알면서 코끝에 마음을 두고

코로 숨을 들이 쉬고 숨을 내쉴 때의 앉아있는 <몸의 자세>에 대한 알아차림,
코로 숨을 들이 쉬고 숨을 내쉴 때의 몸의 움직임에 대한 알아차림,
코로 숨을 들이 쉬고 숨을 내쉴 때의 몸의 움직임을 <보는 것>에 대한 알아차림,
코로 숨을 들이 쉬고 숨을 내쉬는 소리에 대한 알아차림,
코끝에서 폐로 다시 폐에서 코끝으로 공기가 들어오고 나갈 때의 공기의 접촉으로 생기는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중에 존재하는 심념처,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중에 존재하는 법념처,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중에 존재하는 칠각지, 사정근, 사신족, 오능, 오력, 팔정도를 <아주  부지런히> 행하면서 그 "삼사화합촉" 상태에 대한 Chandarāga를 제어하고 제거하려는 노력을 많이 반복하고 있어야 합니다.

(즉 호흡념처(신념처)로부터 시작하여 사념처를 닦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칠각지의 과정을 닦으면서 다섯가지 장애를 제거하는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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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에서 <<호흡 념처 수행을 한다는 측면에서>> "들이 쉰다"와 "내쉰다"를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분석을 해보겠습니다.
①호흡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②호흡을 들이 쉬거나 내쉬려는 의도가 있다.
③ ①번과 ②번의 상태에서 호흡을 의도적으로 하고 있다. (<=당면當面한 괴로움의 소멸을 위해서 호흡 념처를 의도적으로 행하는 것)
④ ③번의 상태에서 호흡할 때의 <몸의 움직임>을 보고 있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 신통도 포함)
⑤ ③번의 상태에서 호흡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⑥ ③번의 상태에서 코끝에서 폐로 다시 폐에서 코끝으로 공기가 들어오고 나갈 때의 공기의 접촉을 느끼고 있다.
⑦ ③번의 상태에서 호흡할 때 <배와 가슴, 등의 몸의 움직임>을 또는 <몸이 의복에 닿음>을 느끼고 있다.
⑧ ③번의 상태에서 호흡할 때의 몸의 움직임을 <마치 정신적으로 보듯이> 생생하게 상상하고 있다.  (<= 눈을 감고 있는 경우)

※이 호흡 수행, 등은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닦아야 하는 것이고 <<니까야에서 설해지는 괴로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위의 ①에서 ⑧까지는 필자가 과거에 직접 수행을 해보면서 경험해봤기 때문에 알게 된 것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전쟁터에서 코끼리가 싸우고 있는데 그 코끼리는 코만을 휘둘러 싸우지 않습니다. 코끼리는 경우에 따라서 뒤로 물러서거나 앞으로 나아가거나 돌진해서 부딪치기도 하고 발로 밟기도 하고 심지어는 꼬리를 휘두르기도 하고 즉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고 생존할 수 있는 확율을 조금이라도 높일 수 있도록 가용可用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싸우는 것처럼 <<일곱가지 보리분법 수행>>을 잘하기 위해서는 가용可用할 수 있는 모든 <<올바른 방법>>을 동원하여 <필수품을 갖춘 삼매>에 들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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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 념처에 대해서 외우고 있어야 합니다)

(사정근, 사념처,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위의 일곱가지 보리분법은 <<예를 들자면>> 만약 불(火)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불이 존재하는 조건은 탈 수 있는 나무와 산소라고 하는 두 조건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림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그림자는 어떤 물체가 있고 그 물체에 빛이 비치는 두 조건으로 그림자는 유지되는 것입니다)

(위의 비유처럼 <<일곱가지 보리분법>>이라는 조건으로 도가 닦아지는 것이고 도가 닦아진다는 것은 그 도가 닦아지기 위한 구성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니까야를 많이 반복해서 읽었기 때문에

<<일곱가지 보리분법을 잘 안다>>고 가정할 때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수행할 때 필요한 요소는

①오능이나 오력에서 "여래의 깨달음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②계속해서 호흡념처에 대해서 생각하고 기억하고 호흡 념처를 행하면서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을 반복하고 있을 때 칠각지가 차례로 일어나고 닦아지고 성취되는 것이 있습니다. (니까야의 다양한 경전 중 한가지 경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많이 암송하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도 포함입니다)
③사정근이 있습니다.
④사신족이 있습니다
⑤니까야를 전체적으로 많이 반복해서 읽고, 공부하고, 들었기 때문에 바른 견해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고 필수품을 갖춘 바른 삼매가 있습니다.
⑥경우에 따라서 오능이나 오력을 닦음이 있고 오능이나 오력의 성취가 있습니다.
⑦이전에는 알지 못하던 앎이(지혜가) 생겨납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팔정도의 바른 노력[=사정근]을 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한 법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하고>> <<이미 일어난 악한 법들이 사라지도록 열심히 마음을 다잡고 노력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법은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하고 이미 일어난 선한 법은 더욱더 증장시켜서 성취에 이를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죠?)

(법념처를 기준으로 본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한 법들>>과 <<이미 일어난 악한 법들>>은 다섯가지 장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법념처를 기준으로 본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법들>>과 <<이미 일어난 선한 법들>>은 <<일곱가지 보리분법>>을 의미합니다)

(니까야를 전체적으로 많이 읽고 듣고 공부해야 일어난 법이 선한 법인지 악한 법인지 알아서[=즉 바른 견해를 가져서] 완전한 깨달음으로 자신을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니까야"를 전체적으로 많이 반복해서 읽거나 듣거나 배우거나 공부하는 것을 잘 하기 위해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과 율에서 비구 스님이나 비구 승가>>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탑에 보시하면서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갖추기 위해서" "니가야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보시합니다 라고 입으로도 말하면서 그런 마음가짐으로 보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갖추기 위해서" 니까야 공부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까야 공부하는 것이 잘 안된다면 보시가 부족한 것이기 때문에 보시를 더 해야 합니다.

필자가 보시하라고 반복해서 권하는 것은 필자가 직접 격어보았고 보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에게 이득이 되고 타인에게도 이득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반복해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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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검은 소와 힌 소의 비유처럼

'검은 소'와 '흰 소'가 멍에에 매여 있는데 누군가 말하기를 검은 소는 힌 소를 묶고 있고 힌 소는 검은 소를 묶고 있다 라고 한다면 잘못 말한 것이죠 "검은 소가 힌 소를 묶고 있거나 힌 소가 검은 소를 묶고 있는 것이 아니라" 멍에가 검은 소와 힌 소를 묶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멍에는 Chandarāga입니다.

이 Chandarāga만 제어하여 일시적으로 때어낼 수만 있다면 우선에 "삼사화합촉"으로 생기는 고통을 일시적이라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삼사화합촉"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원인으로 feeling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만약에 어떠한 feeling이라도 감각할 수 있는 상황이 남아있다면 그것은 "삼사화합촉" 된 상태가 남아 있는 것이고 아무리 사소한 부분이라도 그 "삼사화합촉" 상태를 알아차리지(발견하지) 못하거나 방치하고 있는 것이고 그 "삼사화합촉" 상태를 발견했다고 하더라도 그 "삼사화합촉"에 대한 Chandarāga가 남아 있기 때문에 그것을 원동력으로 "삼사화합촉"이 유지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행에 의해서 식이 있다라고 합니다  ("삼사화합촉"이라는 것은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까지의 과정이 포함된 것입니다)

안, 이, 비, 설, 신, 의
색, 성, 향, 미, 촉, 법

행은 바로 위의 육입처의 영역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앞에서 검은 소와 힌 소에 대한 비유를 설명했는데 그 비유에서 "검은 소와 힌 소"를 묶고 있는 Chandarāga는 누구의 것일까요?

항상 상대적입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A라는 사람과 B라는 사람 사이에서 "삼사화합촉"이 형성됬다고 합시다. 그러면 저 두 사람을 "삼사화합촉" 상태로 묶는 Chandarāga는 A의 것일 수도 있고  B의 것일 수도 있고 A와 B 둘 다의 것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에서 비유한 "멍에(Chandarāga)가 검은 소와 힌 소를 묶고 있는 것"의 상태를 제거하고 일시적이더라도 그 상태에서 풀려나고자 한다면 자신의 Chandarāga만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삼사화합촉"의 원동력인 Chandarāga도 제거해야만 그 상태를 풀어낼 수 있고 일시적이라도 풀려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로 위의 설명에서 그 Chandarāga가 다른 존재나 다른 사람의 것일 때 다른 사람의 몸에 있는 Chandarāga를 제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삼사화합촉"의 원동력은 Chandarāga라는 앎을 가지고 Chandarāga를 제거하기 위해서 "신념처, 등등"을 아주 열심히 수행하다 보면 상태방이 일으킨 Chandarāga로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것(<=이것은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이 Chandarāga를 제거하는 수행의 진척도에 따라 점점 줄어들다가 사라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때는 "사념처와 칠각지를 닦아서 <<<다섯가지 장애>>>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수행을 해야 하는 것이고요)

(수행이 어느 정도 진행되다보면 여러분들에게서 Chandarāga를 일으키기 위해서 5가지 부분으로 이루어진 감각적 또는 관능적 즐거움에 대한 Chandarāga으로 풍선처럼 부풀리게 만들려는 작용을 일으키려는 자가 두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고 접촉을 유지시키고 있는 것을 직접 볼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수행 중에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면서 수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정신적 육체적 느낌(or 감정)은 "삼사화합촉"으로 생긴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코로 숨을 들이 쉬고 숨을 내쉴 때의 몸의 움직임에 대한 알아차림(때로는 눈으로 보는 것도 포함),
코로 숨을 들이 쉬고 숨을 내쉴 때의 몸의 자세에 대한 알아차림,
코로 숨을 들이 쉬고 숨을 내쉴 때의 숨소리에 대한 알아차림,
호흡이 코끝에서 폐로 들어가고 폐에서 코로 나올 때의 공기의 접촉으로 인한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
호흡념처 중에 존재하는 심념처에 대한 알아차림,
호흡념처 중에 존재하는 법념처에 대한 알아차림)
(즉 호흡념처(신념처)로부터 시작하여 사념처를 닦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칠각지의 과정을 닦으면서 다섯가지 장애를 제거하는 방식), 등등을 <아주  부지런히> 행하면서 "삼사화합촉" 에 대한 Chandarāga를 "삼사화합촉" 상태에서 존재하는 감각적, 관능적 즐거움에 대한 "삼사화합촉" 제어하고 제거하려는 노력을 반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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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흡 념처에 대해서 외우고 있어야 합니다)
(사정근, 사념처, 사여의족,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위의 일곱가지 보리분법은 <<예를 들자면>> 만약 불(火)이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불이 존재하는 조건은 탈 수 있는 나무와 산소라고 하는 두 조건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림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그 그림자는 어떤 물체가 있고 그 물체에 빛이 비치는 두 조건으로 그림자는 유지되는 것입니다)

(위의 비유처럼 <<일곱가지 보리분법>>이라는 조건으로 도가 닦아지는 것이고 도가 닦아진다는 것은 그 도가 닦아지기 위한 구성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를 들어 팔정도의 바른 노력[=사정근]을 보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한 법들이 일어나지 못하게 해야 하고>> <<이미 일어난 악한 법들이 사라지도록 열심히 마음을 다잡고 노력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죠?)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법은 일어나도록 노력해야 하고 이미 일어난 선한 법은 더욱더 증장시켜서 성취에 이를 때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방식으로 설명하죠?)

(법념처를 기준으로 본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악한 법들>>과 <<이미 일어난 악한 법들>>은 다섯가지 장애를 말하는 것입니다)

(법념처를 기준으로 본다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선한 법들>>과 <<이미 일어난 선한 법들>>은 <<일곱가지 보리분법>>을 의미합니다)

(니까야를 전체적으로 많이 읽고 듣고 공부해야 일어난 법이 선한 법인지 악한 법인지 알아서[=즉 바른 견해를 가져서] 완전한 깨달음으로 자신을 이끌 수 있는 것입니다.

"니까야"를 전체적으로 많이 반복해서 읽거나 듣거나 배우거나 공부하는 것을 잘 하기 위해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법과 율에서 비구 스님이나 비구 승가>>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탑에 보시하면서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갖추기 위해서" "니가야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보시합니다 라고 입으로도 말하면서 그런 마음가짐으로 보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갖추기 위해서" 니까야 공부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까야 공부하는 것으로 마음이 잘 기울어지지 않고 잘 안된다 싶은 때는 보시가 부족한 겁니다.

필자가 보시하라고 반복해서 권하는 것은 필자가 직접 격어보았고 보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에게 이득이 되고 타인에게도 이득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반복해서 언급을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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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형식으로든 여러가지가 모여서 형성된" "나의 것, 나, 나의 자아"라고 "불리는 것들 중" <<<하나>>>라도 "삼사화합촉"되어 있다면 feeling해야만 한다는 것을 알고

내가 아직 찾지 못한 "삼사화합촉"상태를 <<찾아다니면서>> 찾게 되면

그 "삼사화합촉"되어 있는 상태를 분명히 알면서 코끝에 마음을 두고 <<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등등>>을 <아주  부지런히> 행하면서 "삼사화합촉"을 하는 "즐거움"에 대한 Chandarāga를 제어하고 제거하려는 노력을 반복합니다 그런 식으로 "삼사화합촉" 상태를 <<찾고>> <신념처, 등등을 통해서> 제거하기를 반복 또 반복을 반복하다 보면 "삼사화합촉"이 종료된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고 어느 순간 "삼사화합촉"이 일시적으로 해제되고 feeling해야만 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을 스스로 알고 경험하게 됩니다.

(<= 여기서  <신념처, 등등을 통해서>라는 것은 사념처와 칠각지를 닦아서 다섯가지 장애를 제거하는 수행 방식을 의미합니다)

(<= 이때 어떠한 방식으로든 '정신적 육체적 느낌과 감정'이 존재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삼사화합촉"이 되어 있는 상태기 때문에 '육체적 느낌과 감정[feeling]'이 있습니다)

(이때 삼사화합촉은 십이연기적인 즉 무명=> 행=> 식 <=> 명색=> 육입처라는 이전 과정이 포함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른 존재와의 "삼사화합촉"이 아니라면 "자신의 몸"에서 감각적 즐거움이나 관능적 즐거움에 대한 "충동과 흥분Chandarāga"를 찾아다니면서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잘 하기 위해서 니까야를 전체적으로 <<아주 많이 반복해서>> "읽고, 듣고, 공부"해야 합니다.

비구 스님이나 비구 승가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탑에 보시하면서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갖추기 위해서" "니가야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보시합니다 라고 입으로도 말하면서 그런 마음가짐으로 보시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갖추기 위해서" 니까야 공부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은 필자가 "직접 경험"해보고 알게 된 것과 니까야와 해피 스님의 법문을 "읽고 듣고 보고", 등등을 통해서 설명하였습니다. 참고되시기 바랍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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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darāga:

1. 충동衝動(impulse) 및 흥분감興奮感(excitement)

2.
① (설렘, 기대감期待感, 욕구欲求, or 욕망欲望)으로 흥분하는 것 (exciting desire)
② 흥분하게 하는 (설렘, 기대감期待感, 욕구欲求, or 욕망欲望) (exciting desire)

3. 충동적인 욕망欲望 (or 욕구欲求) (impulsive desire)

*설렘(설레다), 기대감, 욕구, 욕망은 네이버 국어사전 참조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8_04nn&wr_id=272&page=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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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내용은 필자가 직접 경험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불자시라면 진지하게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직접 경험했던 것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는 겁니다 인간 세계에서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화생으로 태어나는 세계입니다 신통력이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자신의 모습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거울이 아니에요 뒷 모습 전체와 주변 전체를 마치 눈앞에서 보듯이 아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 상태에서 그 모습을 보여주면서 누군가가 그 사람을 해칠려고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럴 때 보통 어떻게 생각하죠? 나의 일도 아닌데 난 모른다 이렇게 하면서 남의 일로 치부하겠죠?

<특히나> 수행을 하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세속적인 일에 신경 쓰지 않을려고 하기 때문에 더욱 더 그런 것이겠죠.

삼매에 들려고 하는 상황인데 그러한 상황이라고 수행을 그만두고 나와서 나와서 고함을 질러야 할까요?

그런데 그것은 함정입니다. 바로 <당신 자신의 뒷모습>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누군가 당신을 노리는 겁니다 당신의 방심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런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것을 볼 때 남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아 나 자신의 몸을 보여준다고 알아차리고>  <자기 자신의 몸>에서 <일어날 수도 있는 위험>에 대해서 <그 공포를 알아차리고 있으면서 공포를 제거 하고 있습니다> (<= 그 공포를 제거하는 의도를 가지고) <동시에> 호흡에 대한 사띠, 몸에 대한 사띠, 등을 부지런지 행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여섯 부처님 3[아따나따 보호주(D32) ( http://nikaya.kr/bbs/board.php?bo_table=happy04_02&wr_id=25 ) 스님의 법문에서 보면

"까꾸산다 여래 아라한 정등각"이라는 과거에 출현하셨던 부처님께 "마라의 군대를 정복하신"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아따나따 보호주(D32) 경전은 지혜로운 불자들이 여래께서 앞서 가셨던 길을 알고 앞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도를 닦아 나아가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마라의 군대에는 "갈애"가 포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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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생하는 세계에서 필자가 직접 본 것입니다만

마라가 "인간의 육신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상태"로 필자와 대화하던 이에게 접근하여 "그 피해자"에게 서서히 스며들듯이 합쳐지고 마라가 "그 피해자"인 것처럼 행세하는 것을 눈앞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 그 마라는 필자에게 필자를 잘못되게 하는 말에 대해서 필자 스스로 동의하도록 유도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때 제가 이렇게 말햇습니다. "사악한자야 당신이 그렇게 변한다고 해서 내가 당신을 모를 것이라고 여기지 마라." 라고 했었던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마라가 존재하고 있고 그 마라는 여러분들을 잘못된 길로 여러분 스스로 가도록 유도 할 수 있습니다.

마라가 두렵다면 우선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갖추기 위해서" "니까야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보시합니다 라고 말도 하고 "그런 마음가짐으로 보시"한 뒤 열심히 니까야를 전체적으로 많이 반복해서 읽고, 듣고, 공부하십시오.

니까야 공부가 지겹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의 보시가 부족하거나 보시를 했더라도 보시의 분명한 목적("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갖추기 위한" "니까야 공부를 잘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보시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음을 장엄하고 마음의 필수품을 갖추기 위해서는 니까야를 많이 반복해서 공부해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잘하기 위해서는 보시가 뒷받침 되어야 그 힘으로 난관을 극복하면서 니까야 공부를 잘 할 수 있게 되는 것이겠지요.

Comments

작업1 02.04 21:32
참고되시기 바랍니다. _()_